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기권표’…유럽 영향력 위해 우크라이나도 포기 못 해

[글로벌 현장]
지난 4일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념촬영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연합뉴스)
지난 4일 중국 베이징 조어대 국빈관에서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념촬영하는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두 나라 모두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은 ‘친러적 중립’이라는 모호한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와 반미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국의 최대 외교 현안이지만 동시에 유럽 영향력 확대의 교두보인 우크라이나를 포기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은 서방의 강도 높은 제재를 받는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가 원하지 않은 상황”…곤혹스러운 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4일 왕이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관은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통화에서 “중국은 러시아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전쟁 이유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 우려에 공감을 표한 것이다.

왕 장관은 동시에 “중국은 일관적으로 각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원칙론도 유지했다. 중국이 러시아를 공개 지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은 대만·신장·시짱(티베트) 등의 독립 논란 때마다 ‘주권과 영토 보전’ 원칙을 주장해 왔다는 점에서다.

중국 외교부는 이어 2월 25일 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한 5대 방침을 소개했다. 첫째는 ‘중국은 각국 주권과 영토 완전성의 존중 및 보장을 주장하며 유엔 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실질적으로 준수한다’, 둘째는 ‘각국의 합리적 안보 우려는 응당 존중해야 한다’였다.

중국은 앞서 ‘각국의 합리적 안보 우려’와 ‘주권 및 영토 보전’ 중 전자를 먼저 거론했지만 2월 25일을 기점으로 둘의 순서를 바꿨다. 러시아를 지지하는 내용을 뒤로 돌린 것이다. 국제 사회의 대러시아 여론 악화를 의식한 데 따른 ‘미세 조정’으로 분석됐다.

왕 장관은 “현재의 정세는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러시아와 서방 간 갈등으로 중국이 서방의 대중국 압박이 분산되는 ‘어부지리’를 즐기고 있다는 지적을 의식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대미 전략 경쟁의 최대 파트너인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면 강화할수록 미국·유럽·일본 등과 더 척을 지게 되는 양상은 중국에 딜레마가 되고 있다. 서방 대 러시아의 ‘신냉전’ 구도 역시 중국이 바라는 상황은 아니다.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쏟아지고 있는 국제 사회의 비판과 압박을 중국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나눠 지게 되는 것도 중국에는 큰 부담이다.

중국의 이런 모호한 태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의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서 ‘반대’가 아닌 ‘기권’을 택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2월 2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안보리 긴급 회의에 상정된 결의안에 15개 안보리 이사국 중 11개국이 찬성표를 던졌지만 중국·인도·아랍에미리트(UAE) 등 3개국은 기권했다. 당사국인 러시아는 예견됐던 대로 반대했다.

중국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도 안보리에서 러시아의 편을 온전히 들어 주지 않고 기권한 바 있다. 당시 중국은 우크라이나 크림 자치공화국이 주민 투표를 통해 러시아로 귀속을 결정한 뒤 미국의 요청으로 진행된 안보리의 ‘크림 주민 투표 무효’ 결의안을 두고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번과 당시의 두 차례 안보리 표결에는 중국이 적극적으로 러시아의 편을 들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 내재해 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 세력이 세운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의 독립을 공식 승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중국 내 분리 독립을 통제할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우크라이나 내 친러시아 세력의 분리 시도를 ‘민의’로 규정한 러시아의 논리를 지지하면 추후 대만이 국민 투표 등을 통해 중국과의 분리를 선언할 경우 통일 동력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

2014년 당시에도 중국은 크림반도의 현상 변경을 의미하는 주민 투표 결과를 지지해 러시아 편을 들면 자국 내 소수 민족 등의 분리 독립 주민 투표를 막을 명분이 없어진다는 점을 우려해 기권표를 던졌다는 것이 외교가의 주된 분석이다. 중국은 각국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해야 한다는 유엔 헌장을 앞세워 분리 독립 세력을 억제하고 있다.

러시아와 거래에서 실리 추구

중국은 서방의 강도 높은 제재를 받는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주요 7개국(G7)이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배제하는 추가 제재에 나서면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가 더욱 높아지고 나아가 위안화의 국제 영향력이 더 커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중국 국무원 산하 싱크탱크인 사회과학원의 루샹 선임연구원은 “중국은 러시아가 경제를 유지하는 데 기꺼이 도움을 줄 것이고 러시아의 최대 수입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4일 중·러 정상 회담을 계기로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즈프롬과 중국석유천연가스공사는 연 100억㎥의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극동 지역 가스관을 통해 중국으로 공급하는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표면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수출이 막힐 것에 대비해 중국이 구매자로 나선 모양새지만 중국이 구매 가격을 유럽의 절반 수준으로 후려쳐 최대한 이익을 뽑아냈다는 후문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지난해 무역 규모는 1468억 달러(약 175조원)로 전년보다 35.9% 증가했다. 중국의 수출은 675억 달러, 수입은 793억 달러로 집계됐다.

러시아의 은행 300여 곳이 SWIFT에 가입돼 있고 러시아 전체 국제 금융 거래의 80%를 SWIFT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가 SWIFT에서 퇴출되면 최대 수출품인 원유·가스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 제재 수단 중 하나로 거론돼 왔다. 작년 러시아의 정부 수입에서 원유·가스 수출이 35.8%를 차지했다.
러시아는 서방 국가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SWIFT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2014년 독자적 결제망인 러시아금융통신시스템(SPFS)을 구축했다. 이어 중국이 2015년 중국국제결제시스템(CIPS)을 설립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제재로 러시아가 자국 시스템보다 중국의 CIPS를 더 많이 활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위안화가 러시아 루블화보다 국제화된 데다 러시아가 다른 제재도 받게 되면서 중국과의 교역에 더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마리아 샤기나 카네기모스크바센터 연구원은 “중국과 러시아가 각국의 외환 결제 시스템을 통합할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SWIFT 내에서 쓰이는 통화의 비율은 지난 1월 기준 달러가 39.92%로 가장 높고 유로 36.56%, 파운드 6.3%, 위안화 3.2%, 엔화 2.79% 등이 그다음이다.

푸펑 베이팡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 러시아가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 효과가 예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는 원자재를, 중국은 제조 기술을 갖추고 있어 공급망에 타격이 적을 것이란 설명이다. 그는 “러시아가 위안화 결제를 더 늘려 SWIFT 배제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은 하지만 유럽 영향력 확대의 교두보인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중국의 대우크라이나 무역 규모는 193억 달러로 러시아에 비해 작지만 두 나라가 경제 협력 협약을 체결한 2013년 이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중국은 수입산 옥수수의 30%, 밀의 28%를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도 중국은 2019년부터 러시아를 제치고 최대 교역국이 됐다.

중국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시진핑 주석의 글로벌 영향력 확대 프로젝트인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 진출의 핵심 거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는 2017년 일대일로에 참여했다.

중국의 핵심 국유 기업인 중국식량과 중국태평양건설그룹, 중국 최대 통신장비회사 화웨이 등 54개 기업이 우크라이나에 진출해 있다. 이들은 식량 창고·철도·발전소·통신망 등 다양한 인프라 사업을 벌이고 있다.

베이징(중국)=강현우 한국경제 특파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