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여성미 넘치는 A·H·Y·튤립 라인 등 선보이며 대인기…스핀들 라인이 ‘유작’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③]
크리스찬 디올은 샤넬을 존경했지만 정작 그의 패션에 영향을 준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디올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관심은 (에드워드) 몰리뇌에 있다. 어느것도 완전히 무에서 창조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들에서 영향을 받는다. 그의 스타일은 확실히 내게 많은 영향을 줬다.”누군가를 존경하고 그를 모방하도록 애쓴다는 것이 바로 그 사람 자체가 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영국 디자이너 중 거장으로 꼽히는 몰리뇌는 완벽주의자였고 원칙주의자였다. 이것이 디올이 몰리뇌를 존경하게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몰리뇌와 달리 디올은 무척 낭만적이었다. 몰리뇌는 새로운 룩을 발표해 모두를 놀라게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한 시즌을 거쳐 가면서 점진적으로 어깨의 패드를 제거하고 스커트의 볼륨을 증가시키며 자신의 디자인을 구축해 나갔다. 반면 디올은 강한 충격을 원했다. 점진적이기보다는 즉각적인 성공을 목표로 한 것이다.
디올은 1950년대 숨쉴 틈 없을 정도로 새로운 디자인들을 잇달아 선보였다. 1950년 봄 컬렉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 컬렉션은 1950년 전체의 특징을 포괄할 것이다. ‘버티컬 라인’이라는 주제 아래 성향이 강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여성스러움이 남아 있어 여성 스스로를 가치 있게 한다.” 디올은 패션쇼를 통해 볼륨을 상체에 집중한 버티컬 라인을 발표했다. 1951년에는 자연스러운 선에 기초한 둥근 실루엣으로 여성의 허리를 고통스러운 코르셋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한 오벌 라인을 선 보였다.
첫 립스틱 ‘루즈 디올’, 화장품 시장 진출
1953년에는 튤립 라인을 내놓았다. 튤립 라인은 어깨를 둥그스름하게, 가슴을 크게 강조한 반면 허리를 가늘게 디자인해 마치 모양이 튤립과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1953년 디올의 첫 립스틱인 ‘루즈 디올’이 화장품 시장에 진출했다. 1954년에는 H라인을 만들었다. 블루종과 재킷은 엉덩이 길이로 했다. 1920년대의 실루엣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실루엣은 H자처럼 직선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이는 허리선을 무시한 듯 보였다. 디올의 10년 디자이너 생활 중 코르셋을 7년 동안이나 재유행시킨 다음 후반기엔 의복이 몸을 덜 죄는 방향, 즉 탈(脫)코르셋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몰리뇌의 영향이 컸다. 몰리뇌의 가장 중요한 디자인 핵심인 ‘입을 수 있는 옷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디올 패션에 반영됐다. 하지만 H라인의 급격한 변화가 어떤 고객에게는 불쾌감을 주자 1955년 봄 디올은 A라인을 다시 발표했다.
A라인의 주요한 스타일은 ‘베스트(조끼) 드레스’였다. 상의는 소매가 없는 조끼 형태로 만들었다. A자의 실루엣을 제작하기 위해 엉덩이 주변에 플레어나 주름을 줬다. 영문자 A 모양처럼 아래로 갈수록 풍성해 보이는 스타일이 완성된 것이다.
디올은1955년 겨울이 되자 허리 절개선이 낮아진 것에 반해 가슴선을 높인 새로운 Y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셋째 영문자식 라인으로 튜립 라인을 재생해 다소 동양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Y라인은 슈트와 투피스에서 가장 잘 나타났다. 어깨는 넓고 처졌고 소매는 종종 절개 없이 재킷의 몸판과 같이 재단되기도 했다. 디올이 선보인 A라인과 Y라인은 1960년대 유행한 미니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디올은 코코 샤넬이 은퇴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협조한 혐의로 스위스로 망명한 샤넬이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디올은 이미 뉴룩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샤넬은 디올을 뛰어넘기 버거운 상태가 됐다. 샤넬은 패션쇼를 열었지만 실패했다. 샤넬은 디올이 여성의 자연스러운 기본적 인체 선을 그대로 두지 않고 여성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탐탁지 않은 남성 디자이너의 견본으로 생각했다. 디올은 여성을 식물이나 꽃, 숫자 8, 가위나 풍차, 둥근 지붕과 에펠탑, H라인, A라인, Y라인 자석과 화살 모양, 타원형, 직사각형, 외국풍 등 그의 관심을 끄는 그 어떠한 형태로도 표현하고 싶어했다.
반면 샤넬은 여성의 자연스러운 선에서부터 출발했다. 샤넬의 가늘고 긴 가르손 룩은 직선적인 이미지였고 여성들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키고 싶어했다. 디올에게는 그의 환상을 여성들이 입음으로써 재조형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는 꽃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옷을 입은 여성은 모두 피어나는 꽃과 같았다. 그 모양새는 매력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일해야 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제대로 제시되지 못했다.
수석 디자이너 자리, 이브 생 로랑이 물려받아
식물에서부터 건축학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디올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을 재구성했다. 디올은 1947년 타이트한 허리선을 고집하는 독재자에서 1957년 허리가 없는 드레스의 디자이너로 전환했다. 디올은 ‘그의 옷이 실제로 어떻게 보일까’ 하는 고민이 의식 속에 스며들어 1950년대 그의 컬렉션을 통해 엄격한 우아함에서 편안함 쪽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1956년 디올은 프랑스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나폴레옹 1세가 전장에서 공적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처음 제정됐고 현재 공로가 인정되는 각 분야의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상) 훈장을 받았다. 또 1957년 3월 미국 주간지 타임 표지에 등장(사진 참조)한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됐다.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디올은 자신의 패션 철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기계 문명 시대에 패션은 인간에게 위안을 준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혁신적인 패션이라고 해도 초라하거나 평범해 보이지만 않는다면 대중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물론 패션은 일시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것이지만 지금 같이 암울한 시대에는 사치를 조금 장려할 필요도 있다.”
디올은 1957년 9월 24일 지병인 심장병으로 이탈리아 몬테카티니에서 세상을 떠났다. 디올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쓰러졌다. 결국 디올이 준비하던 스핀들 라인은 유작이 됐고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물려받았다.
참고 도서 : ‘Christian Dior(이즘패션연구소 편저, 도서출판 이즘)’ 등
사진출처: 갤러리 디오르 닷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