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전통 주조 예술에서 만난 양온소(釀醞所)

[막걸리 열전]

‘동몽(同夢)’, ‘만강에 비친 달’, ‘동짓달 기나긴 밤’, ‘배꽃 필 무렵’.
한 편의 시서와도 같은 이 어휘는 전통 주조 ‘예술’의 술 이름이다. 예술을 방문하기 전, 저 술의 이름을 두고 경우의 수를 예상했다. 양조장의 이름에 기반해 술의 이름 또한 예술로 지은 것이거나 술의 향미를 예술에 빗대었거나 그도 아니면 술을 빚는 이가 거룩한 낭만파이거나…. 그렇게 궁금증을 가득 품고 굽이진 산길을 지나 이윽고 홍천 백암산 자락에서 전통 주조 ‘예술’의 문을 열었다.
강원도 홍천 백암산 자락에 있는 전통 주조 ‘예술’.
강원도 홍천 백암산 자락에 있는 전통 주조 ‘예술’.
‘예술’이 첫 간판을 내걸었던 것은 2012년이지만 이곳의 주인장 정회철‧조인숙 부부가 이곳 내촌면에 터를 잡은 것은 2008년부터다. 당시에는 양조장을 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건강상의 이유로 도시살이를 접고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쉬면서 목재도 만지고 술도 만지고 그랬어요. 취미로 슬며시 시작한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13년 전엔 몰랐죠.” 하고 많은 취미 가운데 왜 술에 손을 담갔느냐는 물음에 그는 어릴 적 양조장에 대한 좋은 기억 덕분이라고 대답했다. “친가였던 군산에 이따금씩 놀러 가면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양조장에서 술을 받아 갔는데, 아직도 그 양조장 땅 밑에 묻어 뒀던 술 항아리와 술이 담긴 주전자, 동네 사람들과 술 한잔으로 즐거워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해요.” 그뿐만 아니라 부부는 양조장을 시작하기도 한참 전 한 신문에 게재된 전국 양조장 기사를 보고 무작정 투어를 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지금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정 대표는 덧붙였지만 그것은 부부가 품은 전통주에 대한 애정이자 양조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운명이었다고 본다.
정회철 전통 주조 예술 대표.
정회철 전통 주조 예술 대표.
재주 많은 조 대표
그렇게 전국 양조장 투어를 마친 부부는 귀동냥으로 보고 들은 재료를 구입해 술을 담그기 시작했다. “작은 항아리 안에서 ‘골골’ 술 끓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정말 술이 만들어진다는 게 마냥 신기했어요. 그래서 목공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나눠 마셨죠. 다들 맛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아, 내가 또 잘할 수 있는 게 하나 더 생겼구나’ 하면서 홍천에 내려와 판을 더 키운 거죠.” 정 대표는 겸양의 미덕을 보였지만 사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일하며 헌법학 교재를 집필하기도 한 사람이다. 게다가 양조장 곳곳에 원목 가구와 장식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그의 재주에 대해선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의 감각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예술의 ‘술’에서다.
(왼쪽부터) 떠먹는 이화주 ‘배꽃 필 무렵’, 맵쌀을 섞어 담백한 ‘홍천강 탁주’, 홍천 특산물 단호박으로 만든 탁주 ‘만강에 비친 달’.
(왼쪽부터) 떠먹는 이화주 ‘배꽃 필 무렵’, 맵쌀을 섞어 담백한 ‘홍천강 탁주’, 홍천 특산물 단호박으로 만든 탁주 ‘만강에 비친 달’.
예술의 ‘술’
멥쌀을 섞어 담백한 맛이 일품인 ‘홍천강 탁주’, 홍천 특산물 단호박으로 만든 탁주 ‘만강에 비친 달’, 청와대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소식에 만찬주로 올라간 약주 ‘동몽’, 쌀과 복분자를 원료로 한 ‘동짓달 기나긴 밤’ 등 하나같이 맛과 향이 풍성하고 좋다. 또한 죽처럼 숟가락으로 떠먹는 이화주 ‘배꽃 필 무렵’은 색다른 탁주의 표본을 보여주며 혀를 자극한다. 1인 양조장으로서 이렇게 늘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정 대표가 직접 빚은 누룩 덕분이다. “수년간 누룩을 연구했어요. 예술만의 술을 만들고 싶어서죠. 지금도 장마철을 제외하곤 부지런히 누룩을 띄워요. 족히 두 달 넘게 걸리는 작업이라 성실하게 빚어야 하거든요.” 그가 자리를 옮겨 누룩을 빚고 있는 ‘양온소(釀醞所)’를 소개했다. 본디 고려 때 왕이 마시는 술을 빚는 관공서 ‘양온서(良醞署)’에서 착안해 이름을 지었다는 이곳은 부부가 처음 홍천에 내려와 꾸린 살림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제는 누룩을 빚고 띄우며 술을 연구·개발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예술만의 술을 만들기 위해 직접 누룩을 빚는 정 대표.
예술만의 술을 만들기 위해 직접 누룩을 빚는 정 대표.
전통주의 근본, 누룩
“이게 예술의 핵심이자 한국 술의 정체성이에요. 일제가 가양주 문화를 없애기 전 전통주, 그러니까 한국 전통 누룩의 강점이 뭔 줄 아세요. 바로 자연 효모예요. 인공 배양된 일본식 누룩이 아니라 한국 누룩이 가진 쿰쿰한 맛을 뿜은 전통주가 한국 술의 정체성인 거죠.” 정 대표는 한창 발효 중인 누룩과 술을 앞에 두고 한국 전통주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심지를 내보였다. 그러면서 전통주 문화를 부흥시키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전통주에 대한 관심을 이어질 수 있도록 앞으로 이 시장은 두 가지 갈래로 뻗어 나가야 한다고 봐요. 우리 같은 소규모 양조장은 물론이고 반드시 대량 생산도 필요해요. 그래야만 소비자들이 좀 더 저렴하고 쉽게 전통주에 다가갈 수 있잖아요.”

뜨거운 햇살이 양온소의 창가를 가득 비출 무렵 정 대표와의 이야기가 마무리됐다. 이곳을 찾기 전 예술의 술에 붙은 낭만적인 이름들은 양조장의 이름이나 대표의 취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무던히도 성실하게 빚고 띄워 만든 술에 대한 정애가 그토록 시서와 같은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홍천 예술 양온소의 술 빚는 향이 언제고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느릿한 발걸음으로 다시 귀갓길에 올랐다.

손유미 객원기자 mook@hankyung.com
사진=스튜디오텐(STUDIOT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