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생 로랑→마크 보앙→지안프랑코 페레 ‘바통 터치’…LVMH 인수 후 강한 구조 조정 시작

류서영의 명품이야기/크리스찬 디올④
1959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디올 패션쇼에서 선 보인 이브 생 로랑의 트라페즈 라인. 출처= www. dior.com
1959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첫 디올 패션쇼에서 선 보인 이브 생 로랑의 트라페즈 라인. 출처= www. dior.com
1989년 열린 지안 프랑코 페레의 디올 패션쇼. 출처=galeriedior.com
1989년 열린 지안 프랑코 페레의 디올 패션쇼. 출처=galeriedior.com
크리스찬 디올은 1957년 9월 10주년 컬렉션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는 21세의 젊은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물려받았다. 그는 19세에 크리스찬 디올의 어시스턴트에 임명된 지 불과 2년이 지나 수석의 자리에 앉았다. 1958년 1월 로랑의 첫째 컬렉션인 트라페즈 라인(사다리꼴 라인)은 시작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몸을 자유롭게 하는 실루엣으로, 쇼가 끝난 후 파리 시민들은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환호했다.

1960년 봄·여름 컬렉션은 1960년대의 젊음을 압축해 잘 표현한 것으로, 디올 하우스의 컬렉션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는 거리의 청소년들에게서 영감을 받은 대담한 비트룩과 디올이 가장 좋아하는 색상 중 하나인 블랙 색상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 컬렉션은 우아한 디올 라인을 선호하는 고객들에게 외면당했고 결국 디올의 경영진은 로랑을 해고했다.
마크 보앙, 디올 최장수 수석 디자이너 기록

마크 보앙이 1961년 이브 생 로랑의 뒤를 이어 디올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장 파투의 디자이너이자 로버트 피아제의 보조 디자이너였던 보앙은 1958년 런던 자회사의 아트 디렉터로 디올 하우스에 합류했다. 보앙은 1953년 자신의 이름을 건 부티크를 열었지만 매출이 저조해 단 한 번의 컬렉션을 발표하고 폐점했다.

그는 1961년 파리 쿠튀르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그는 그곳에서 여성성에 대한 현대적 아이디어를 반영하는 슬림룩을 만들었다. 에술의 세계, 특히 잭슨 폴락의 추상표현주의에 매료된 보앙은 거의 30년 동안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인기 있던 독특한 스타일인 디올을 위해 우아하고 단순하게 재단된 현대적인 실루엣을 디자인했다. 보앙은 “옷을 만드는 것은 학문과 같다. 그러므로 신중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고 디올 하우스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1966년 디올 최초의 남성용 오 드 트왈렛인 오 소바주는 혁명을 일으켰다.

보앙은 1967년 베이비 디올을 만들었다.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 왕비가 참석한 가운데 몽테뉴 28번가에 베이비 디올 부티크를 오픈했다. 보앙은 1970년 크리스찬 디올의 남성복 라인을 탄생시켰다. 보앙은 “패션은 우리가 언젠가는 사랑하게 될 분명하고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79년 보앙은 디올의 전통을 재해석한 잘록한 허리, 풍성한 엉덩이를 강조하는 벨벳 소재의 재킷과 튤립 형태의 스커트를 선보였다. 이는 보앙이 디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앙은 1989년까지 디올 하우스의 최장수 수석 디자이너로 기록됐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디올은 경영 위기에 부닥쳤다. 거의 모든 매장이 적자였고 90%의 매출이 라이선스 사업에서 나왔다. 그나마 그중에서 경영 상황이 가장 좋은 브랜드는 크리스찬 디올이었다. 디올의 주요 투자자는 마르셸 부사크였다. 그는 프랑스 의류업계에서 잔뼈가 굵어 ‘코튼 킹(cotton king)’으로 불렸다. 하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그는 80세가 넘을 때까지 경영 일선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패션업계의 급속한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디올을 회생시키지 못한 채 1980년 사망했다.

1970년대 말 프랑스의 보석 브랜드 까르띠에가 크리스찬 디올 인수를 시도했고 크리스찬 디올 향수의 라이선스 권리를 이미 소유하고 있었던 모에헤네시그룹 또한 인수에 관심을 나타냈다. 결국 명품 제국을 구축하고자 하는 LVMH(Louis Vuitton Moët Hennessy)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부사크의 지주회사를 인수한 SFFAW를 사들였다. 아르노 회장은 부사크그룹을 인수한 뒤 사업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봉마르셰백화점과 크리스찬 디올만 남겨두고 다른 계열사는 모두 팔았다. 그런 뒤 아르노 회장은 과감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5년 동안 8000명의 직원을 해고하는 조치를 취했다.
마크 보앙(오른쪽)과 모나코의 그레이스가 참석한 가운데 1967년 11월 개장한  베이비 디올 부티크. 출처=galeriedior.com
마크 보앙(오른쪽)과 모나코의 그레이스가 참석한 가운데 1967년 11월 개장한 베이비 디올 부티크. 출처=galeriedior.com
최초로 非프랑스 출신 수석 디자이너
1989년 지안프랑코 페레가 디올 여성 컬렉션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페레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그는 최초로 프랑스 출신이 아닌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당시 프랑스에선 프랑스 패션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다른 나라에 내준 데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노 회장이 페레의 영입을 과감하게 밀어붙인 것은 새로운 디자이너의 영입을 통해 전반적인 브랜드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차원이었다. ‘젊음’과 ‘새로움’을 불어넣고자 한 그의 의도는 맞아떨어졌다. 페레는 크리스찬 디올의 패션 흐름을 연구하며 컬렉션을 준비했다. 그 결과 컬렉션은 성공적이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는 프랑스 패션계에서도 알아주는 외국인 디자이너가 됐다.

패션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전에 힘입어 페레는 디올의 특성을 잘 나타냈고 슈트의 건축학적 우아함과 웅장한 이브닝 드레스의 화려함을 통해 오트 쿠튀르에 새로운 생명을 마음껏 불어넣었다. 크리스찬 디올과 같은 열정적인 예술 애호가인 그는 그랑 팔레에서 열린 화가의 회고전과 동시에 폴 세잔에게 영감을 받아 1995~1996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진행했다.

페레는 일반적으로 남성복에 사용되는 패턴들(예를 들면 하운드 투스 체크, 글렌 체크, 윈도 팬 체크 등)을 사용했다. 그는 이른바 ‘남성 모티브’를 디올 여성 옷에 재도입했다. 페레는 “과장된 칼라, 소매와 리본은 단순한 의상을 완전하고 독특하며 뛰어난 앙상블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제가 이 유명한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꼭 맞는 실루엣, 커다란 리본, 풍성한 오간자 등의 디올 스타일을 존중하고 싶었다. 이에 경의를 표해야 했다”고 말했다. 자료 참고=갤러리디올닷컴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