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실무 투입할 수 있는 3~10년 차 이직 활발… ‘맞춤형 복지’ 내놓는 기업들

[비즈니스 포커스]
점심시간 서울 종로의 한 횡단보도 위로 직장인들이 지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점심시간 서울 종로의 한 횡단보도 위로 직장인들이 지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수도권에 있는 한 중견기업의 영업팀은 50대 부장과 40대 차장 두 명, 갓 입사한 20대의 신입 사원으로 구성돼 있다. 부서의 중간급인 대리와 과장을 충원하려고 했지만 몇 달째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다. 두 명의 차장이 거래처를 돌아다니는 동안 부장은 사무실에서 신입 사원 교육에 틈틈이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플랫폼을 운영하는 스타트업에 새롭게 부임한 홍보팀장 A 씨는 최근 팀원을 뽑기 위해 공개 채용을 실시했다. 스타트업에 새로 생긴 홍보팀인 만큼 바로 업무에 투입될 수 있는 3년 차에서 7년 차 직원을 원했다. 하지만 적임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1년 미만의 짧은 경력을 가진 ‘중고 신입’부터 연차 10년 이상의 부장급 지원자의 이력서만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허리’ 역할을 하는 과장·대리 기근에 시달리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스타트업을 가리지 않고 3년 차 이상과 10년 차 미만, 즉 ‘대리와 과장’이 가장 귀한 인력이 되고 있다.

조직에서 대리와 과장은 실무를 가장 많이 하는 연차다. 동시에 사원에겐 실무를 가르치는 사수, 부장급에겐 일을 맡길 수 있는 부하 직원이다. 이 때문에 최근 기업들은 경력 채용을 통해 대리·과장급을 뽑는 데 몰두하고 있지만 채용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대리·과장도 ‘헤드헌팅’으로 뽑는 시대

과거엔 신의 직장으로 평가받던 기업들에도 ‘대리·과장’이 사라지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들어 KDB산업은행에서 21명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는데 그중 20명이 대리·과장 등 실무급 직원들로 알려졌다. 이들의 이직처는 증권사나 은행 등 민간 금융 기업이었다.
한국은행에서도 대리·과장급인 2030세대가 직장을 떠나는 비율이 높았다. 김수흥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한국은행 측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매년 30여 명이 한국은행을 그만뒀는데 그중 20~30대가 40%를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과장급을 향한 타사의 ‘러브콜’도 활발하다. 직장인 커리어 플랫폼 ‘리멤버’가 경력직 스카우트 제안 정보 누적치 200만 건을 분석해 5월 9일 공개한 ‘경력직 스카우트 트렌드’를 살펴보면 가장 많은 이직 제안을 받는 연차는 5~8년 차(38.3%), 평균 스카우트 제안 건수는 약 12건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기업에서는 보통 대리급으로 분류되는 연차다. 그다음은 과장급에 해당하는 9~12년 차(28.9%)였다. 뒤를 이어 13~16년 차(13.1%), 1~4년 차(9.8%), 17년 차 이상(9.6%)으로 나타났다.

주로 C레벨급의 이직을 주선하는 헤드헌팅 업체에도 대리·과장급의 이직을 의뢰하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그간 대리·과장급 경력직 채용 공고는 사내 채용 홈페이지나 취업 사이트에 공고를 올리는 게 주된 방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용이 들더라도 대리·과장급 채용을 위해 헤드헌팅 업체의 문을 두드리는 기업 수가 증가했다. 이홍석 커리어케어 상무는 “헤드헌팅사를 이용하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찾아 이른 시간 안에 채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실무진 채용을 의뢰하는 기업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만큼 기업에서도 C레벨 못지 않게 대리·과장급의 채용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대리·과장급의 몸값이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략 3년 이상에서 10년 이하의 연차를 보유한 이들은 별도의 적응 기간이나 교육 없이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다. 기업은 신입을 채용하는 것보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최근 기업들의 채용 트렌드도 신입 공채가 아닌 경력직 위주로 재편됐다. 현재 5대 그룹 중에서 신입 사원 공채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삼성이 유일하다.

신입 공채가 줄어들면서 대학 졸업생들이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기회는 점차 줄었다. 이 때문에 중소·중견기업에서 경력을 쌓아 대기업으로 이직하려는 구직자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는 연차가 대리·과장급이다. 이홍석 상무는 “중소기업은 3~4년 근무해 경력을 쌓은 실무 직원들이 중견·대기업으로 이직을 시도하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지는 힘든 상황에 처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대리급’은 기존 직장에서의 경력을 버리는 ‘중고 신입’이 되더라도 원하는 회사에 가겠다는 열망이 강하다.

즉 원래부터 대기업이 목표였던 신입 사원들이 얼어붙은 신입 공채를 뚫는 대신 중견·중소기업에서 연차를 쌓은 후 이직하는 경력 공채를 택하는 이들이 늘었다.

허리급 인재 떠난 자리엔 ‘30대 막내’가

신입 공채가 사라지며 나타난 부작용은 또 하나 있다. 남아 있는 대리·과장급이 회사의 막내가 되면서 이들에게 과도한 업무가 몰린다는 점이다. 30대 초·중반이 사무실의 막내가 되면서 인사 적체 현상, 이른바 ‘직급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동시에 조직의 구조도 ‘역파라미드’가 돼 버렸다. 실무와 함께 ‘막내’의 임무도 수행해야 하는 대리·과장들은 몸값이 가장 비싸질 연차에 자연스럽게 이직을 시도한다.

여기에 더해 ‘허리급 인재’가 없다는 점은 기업을 더욱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다. 소위 말하는 ‘고인 물’들만 가득한 직장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대리·과장들의 마음을 잡는 것에 몰두하고 있다. 연봉 인상 폭을 높게 책정하거나 복지를 크게 늘리는 것이다. 특히 최근 구인난을 겪고 있는 정보기술(IT) 기업들은 기존에 재직하는 인재들을 지키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CJ올리브네트웍스는 지난 1월 직원의 연봉을 인상했다. 당시 과장급과 대리급의 연봉을 가장 크게 올렸다. 과장급은 700만원, 대리급은 600만원을 인상했다. 사원급 500만원, 차장급 400만원, 부장급은 200만원으로 인상액이 정해졌다. 이는 이직률이 높은 순서에 의거한 것으로, 거세질 인재 쟁탈전에 선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LG CNS는 지난해 9월 직원 스스로 근무팀을 결정할 수 있는 ‘마이 커리어업’을 도입했다. 팀에 지원한 직원이 인터뷰에 통과하면 2개월 내에 조직을 옮길 수 있다. 연중 상시로 운영되고 지원 과정은 철저히 비밀이다. 또 2030을 위한 맞춤형 복지도 늘렸다. LG CNS는 회사가 보유한 골프장 회원권을 임원이 아닌 직원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최근 2030세대 사이에서 골프가 새로운 취미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도를 마련함과 동시에 기업이 지금의 대리·과장급 인재들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른바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주축인 이들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특히 최근 늘어난 기업 평판 사이트를 통해 기업의 내부 문화와 처우에 상당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도 과거 구직자들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홍석 상무는 “기업 인사관리팀은 해당 기업이 평판 조회 사이트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파악해 놓아야 좋은 실무진을 영입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