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탁 계약에도 노동자성 인정…“퇴직금 지급해야”

[법알못 판례 읽기]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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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고용직은 회사와 노동 계약이 아니라 독립 사업자로서 계약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보험설계사, 택배 운전사, 학습지 교사, 대리운전사, 정수기·에어컨 운전사(외근직 애프터서비스 근무 요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독립 사업자는 사전적으로는 ‘자영업자’의 지위다. 즉 회사의 지휘와 감독 아래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일반 자영업자와 다르게 회사와 계약돼 있다.

이 때문에 독립 사업자가 회사의 지시를 받는 일들이 이어지며 이들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되곤 한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으면 자영업자의 지위일 경우 누릴 수 없는 보험 혜택이나 퇴직금 등을 회사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특수 고용직 가운데 정수기 운전사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정수기 운전사가 회사와 ‘독립 사업자’라는 계약을 하고 일했다고 하더라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2심 “실질적 지휘 없었다…노동자 아냐”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청호나이스에서 엔지니어로 제품 설치 및 사후 관리(애프터서비스) 등의 업무를 한 A 씨 등 2명이 낸 퇴직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청호나이스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11월 23일 밝혔다.

A 씨와 B 씨는 각각 2001년 7월, 2009년 7월부터 청호나이스와 서비스 용역 위탁 계약을 한 정수기 운전사였다. 중간에 서비스 용역 위탁 계약 업체가 바뀌며 계약을 체결하는 주체가 바뀌긴 했지만 2012년 위탁 업체가 청호나이스에 흡수·합병되며 이들은 최종적으로 청호나이스와 서비스 용역 위탁 계약을 한 ‘독립 사업자’들의 지위를 가지게 됐다.

A 씨와 B 씨의 위탁 계약은 2016년 종료됐다. 그러자 이들은 ‘퇴직금’을 지급하라며 청호나이스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청호나이스 위탁 계약에는 ‘수탁자와 위탁자가 노동 관계에 있지 않은 독립 사업자여서 퇴직금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A 씨 등은 “근무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청호나이스에 전속돼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방식으로 임금을 지급받는 종속적인 노동 관계에 있었던 노동자들”이라며 각각 퇴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청호나이스가 용모와 복장 등을 규정한 정수기 운전사의 ‘10대 행동강령’을 두고 A 씨 등을 상대로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하급심은 정수기 운전사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급심 재판부는 “회사는 정수기 운전사들에게 기본급 없이 애프터서비스나 판매 건당 수수료만 준 뒤 근로소득세가 아닌 사업소득세를 징수했다”며 “4대 보험료도 납부하지 않았다”고 노동자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10대 행동강령을 두고 있었지만 정수기 운전사는 회사의 취업 규칙, 복무 규정, 인사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다”며 “다른 사업자와 위탁 계약을 체결하거나 독자적인 사업을 하는 데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회사가 운전사들을 상대로 교육을 진행하긴 했지만 자발적인 업무 개선을 유도한 것이고 ‘정시보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더 늦게 퇴근하라’는 청호나이스 대표의 발언은 조언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봤다.

대법 “노동자 맞다” 파기

하지만 판결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재판부는 “원고가 피고와 체결한 위탁 계약의 형식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은 원고들이 종속적인 관계에서 피고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 계약 관계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독립 사업자와 회사가 종속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경제적·사회적 여러 조건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면서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 징수했는지, 사회보장제도에 관해 노동자로 인정받는지 등과 같은 사정은 사용자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 노동자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청호나이스가 엔지니어의 매출 목표를 설정하고 교육하는 등 업무 수행에 관해 지휘·감독했다고 판단했다. 반복적인 재계약 또는 기간 연장 합의를 통해 오랜 시간 일한 만큼 업무의 계속성도 인정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청호나이스는 A 씨 등에게 배정받은 제품의 설치·애프터서비스 업무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고 업무 처리에 관한 각종 기준을 설정하고 그 준수를 지시했으며 A 씨 등에 대해 매출 목표의 설정과 관리, 교육 등을 지속해 실시했다”며 “청호나이스가 이들의 업무 수행에 관해 상당한 지휘·감독을 했다”고 판시했다.

기본급 없이 판매 수수료를 받은 것 등에 대해서는 “청호나이스가 정한 기준에 따랐기 때문일 뿐”이라며 “청호나이스의 지휘·감독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받은 수수료가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의 임금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덧붙였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 8월 다른 정수기 업체인 앨트웰의 수리 운전사들에 대해서도 “노동자성이 인정되기 때문에 회사가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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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특고직’ 헬스트레이너는?

헬스트레이너 역시 또 다른 특수 고용직 중 하나지만 대법원은 이들에 대해서는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트레이너의 노동자성을 두고 하급심 법원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판단이 엇갈렸지만 대법원은 트레이너가 회원들과 계약하고 퍼스널 트레이닝(PT) 강습 일정과 이용 금액을 자율적으로 결정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11월 11일 헬스트레이너 A 씨가 헬스장 사업주 B 씨를 상대로 낸 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트레이너 A 씨는 서울의 한 프랜차이즈 헬스장에서 약 3년 9개월 근무했다. A 씨는 퇴사하면서 퇴직금을 요구했지만 B 씨는 “A 씨와 체결한 계약서는 용역 계약서”라며 퇴직금 지급을 거부했다.

해당 계약서에는 A 씨는 B 씨가 제공한 장소에서 ‘위탁’받은 회원을 성실히 관리하고 B 씨는 수수료를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B 씨는 “강습 서비스는 A 씨의 재량에 따라 개별 회원들과 협의해 진행됐다”며 그가 B 씨의 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 사업자였다고 주장했다.

반면 A 씨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고 수업 시간표를 제출했다”며 “이 밖에 회원 안전 관리와 강습 홍보, 신입 트레이너 면접 등의 업무를 병행했다”고 반박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트레이너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봤지만 법원은 헬스장 운영 방식을 토대로 A 씨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급심 재판부는 “B 씨가 강습을 마쳐야 하는 기간과 1회 수업 기간 등을 정해 놓기는 했지만 이는 운영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한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B 씨가 A 씨를 지시·감독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시설 유지·보수와 회원 안전 관리 업무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A 씨가 자신의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점도 회원의 안전 관리를 위한 것이라며 A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옳다며 A 씨의 상고를 기각했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