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자를 다수로 만드는 것이 중요…때로는 구매자끼리 뭉치는 것도 좋은 전략

[경영 전략]
‘을’처럼 협상해야 하는 ‘갑’을 위한 조언[김한솔의 경영 전략]
협상엔 갑을 관계가 있다. 통상적으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즉 구매처는 갑이 되고 판매자는 을이 된다. 대부분은 갑의 힘이 세다. 그러다 보니 ‘갑질’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하지만 정반대인 경우도 종종 생긴다. 갑인 구매자가 오히려 을에게 쩔쩔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바로 독점 공급사를 만났을 때다. 갑이지만 평소의 갑처럼 행동할 수 없는 상황, 어떤 협상법이 필요할까.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있는데 그 제품을 단 하나의 업체에서만 만들고 있다면 계약서상 갑의 지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그들이 원하는 조건을 맞춰 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독점적 기술을 가진 독점 공급사와의 협상을 끌어 갈 방법은 ‘주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대로 끌려가며 다 주라는 말은 아니다. 이번 협상과는 관련이 없지만 상대가 관심을 가질 만한 다른 가치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압도적 기술력을 가진 협력 업체가 구매처가 받아들이기 힘든 단가 인상을 요구하는 상황이라면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원하는 만큼의 돈을 지불할 수 있으면 간단히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실행할 수 있는 구매처는 많지 않다. 그래서 현재가 아닌 미래에 집중해야 한다. 이들이 가진 기술력을 더 크게 활용할 수 있도록 신제품 개발을 목적으로 한 조인트벤처를 함께 만드는 식이다.삼성이 TEL에 목소리를 내게 된 이유이를 통해 협력 업체가 원하는 ‘당장의 경제적 가치(돈)’는 만족시켜 줄 수 없어도 ‘미래 성장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 미래의 약속을 함께 한 덕분에 협력 업체가 현재의 계약에 대해 좀 더 책임감을 갖게 할 수 있는 것도 부수적이지만 중요한 효과다.

그래서 기술력이 높아 현재 대체재가 없는 독점 공급사를 상대해야 할 때는 ‘줄 것’을 찾아야 한다. 자신에겐 큰 비용이나 노력이 들지 않지만 상대에겐 훨씬 큰 가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협상은 일회성 계약이 아닌 지속적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자.

그런데 구매처가 협력 업체의 구미가 당길 만한 미래의 옵션을 주지 못할 때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협상의 판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독점 공급사와의 협상이 어려운 이유는 사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다수에 속한 기업은 협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매력적인 이성 한 명을 두고 여러 명이 경쟁하는 구조인 셈이다. 이때 불리한 판을 바꾸려면 한 명의 공급자를 복수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현업에 구현해 실제로 성과를 낸 사례가 있다.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건식 식각 장비(GPE)를 구매해야 했던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다.

미세 공정 기술이 필요한 이 장비를 과거엔 일본의 도쿄일레트론(TEL)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장비 구매 시 구매처임에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한국 반도체 장비 업체인 ‘테스’에 지속적으로 기술 개선을 유도했다. 기존에 이들이 갖고 있는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TEL만 보유하고 있는 공정까지도 수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결과 TEL이 독점 공급하고 있던 장비를 대체할 정도의 품질이 확보됐다. 당장의 전면적 전환은 어렵지만 강력한 대체재 하나를 가진 것이다. 이 덕분에 삼성전자는 TEL과의 장비 구매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거래처를 만드는 과정은 물론 어렵다. 그 일을 하지 않던 회사가 새로운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담당자에겐 일이 두세 배 늘어날 수 있다.

투자비와 같은 돈이 들어가기도 한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그만큼 인풋을 투자해 공급망을 다원화하고 나면 그 이후의 협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모르쇠’를 일삼던 애초의 독점 공급사가 예전처럼 배짱을 부릴 수 없기 때문이다.협상하기 전 구조를 짜는 것이 핵심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또 질문이 생긴다. 새로운 공급처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도 협상 판을 다시 짜는 고민을 해야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독점 공급사와의 협상은 다수의 구매 희망자와 한 명의 공급자 간의 대결 구도여서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 어렵다.

이를 대등하게 할 또 다른 방법은 다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구매 업체 역시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얘기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적과의 동침’이다. 우리 회사와 같은 것을 구매하고자 하는 상대는 일반적으로 경쟁사일 때가 많다. 하지만 공급사와의 협상을 위해서라면 한 배를 탈 수도 있다.

지난 칼럼에서 설명했던, 버스 구매 단가를 낮추기 위해 서울시 시내버스 업체들이 조합을 만들어 ‘공동 구매’를 하는 식이다. 여러 시내버스 업체를 대상으로 단가를 높이던 버스 생산 업체가 ‘하나의 구매처’만 상대하면 예전만큼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경쟁 관계라고 하더라도 구매 상황에서는 힘을 모으는 것도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다수의 구매 희망자 중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키우는 것이다. 이 방식은 사례를 통해 풀어보자.

스마트폰을 포함해 다양한 전자 제품의 디스플레이를 주도하고 있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은 삼성디스플레이가 압도적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기술력 등 다양한 요인이 있겠지만 협상 관점으로 분석해 보면 이들이 공급 업체의 ‘손’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을’처럼 협상해야 하는 ‘갑’을 위한 조언[김한솔의 경영 전략]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삼성디스플레이를 포함해 다양한 기업들이 OLED 생산에 뛰어들려고 했다.

이때 핵심 플레이어는 일본의 ‘캐논 도키’라는 기업이었다. OLED 생산에 꼭 필요한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업체로 ‘캐논 도키’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한 개의 공급사에 다양한 구매처가 매달리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이때 삼성디스플레이의 전략은 반독점 형태의 공급 계약을 하는 것이었다. 2년간 캐논 도키가 생산하는 장비의 90%를 삼성디스플레이에만 납품하도록 한 것이다.

구매 시장 자체에 다수가 존재할 수 없게끔 자물쇠를 잠근 방식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려면 애초 예상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덕분에 삼성디스플레이는 OLED 시장 성장기에 타 경쟁사를 압도적으로 누르며 치고 나갈 수 있었다.

이런 시장 구조를 만들어 놓으면, 아무리 독점 공급 기업이더라도 ‘딴소리’를 하지 못한다. 다수를 ‘1’로 만드는 것의 힘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혹시 눈치를 챈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독점 공급사와의 협상은 어려운 게 아니다. 독점 업체와의 협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과 협상하기 전 구조를 짜는 게 핵심이라는 뜻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게임에 들어가기 전 경기장을 최대한 평평하게 만들어 두는 게 필요하다. 갑인데 을처럼 협상하고 있어 답답한가. 그러면 우리가 뛰고 있는 경기장부터 다시 만들어 보자. 그게 승리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느리지만 가장 빠른 방법이다.

김한솔 HSG휴먼솔루션그룹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