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이 전 회장의 과감한 리더십… 전자 비중 낮추고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신

[글로벌 현장]
일본 도쿄에 위치한 소니 본사.(사진=연합뉴스)
일본 도쿄에 위치한 소니 본사.(사진=연합뉴스)
"일본 기업 경영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주식은?"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매년 일본 20대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대상으로 집계하는 추천 종목 순위에서 3년 연속 소니그룹이 1위에 올랐다. 전자·게임·금융 등 폭넓은 분야에서 수익을 올리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니는 2021 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에 도요타에 이어 둘째로 영업이익 1조 엔(약 10조3494억원)을 넘어서는 일본 제조 업체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소니는 2011년 4550억 엔의 적자를 내는 등 2009년부터 2014년까지 6년 동안 5차례나 적자를 냈다. 만년 적자 기업의 오명을 뒤집어썼던 소니가 불과 7년 만에 연간 1조 엔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는 알짜 기업으로 변신한 것이다.
침몰선 소니의 ‘구세주’ 히라이
침몰 직전의 소니를 구해낸 진짜 인물은 2012년부터 2018년까지 소니를 이끌었던 히라이 가즈오 전 회장(현 소니 선임 고문)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히라이 전 회장은 작년 7월 출간한 ‘소니 재생-변화를 이뤄낸 이단의 리더십’을 통해 소니 부활의 비결을 직접 설명했다. 책의 첫 페이지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떻게 소니를 부활시켰습니까?’ 회장직에서 물러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이러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업의 ‘선택과 집중’, 상품 전략 개선, 비용 구조 개혁 등 다양한 분석이 나오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다. 자신감을 상실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사원들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정열의 마그마를 다시 끓어오르게 해 팀으로서의 힘을 최대한 이끌어 낸 것이 비결이다.”

소니 부활의 주역은 자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 전자업계의 고위 관계자는 히라이 전 회장이 소니를 살린 진정한 비결은 “그가 겉모습만 일본인이지 사실은 미국인과 다름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히라이 전 회장은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 생활했다.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전통과 전례의 구애를 받지 않고 거침없이 소니를 수술대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당시 소니 CEO에 전형적인 일본인 경영인이 임명됐다면 종신 고용과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일본의 기업 문화에 억눌려 사업을 과감하게 재편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본인도 자신의 출신 성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저서에서 히라이 전 회장은 다음과 같이 썼다. “소년 시절부터 일본과 해외를 오가며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전자가 주류인 소니에서 음악과 게임 등 출세와 거리가 먼 사업부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주류에서 비켜난 이단아로 인생을 살아온 게 내 리더십의 바탕이 됐다.”

‘워크맨’과 브라운관 TV로 1980~1990년대 세계를 제패한 소니가 2000년대 들어 몰락한 것은 디지털을 등한시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런데도 과거의 성공에 취한 소니는 변화를 거부했다. 특히 ‘기술은 우리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던 엔지니어들끼리 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세계 제패의 주역인 전자사업부는 성골이자 진골이고 나머지 사업부들은 6두품이란 기업 문화도 강했다. 전자 기술에 소프트웨어의 접목이 필수적인 디지털과 스마트폰 시대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사내 풍토였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사업 재편
히라이 전 회장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소니의 암부를 잘라낸다. 히라이 전 회장의 소니 사업 재편은 기업 집단 할인(conglomerate discount) 해소와 스마일 커브(smile curve) 달성 등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기업 집단 할인은 그룹의 전체 가치가 계열사들의 합에 못 미치는 현상이다. 문어발식 경영의 폐해다. 히라이 전 회장은 그룹 가치의 합에 마이너스가 되는 사업을 지금까지의 명성과 관계없이 처분했다.

2012년 화학 사업을 일본정책투자은행에 매각한 것을 시작으로 2014년 7월 ‘VAIO’ 브랜드로 전 세계 노트북 시장에서 지명도가 높던 PC 사업과 간판 사업이었지만 실적이 저조했던 플라스마TV 사업을 차례로 정리했다. 세계 최초로 실용화에 성공한 리튬 이온 배터리 사업도 2017년 무라타제작소에 매각했다.

스마일 커브는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중간 단계인 제조 공정보다 처음과 마지막 단계인 연구·개발(R&D), 브랜드 마케팅, 애프터서비스의 부가 가치가 더 높다는 경영 이론이다. 각 공정의 부가 가치를 그래프로 그리면 미소를 짓는 것처럼 ‘U자형’이 된다는 데서 ‘스마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생존을 위해 소니가 선택한 길은 제조업인 전자 사업의 비율을 낮추는 대신 서비스업 중심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가격 변동의 영향을 크게 받는 제조업에서 벗어나 기업이 가격 주도권을 쥐기 쉬운 서비스업으로 변신하자는 시도였다.

2000년 매출 7조3148억 엔 가운데 전자 사업의 매출은 69%에 달했다. 게임(9%), 음악(9%) , 영화(8%) 등 나머지 사업부를 다 합쳐도 31%에 불과했다. 그런데 2020년 소니의 매출(8조9994억 엔) 구성은 게임이 30%, 전자가 21%, 음악과 반도체가 각각 11%, 금융 19%, 영화 8% 등 6개 사업부문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핵심 사업부 대부분이 부가 가치가 높은 스마일 커브의 양 끝단에 자리하고 있다.

사업 재편을 거친 2020년의 소니는 전자 회사가 아니라 게임 회사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해졌다. 2020년 게임 사업부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2조6563억 엔과 3414억 엔으로 각각 전체의 29.5%와 35.7%를 차지했다.

전자는 매출이 2조681억 엔(23.0%)이었지만 영업익은 1279억 엔(13.4%)에 불과했다. 덩치만 크고 이익은 못내는 사업부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덩치(매출)는 전자의 절반이 안 되는 음악(9399억 엔)과 반도체(1조125억 엔)의 영업익이 1848억 엔과 1459억 엔으로 전자 부문보다 훨씬 많았다. 금융 부문도 1조6740억 엔의 매출을 올려 전자보다 많은 1548억 엔의 이익을 냈다.

2021년 예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임은 2조9000억 엔(전체의 29.3%)의 매출과 3250억 엔(31.3%)의 영업익으로 소니를 이끌었다. 여기에 음악(2000억 엔), 전자(1900억 엔), 금융(1530억 엔), 반도체(1500억 엔), 영화(1080억 엔) 등 6개 주요 사업부 모두가 1000억 엔 이상의 영업이익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2021년 12월 ‘소니테크놀로지데이’에서 소니의 주요 사업 부문의 주력 기술을 상세히 공개했다.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전자 기업과 현재 소니를 먹여 살리는 콘텐츠사업부의 협업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현지 촬영할 필요가 없는 영화 촬영 기술과 끊김 현상, 번짐 현상을 모두 없앤 가상현실(VR) 기술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특히 화제를 모은 것은 마치 인간처럼 잡는 물체에 따라 힘을 조절하는 로봇 팔이었다. 쥐는 힘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장미꽃이나 종이컵을 잡아도 찌그러지지 않았다.

주식 시장도 소니의 사업 재편과 미래 먹거리 사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 말 시가 총액이 18조1200억 엔으로 1년 만에 5조5000억 엔 이상 늘었다. 시가 총액 순위도 4위에서 2위로 올라 도요타와 함께 일본 양대 기업의 자리를 되찾았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