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해밀턴’ 디즈니플러스에서 한국어 서비스 개시

[비즈니스 포커스]
코로나19로 폐쇄됐던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이 1년만에 재개장한 지난해 9월, 관객들이 '해밀턴'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코로나19로 폐쇄됐던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이 1년만에 재개장한 지난해 9월, 관객들이 '해밀턴'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금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은 ‘위키드’도, ‘빌리 엘리어트’도 아니다. 미국 초대 재무부 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해밀턴’이 2015년 초연부터 가장 인기 있는 뮤지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암표 가격이 2700달러까지 치솟기도 했다. 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 공연계를 얼어붙게 만든 시기에도 ‘해밀턴’의 표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해밀턴’은 초연 이듬해인 2016년 토니 어워즈 11개 부문을 휩쓸며 흥행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간 미국인들에게 ‘해밀턴’은 10달러 지폐 속 인물로 익숙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았다.

뮤지컬이 흥행하면서 알렉산더 해밀턴 개인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졌다. 공연 전문 사이트 ‘브로드웨이월드’에 따르면 2020년 2월 기준으로 ‘해밀턴’이 벌어들인 수익은 무려 6억49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브로드웨이 역사상 가장 성공한 뮤지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뮤지컬 '해밀턴'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컬로 꼽힌다.(사진=한국경제신문)
뮤지컬 '해밀턴'은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컬로 꼽힌다.(사진=한국경제신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펼치는 ‘랩 배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뮤지컬이지만 한국 관객들이 ‘해밀턴’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브로드웨이를 직접 방문하는 것뿐이었다. 빠른 속도의 랩 넘버를 번역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라이선스 뮤지컬로도 한국 무대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많은 ‘뮤덕(뮤지컬 덕후)’들의 애를 태우던 ‘해밀턴’을 TV와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론칭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디즈니플러스가 콘텐츠로 ‘해밀턴’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디즈니플러스는 서비스 초창기에는 ‘해밀턴’의 한국어 자막을 제공하지 않았다. 원작자가 미국사를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나라의 언어인 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만 제공하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밀턴’을 향한 뮤덕들의 열정은 ‘자체 자막’을 만들어 냈다. 영어에 능통한 시청자들은 ‘해밀턴’의 한국어 자막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 후 디즈니플러스가 3월부터 한국어 자막을 지원하면서 자막 제작자들의 수고를 덜 수 있게 됐다.

사실 ‘해밀턴’의 넘버는 자막이 없으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이는 린마누엘 미란다가 ‘해밀턴’의 넘버를 힙합과 리듬 앤드 블루스(R&B)를 기반으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지식은 물론 뛰어난 영어 듣기 실력을 가져야만 ‘해밀턴’을 ‘100%’ 즐길 수 있다.

미란다는 ‘해밀턴’의 스토리 전개와 미국 건국사를 잘 표현하기 위해 저항 정신을 담은 ‘힙합’이라는 장르 만한 것은 없다고 판단했다. 뮤지컬 속 인물들은 미국 중앙은행 설립에 대한 논쟁과 연방정부 채권과 같은 경제 이슈를 랩 배틀로 쏟아낸다. ‘해밀턴’의 대표적 넘버인 ‘마이 샷(My shot)’ 역시 빠른 속도의 랩으로 구성됐다. 이렇게 제작된 46개의 넘버들은 기존 뮤지컬 장르에 대한 편견을 부숨과 동시에 뮤지컬에 관심이 없던 관객층도 흡수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해밀턴’을 관람한 관객들은 ‘해밀턴’의 음악에 대해 “당장 빌보드 차트에 올라도 어색하지 않은 넘버”라고 평한다.

뮤지컬 ‘해밀턴’을 탄생시킨 미란다는 각색부터 작사·작곡에 참여했고 ‘해밀턴’ 역할을 맡아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는 현재 미국 문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창작자이기도 하다. 뮤지컬 ‘인 더 하이츠’, 디즈니 애니메이션 ‘모아나’의 음악을 작곡했고 2020년 11월 오픈한 넷플릭스 영화 ‘틱,틱...붐’의 감독을 맡았다.

푸에르토리코계 이민자 가정 출신인 미란다는 ‘해밀턴’ 뮤지컬에서 흑인·라틴계·아시아계 등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을 무대에 세웠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에 출연 중인 한국계 미국인 배우 진하도 ‘해밀턴’의 정적인 부통령 애런 버 역할을 맡았다.

‘해밀턴’의 스토리에도 이민자들이 이입할 수 있는 요소를 가미했다. ‘해밀턴’은 카리브해 출신 이민자이자 사생아로 태어나 미국 초대 재무장관 자리에 오르고 정적과 결투 중 생을 마감한 극적인 개인사를 가진 인물이다. 최근 미국 문화계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다양한 인종이 무대에 선다는 점은 ‘해밀턴’의 긍정적인 요소로 꼽히고 있다.
2016년 토니어워즈에서 '최고의 뮤지컬상'을 수상한 해밀턴의 출연진.(사진=연합뉴스)
2016년 토니어워즈에서 '최고의 뮤지컬상'을 수상한 해밀턴의 출연진.(사진=연합뉴스)

참여정부가 참고한 ‘해밀턴 프로젝트’
‘해밀턴’ 뮤지컬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입을 통해 펼쳐지는 그의 경제 철학이 현재와도 와닿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나라 전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회의 고른 확산과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경제학자다. 그는 미국의 자본 시장을 육성하고 상업을 부흥시켰으며 건전한 재정 정책을 주장했다.

2006년 당시 참여정부가 브루킹스연구소의 ‘해밀턴 프로젝트’를 연구하면서 한국에서도 해밀턴의 경제 철학을 향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가 있었다. 정부는 해밀턴 프로젝트가 당시 ‘동반 성장 전략’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선진국의 대응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한국개발연구원(KDI)에 지시해 해밀턴 프로젝트에 대한 정책 자료집을 내놓기도 했다.

브루킹스연구소의 ‘해밀턴 프로젝트’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 로저 알트만 전 재무차관, 피터 오스잭 전 백악관 경제 특보 등 당시 미국의 민주당 핵심 인사들이 2008년 대선 민주당의 집권 전략 차원에서 제시한 경제·사회 정책 구상이다. 이 프로젝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권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심화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국가의 책임, 성장과 복지의 병행 추진, 혁신 주도 성장을 강조했다.

KDI에 따르면 해밀턴 프로젝트는 인적 자원 투자, 혁신과 인프라, 저축과 보험, 정부 역할 제고 등 4대 정책 과제를 제시한다. 모든 미국의 국민이 잠재적 생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동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교육과 직업 훈련 제도의 개선 및 교육 격차 완화, 미래 불안 해소를 위한 생산적 사회 안전망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성장 촉진과 경제적 기회 창출을 위해서는 기초과학 분야 연구·개발(R&D) 투자 확대와 기술 혁신 촉진,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등이 필요하다는 게 핵심이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