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천장’ 부수며 4년째 KB증권 이끄는 ‘증권사 최초 여성 CEO’ 박정림 사장
[ESG 리뷰] 박정림 KB증권 사장은 증권사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다. 2019년 KB증권 수장에 오른 뒤 둘째 연임에 성공하며 4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수적인 금융권에서 KB국민은행 부행장, KB금융지주 WM 총괄부사장, KB증권 사장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유리 천장’을 깨뜨렸다. 박 사장은 한경ESG와의 인터뷰에서 “다양성은 시대의 요구이자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야 할 길”이라며 “기업이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는 최고경영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경영인이자 유리 천장을 깨뜨린 개척자로 불립니다. 금융그룹에서도 주력 계열사를 이끌고 있어 더욱 주목받는 것 같습니다.
“은행에서 부행장을 하다가 증권사에 오면서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은 것 같습니다. 첫째는 은행 출신인데 증권사를 잘 이끌 수 있을까, 또 하나는 터프한 증권업에서 여자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2가지 측면이었습니다. 이러한 기회를 준 그룹에 감사한 마음이었고 나름 4년 차 CEO가 됐습니다. 증권사 경력이 없어 CEO로서 저는 제가 최고가 아니라 우리 회사의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과 하모니를 낼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원을 잘 분배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보고 일을 잘하는 직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개선해 주는 방향으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증권사 CEO를 하면서 저 자신의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 금융권에서 경험한 유리 천장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지요.
“새로운 일을 할 때 ‘그 일을 해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믿고 시키지’라는 질문을 받은 것 같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여성이기에 조금 더 선입견이 있지 않았나 싶네요. KB금융그룹은 해당 직무 경험이 없어도 새로운 시각으로 궁금증을 갖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 에너지를 갖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높은 가치를 두고 저 또한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유리 천장만큼 ‘유리벽(핵심 업무에서 제외되는 현상)’을 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임원 한 명보다 그동안 남성이 주로 자리한 중요 보직에 여성이 포진해 각각의 벽을 깨고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때는 수적으로 여자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임원을 할 수 있는 여성 인재를 많이 키우지 못한 것도 한계였던 것 같습니다. 임원을 몇 명 배출하느냐보다 임원을 할 수 있는 부장급 여성을 탄탄하게 키워야 한다고 봅니다. 부서장에서 여성의 비율을 높이고 또 중요한 자리에서 여자들이 실제 일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 특별히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었습니까.
“성취 욕구는 남자든 여자든 같다고 생각해요. 그러한 생각과 목표 없이 어떤 자리에 쉽게 오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성취 욕구는 젠더의 차이는 아니라고 보지만 그동안 여자는 성공 모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임원이나 사장이 되겠다고 얘기하는 게 쉽지 않은 환경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여자와 남자가 절반씩 기업에 입사하는 상황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목표 의식이나 성취 욕구는 꼭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는 개인이나 기업 모두에 성장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 경험에 비춰볼 때 기업에 다양성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까.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선 아직까지 젠더 다양성으로만 보지만 미국에서는 인종이나 섹터에 대한 다양성에 대해서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다양성이 확보되면 의사 결정이 한 방향으로 이뤄지지 않고 다양한 의견이 테이블에 올라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KB금융그룹 이사회에는 여성 사외이사가 두 명 있고 증권사에서는 사내이사로서 제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성장 주도 사회에서는 획일적이고 한 방향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 경쟁력을 가졌습니다. 지금은 트렌드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기민하고 민첩한 애자일(agile) 조직이 필요합니다. 리더 한 명이 앞에서 가고 다수가 뒤에서 쫒아가는 형태로는 이 변화를 따라가기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결론은 CEO의 판단이지만 다양한 얘기를 많이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죠. 우선 저부터 CEO이기 이전에 직원과 고객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인 CLO(Chief listening Officer)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기업이 원하는 여성성은 무엇입니까.
“여성성이라는 말보다 고객 중심 경영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다. 고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고객 중심 경영의 출발입니다. 여자들은 소비의 주체이기도 하죠. 고객이 원하는 것을 꼼꼼히 파악하는 데는 여자들이 장점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회사는 젠더의 구분이 없는 곳이기에 회사가 원하는 방향의 일을 할 수 있는지가 진짜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이 최근 고객 중심 경영에 적합한 DNA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남자처럼 일하지 않으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밤새워 일하고 직원들을 압박해 결과물을 얻어내는 게 관리자의 능력이라고 평가하곤 했죠. 이제는 기업이 원하는 관리자의 능력이 달라졌습니다. 직원들을 코디네이트하고 코칭하면서 고객의 구체적 니즈를 발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보는지요. 차세대 여성 리더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과거에는 여성이 대학이나 사회에 진출하는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남성 중심의 문화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주52시간 근무제에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환경과 창의력이 중시되는 분위기 등으로 변화하며 여성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성의 강점을 잘 활용하면 존경받는 차세대 여성 리더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여성의 강점은 멀티프로세싱 능력, 고도의 집중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입니다. 여성 직원들은 한 번에 2가지 이상의 일을 성공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기획안을 작성하면서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만들거나 사무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파악하면서 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여성들이 매우 센서티브하고 디테일에 강하기 때문이죠. 고객 중심의 회사에서는 디테일을 잘 챙겨야 하기 때문에 여성 직원들의 이러한 멀티 프로세싱 능력이 큰 강점이 될 수 있어요. 또 여성 직원들은 집중력이 뛰어나 주52시간 근무제에서 더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죠. 잘 모르는 사람 두 명이 만나도 한 시간 정도는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춰 서로 이해하며 더욱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취임 이후 KB증권의 여성 인재 육성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전에도 다양성 확보 노력이 있었지만 저 역시 그룹에서 추진하는 여성 인력 양성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KB증권 중간 책임자(부점장급) 여성 인력은 2018년 21명 (11%)에서 2019년 24명(14%), 2020년 27명(16%), 2021년 32명(17%), 올해 3월 기준 36명(19%)으로 꾸준히 늘었습니다. 과거 여성의 사회 진출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현재 부서장과 팀장 등 중간 관리자 중 여성 인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여성 인재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기업 차원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기업에서는 여성의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유리벽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합니다. KB증권은 부점장급 20%, 팀장급 30%, 팀원급 40% 이상을 여성 인력으로 확대할 목표로 다양한 분야에 여성 인력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또 여성의 역량을 강화하고 리더로 양성하기 위해 여성 팀장 밸류업(value-up) 과정, 여성 부점장 리더십 과정, 육아휴직 직원에 대한 관계 유지를 위한 자기 관리 교육, 신규 여성 리더와 임원의 멘토링 프로그램 등 다양한 여성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여성 인재를 목표와 수치로 관리합니까.
“숫자가 전부는 아니지만 목표를 갖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여자 부서장을 일정 비율로 키워 내겠다는 것과 언제까지 몇 퍼센트 달성하겠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전개입니다. 저 또한 CEO이기에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여자라는 이유로 자리를 줘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역량을 갖췄는 데도 그동안 발굴하지 못한 인재가 있죠. 그런 사람들을 발굴해 내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인사가 있을 때 꼭 후보군에 여자를 한 명씩 넣어 보라고 합니다. CEO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자가 뽑히더라도 후보군에 꼭 여자를 한 명씩 넣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취임한 뒤 여성 임원 두 분이 선임됐어요. 부서장급에서도 투자은행(IB), 자산 관리(WM)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인재를 발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여성 인재의 성장을 지원하는 회사의 제도와 문화도 필요해 보입니다. 여성 리더십을 육성하기 위한 제언을 부탁드립니다.
“크게 4단계로 구분해 지속적인 지원과 육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니어 단계’에서는 성장에 대한 동기 부여, ‘출산·육아기 단계’에서는 일·가정 양립 지원 등으로 경력 단절 방지, ‘중간 관리자 단계’에서는 리더십 함양, ‘리더 단계’에서는 의사 결정 역량 및 재무적 이해에 대한 지원과 육성이 필요합니다. KB증권은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해 육아 휴직을 출산 휴가 120일을 포함해 자녀 한 명당 2년, 출산 휴가를 120일로 법정보다 길게 부여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자녀를 둔 직원 중 희망 직원 대상 단축 근무, 임신 노동자 단축 근무 및 연장 근로 차단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여성 직원들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합니다. 기업에서는 조직의 다양성과 유연성 향상을 위해 여성 임직원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불평등을 축소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승진 평가 등에서 객관화 지표로 인사 관리와 성과 측정이 필요합니다. 또 사회적으로는 여성 리더십 인식 개선, 성평등 감수성 향상, 양성 평등의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정부는 기회의 공평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제도가 지켜지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부족한 곳에는 개선을 요청하면 좋을 것입니다.”
(*본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1377호와 국내 유일 ESG 전문 매거진 ‘한경ESG’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더 많은 ESG 정보는 ‘한경ESG’를 참고하세요)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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