민사에선 “야놀자에 10억원 배상하라”
형사에선 1심 유죄→항소심 무죄로 뒤집혀
최근 법원이 크롤링 프로그램을 활용한 사업자의 손해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크롤링 프로그램 활용은 상대방이 공들여 쌓은 정보를 통째로 훔쳐 가는 부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선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형사 처분까지 받을 수 있다.
여기어때, 야놀자 정보 ‘크롤링’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63-2부(부장판사 박태일‧이민수‧이태웅)는 야놀자가 여기어때를 상대로 낸 권리침해금지 소송 1심에서 “야놀자에 10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에 따르면 여기어때는 2015년부터 경쟁 회사인 야놀자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이나 PC용 웹페이지에 접속해 제휴 숙박 업소 목록, 주소 정보, 가격 정보를 확인하고 내부적으로 공유했다. 해당 자료가 영업에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2016년 1월부터 정보를 취득하는 방식을 바꿨다. 수기로 일일이 정보를 취합하는 대신 크롤링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어때 측은 크롤링 프로그램에 마치 정상적인 모바일 앱 이용자가 이용하는 것처럼 위장해 숙박 업소 정보를 불러오는 기능을 탑재했다.
일반적인 앱 이용자들은 7~30km 범위 내의 숙박 업소만 검색할 수 있지만 이 프로그램을 통해선 반경 1000km 내에 있는 숙박 업소의 정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여기어때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야놀자의 제휴 숙박 업소 업체명, 주소, 방 이름, 원래 금액, 할인 금액, 입실 시간, 퇴실 시간, 날짜 등을 복제했다.
특히 2016년 8월부터 야놀자의 ‘마이룸’ 서비스와 유사한 서비스를 개시할지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에 마이룸의 판매 개수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기어때가 이처럼 기능이 개선된 크롤링 프로그램을 이용해 야놀자의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서버에 접근하던 중 야놀자는 이 프로그램 이용으로 인한 대량 호출 신호를 감지하게 된다.
야놀자가 여기어때가 이용하는 아마존웹서비스(AWS) 클라우드 서버의 IP 주소를 차단하자 여기어때 측은 서버의 전원을 차단했다가 다시 켜는 방식으로 IP 주소를 변경했다. 여기어때는 2016년 10월까지 이 같은 방식으로 야놀자의 정보를 복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야놀자는 2016년 여기어때를 수사 당국에 고소했고 2018년 민사 소송도 제기했다.
“여기어때, 10억원 배상하라”
1심 재판부는 “피고(여기어때)의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직원들은 크롤링 프로그램을 개발, 이용해 제휴 숙박 업소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영업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원고(야놀자)의 정보를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 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무단으로 사용했고, 그 결과 원고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야놀자의 행위가 민법상 불법 행위인 부당 경쟁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어때 측은 “크롤링 등을 통한 정보 수집은 매우 일반적으로 당연히 이뤄지는 것이고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여기어때 측이 1시간마다 크롤링을 할 때 야놀자의 서버를 쓰는 것은 발각될 위험이 있다고 보고 크롤링 프로그램을 AWS 클라우드로 이전 조치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여기어때 측 임직원들이 크롤링 프로그램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면 문제가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제휴 숙박 업소의 정보는 별다른 가치가 없다”는 여기어때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별도의 프로그램까지 개발하고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직원들이 조직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반복해 무단 복제 행위를 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또 “피고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제휴 숙박 업소의 정보를 가공‧분석해 원고의 영업 전략과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참고해 영업 전략을 수립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야놀자의 손해액을 10억원으로 책정했다. 재판부는 “야놀자가 2016년 한 해에 영업부서 인건비만으로 26억원이 넘는 금액을 투여한 점, 여기어때가 손해 배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점 등을 종합했다”고 설명했다. 야놀자의 숙박 업소 정보를 복제‧반포‧전송‧양도‧판매‧보관하는 것도 금지한다고 판결했다.
형사 재판에선 1‧2심 판결 엇갈려
심명섭 전 위드이노베이션 대표 등 여기어때 관계자들은 정보통신망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형사 재판도 받고 있다. 심 전 대표를 비롯한 여기어때 전‧현직 임직원들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2021년 1월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5단독 신민석 판사는 2020년 2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정보통신망침해등), 저작권법 위반, 컴퓨터 등 장애 업무 방해 혐의로 기소된 심 전 대표에게 징역 1년 6개월과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크롤링 프로그램이 검색 엔진 등에 널리 사용되고 있고 정보화 시대에 유용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타인의 정보통신망을 무단으로 침입하는 불법 행위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또 “피고인들이 접속 과정에서 복제한 정보가 모바일 앱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는지 여부는 침입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1부(부장판사 최병률‧유석동‧이관형)는 다르게 판단했다. 야놀자 측이 앱이나 API 서버 접속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크롤링을 통해 가져간 정보들은 피해자 회사가 자신의 숙박 예약 영업을 위해 이용자들에게 공개한 정보”라며 “(크롤링 등을 통하지 않고) 앱을 통하더라도 다소 번거롭긴 하지만 크롤링한 것과 같은 종류와 양의 정보들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저작권법 위반‧컴퓨터 등 장애 업무 방해 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로 판단했다. 여기어때 관계자들은 현재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돋보기] 사람인HR도 경쟁사 채용 정보 무단 복제해 법적 공방
크롤링 프로그램 사용과 관련해 앞서 진행된 주요 법정 싸움으로는 채용 정보 업체 잡코리아와 사람인HR의 분쟁이 있다. 사람인이 잡코리아의 정보를 크롤링해 웹페이지에 그대로 게재하면서 법적 공방이 벌어진 것이다.
양측 간 법정 싸움은 2008년 시작됐다. 당시 사람인은 잡코리아에 등록된 기업의 채용 공고를 크롤링해 게재했다. 사람인이 채용 공고를 무단으로 복제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잡코리아는 2010년 사람인을 상대로 법원에 채용 정보 복제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사람인이 잡코리아의 채용 정보를 무단 게재하지 말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법원 결정 이후에도 사람인은 검색 로봇을 활용해 잡코리아의 웹사이트 내용 수백여 건을 복제해 갔다. 잡코리아는 사람인을 상대로 “무단으로 복제한 채용 정보 1건당 50만원씩 배상하라”며 저작권 침해 금지 청구 소송을 냈다.
1심 재판부는 사람인에 무단 복제한 채용 정보 396건을 폐기하고 잡코리아에 건당 50만원씩 1억98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람인이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하자 잡코리아는 “사람인이 저작권법상 데이터베이스권을 침해했다”고 맞섰다. 잡코리아의 채용 정보 웹사이트가 인적‧물적 투자를 토대로 구축된 데이터베이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잡코리아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람인에 데이터베이스권 침해로 인한 손해 배상금 2억5000만원과 간접 강제금 등을 합해 4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람인이 상고했지만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리며 판결은 최종 확정됐다.
이후 잡코리아는 사람인을 상대로 추가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사람인이 2018년 소송 합의금으로 잡코리아에 120억원을 지급하며 10년에 걸친 법적 분쟁은 일단락됐다. 사람인 측은 결국 과거에 복제한 채용 정보도 모두 폐기하게 됐다.
최한종 한국경제 기자 onebe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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