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설명 의무 위반” 판결
숙고 시간 안 줘 선택할 기회 침해

[법알못 판례 읽기]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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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드라마 속 수술실 앞에서 환자에게 수술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의사의 모습을 이제는 더 이상 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수술 40분 전에야 보호자에게 수술의 위험성을 설명했다면 의사가 ‘설명 의무’를 위반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민사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최근 환자 A 씨가 병원장 B 씨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수원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의사가 설명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부작용 등에 대한 설명과 의료 행위 사이에 충분한 시간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1·2심 “결과 안 좋다고 의료 과실 아냐”

사건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A 씨는 2018년 6월 요통과 근력 저하 등의 문제로 B 씨의 병원을 찾아갔다. A 씨는 추체간유합술, 후방기기 고정술, 인공디스크 치환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며칠 후 수술을 받게 됐다.

B 씨의 병원에서는 수술 당일 오전 10시 30분 경동맥과 심장 초음파 검사를 한 뒤 보호자에게 A 씨의 뇌졸중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후 40분 뒤인 오전 11시 10분 마취가 이뤄졌고 수술이 시작됐다.

A 씨는 오후 6시 30분 수술이 끝난 후 회복실로 옮겨졌지만 뇌경색으로 인해 자발적인 의사 표현이 안 됐고 대소변 조절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현재도 A 씨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모든 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A 씨 측은 “해당 수술은 응급을 요하는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수술 전 원고 경동맥의 동맥경화에 대한 치료를 시행해 뇌졸중의 위험을 낮춘 후 이 사건 수술을 시행해야 했다”며 병원 의료진의 주의 의무 및 설명 의무 위반을 이유로 4억4375만원의 손해 배상 소송을 냈다.

의사의 주의 의무는 환자의 상태에 충분히 주의하고 의학적 지식에 입각해 그 치료 방법과 효과, 부작용 등 모든 사정을 고려해 최선의 주의를 기울여 치료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설명 의무는 2017년 개정 의료법에 반영된 내용으로, 의사가 의료 행위를 할 때 환자에게 질병의 증상과 원인, 진료의 필요성과 이에 따르는 위험과 예후 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심 재판부는 병원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병원 내 내과의사는 경동맥 초음파 검사를 시행한 후 ‘경동맥에 동맥경화가 있지만 협착이 심하지 않아 수술이 금기는 아니다’며 ‘계획대로 수술을 진행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회신했다”며 “진료기록부에도 환자가 적극적인 치료를 원하고 있었다고 기재돼 있어 이 사건 수술 결정이 합리적 범위를 벗어난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의료진은 A 씨의 아들에게 수술의 목적·방법·합병증 등에 대해 설명했다”며 “이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2심 재판부 역시 “A 씨 측은 해당 수술이 불필요하고 과도한 수술이라고 주장하지만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의료진의 수술 결정이 불필요하고 과도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1심 판결을 그대로 인용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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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설명 의무, 시간적 여유 두고 이행해야”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주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의료진이 설명 의무를 위반했다고 봐야 한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의사는 응급 환자가 아닌 이상 환자에게 질병의 증상, 치료 방법, 부작용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환자가 수술 등의 의료 행위에 응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가지도록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환자의 합리적 판단을 돕기 위해 가족 등 주변 사람과 상의하고 결정할 시간적 여유가 환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며 “A 씨는 수술로 자신에게 나타날 수 있는 후유증 등 이 사건 수술에 관한 위험성을 충분히 숙고하지 못한 채 수술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A 씨가 수술에 응할 것인지 선택할 기회가 침해된 것으로, A 씨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은 병원 의사들에게는 설명 의무를 위반한 사정이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즉 의사의 설명 의무는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적절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이행돼야 한다는 판단이다. 반면 주의 의무 위반에는 원심의 판단을 유지했다.

이에 대해 대한의사협회는 성명문을 발표하고 “설명 의무의 이행 여부를 판단할 때 설명의 시간적 한계를 설정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환자의 알 권리나 자기 결정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정도에 이른 시기를 그 시간적 한계로 삼아야 한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로 불안정한 진료 환경을 조성하고 위험성이 있는 수술을 기피하도록 해 방어 진료를 부추겨 국민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돋보기]

수의사도 동물 수술 시 주인에게 ‘설명 의무’ 다해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사뿐만 아니라 수의사도 동물에 관한 의료 행위를 할 때 동물 소유자에게 설명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0단독 김상훈 부장판사는 A 씨가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B 조합을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B 조합은 A 씨에게 200만원과 반려견 장례비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수의사가 수술에서 예상되는 위험 등에 대해 견주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수술 중 반려견이 사망했다면 수의사가 견주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취지다.

A 씨는 2020년 7월 반려견의 각막 손상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의 한 동물병원을 찾았다. A 씨는 약 처방을 의뢰했지만 수의사는 “각막 손상이 심해 실명의 우려가 있다”며 수술을 권유했다. 이는 강아지 순막(제3의 눈꺼풀)을 손상된 각막 위에 덮어 추가 손상을 막는 수술이었다.

A 씨는 수술을 결정했지만 A 씨의 반려견은 수의사가 진정제를 투여해 수술을 시행한 직후 호흡 곤란 증세를 보였고 곧 사망했다. 이에 A 씨는 수의사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김 부장판사는 수의사의 주의 의무 위반을 인정했다. 김 부장판사는 “수의사는 수술에 앞서 반려견의 심장 상태가 전신 마취를 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정상인지 여부를 혈압 측정 등의 방법으로 확인했어야 함에도 심장 상태에 대해 별도로 확인하지 않았다”며 “수술 직후 반려견이 호흡 곤란 상태에 빠졌음에도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수의사는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수의사가 설명 의무 역시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김 부장판사는 “일반적으로 의사는 중대한 결과 발생이 예측되는 의료 행위를 할 때 환자나 법정 대리인에게 질병의 증상, 예상되는 위험 등에 관해 설명해 의료 행위를 받을 것인지 여부를 선택하도록 할 의무가 있다”며 “동물에 대한 의료 행위에 관해서도 동물 소유자에게 자기 결정권이 인정돼야 하는 점 등에 비춰 보면 이러한 법리는 동물에 대한 의료 행위에도 그대로 유추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수의사는 A 씨에게 제3안검 플랩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고 볼 수 없다”며 “B 조합은 자기결정권이 침해된 A 씨에게 위자료 200만원과 반려견 장례비 등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오현아 한국경제 기자 5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