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위험, 이상 기후, 공급망 훼손, 디스토피아…한국은행, 현명히 결정할 시점

[한상춘의 국제경제 심층 읽기]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사진=연합뉴스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사진=연합뉴스
올해 상반기도 조만간 마무리된다. 올해 초 비교적 낙관적으로 출발했던 글로벌 경제는 올해 2월 이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 중국의 경제 봉쇄 조치, 신흥국 금융 위기 등과 같은 대형 변수가 잇달아 나타나면서 하반기를 앞두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있다.

이전과 달리 올해 상반기 대형 변수들은 ‘성장률 훼손’과 ‘물가 상승’에 유독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세계적인 예측 기관들이 지난해 말과 올해 6월 내놓은 전망치를 비교해 보면 대형 변수들이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1.3%포인트 이상 떨어뜨리고 세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을 2%포인트 이상 끌어올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정책 대응 어려운 스태그플레이션
세계 경제를 보는 시각도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침체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벌이던 경기 논쟁은 올해 4월 국제통화기금(IMF)이 ‘슬로플레이션’ 우려를 처음 제기하면서 시각이 바뀌고 있다. 이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세계은행은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각국의 경제 상황을 들여다보면 세계은행의 스태그플레이션 경고는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미국의 올해 1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 1.5%로 떨어졌다. 반면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올해 3월 이후 Fed의 물가 목표치(2%)를 4배 이상 웃도는 수준이 지속되다가 5월 8.6%로 한 단계 더 뛰어올라 증시에 충격을 줬다.

중국의 경제 상황은 더하다. 지난해 1분기 18.3%에 달했던 성장률은 올해 1분기 4.8%로 급락했다. 경제 봉쇄 조치가 집중된 올해 2분기에는 2%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0%대로 추락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비관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올해 2월 이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 달이 지날 때마다 2배씩 뛰고 있다.

부존 자원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피해가 집중되고 있는 유로 경제는 올해 2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 수준으로 떨어지고 6월 이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0%대로 뛸 것으로 예상된다.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다.

최근 나타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무서운 것은 태생적 한계인 정책 대응이 더 어렵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에 나타났던 스태그플레이션은 2차 오일쇼크 파장이란 ‘단선형 성격’인데 반해 이번에는 지정학적 위험, 디스토피아, 이상 기후, 공급망 훼손, 출구 전략, 경제 봉쇄 조치 등과 같은 ‘다중 공선형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 태풍에 휘청이는 신흥국
올해 6월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가 0.75%포인트 인상됐다. 월가에서 주목했던 것은 이번에 인상한 0.75%포인트보다 과거 같은 폭으로 금리를 올렸던 1994년이다. 이때부터 각국 금리 간 ‘대발산’이 발생하면서 국제 금융 시장에서 커다란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대발산은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추세를 포착해 미국 시카고대의 케네스 포메란츠 교수가 처음 주장한 용어다.

‘불균형’의 상징어인 대발산이 국제 금융 시장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던 때는 미국과 다른 국가 간 금리 차가 추세적으로 처음 벌어지기 시작했던 1994년 이후부터다. 미국은 당시 현안이던 물가를 잡기 위해 1994년 3.75%였던 기준금리를 2년 만에 6%로 대폭 올렸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 초 통화 위기로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렸다.

미국과 다른 국가의 금리 차 확대는 곧바로 달러 강세로 이어졌다. 여기에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해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역플라자 합의까지 겹치면서 달러 가치의 강세 국면이 지속되는 루빈 독트린 시대가 전개됐다. 대표적으로 1995년 4월 79엔대까지 폭락했던 엔‧달러 환율은 불과 5년 만에 148엔까지 치솟았다.

어빙 피셔의 통화 가치를 감안한 국제 자금 이동 이론상 미국 금리가 오르고 강달러가 되면 신흥국에서 대규모 자금 이탈이 발생한다. 대발산이 시작된 1994년 중남미 외채 위기를 시작으로 1996년 아시아 외환 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국가 채무 불이행) 사태에 이르기까지 신흥국들은 순차적으로 금융 위기를 겪었다.

6월 FOMC 회의 직후 국제 금융 시장에서는 1994년 이후 전개됐던 상황이 다시 나타나는 데자뷔 악몽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경기·물가·금리 간 상충 관계인 트릴레마에 빠진 여건에서 미국과 친미 성향의 국가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반면 중국과 친중국 성향의 국가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내려 이미 대발산이 시작되고 있다.

달러 강세도 재현되고 있다. 인플레이션 논쟁이 처음 제기된 지난해 5월 이후 달러 인덱스는 89대에서 105대로 급등했다. 같은 기간 엔‧달러 환율은 107엔대에서 135엔대로 치솟고 있다. 미국은 당면한 수입 물가를 잡기 위해 달러 강세를 유도하는 과정에서 옐런 독트린 시대가 재현될 것이라는 시각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신흥국들은 1990년대 상황보다 더욱 좋지 않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 Fed의 제로 금리 정책에 따라 빚의 무서움을 모르고 조달했던 달러 부채 만기일이 본격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들은 2025년까지 매년 평균 4000억 달러 이상 달러 부채의 원리금을 갚아야 한다.

신흥국의 위기도 본격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스리랑카·파키스탄 등 중국의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경제 벨트)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가들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모리스 골드스타인의 위기 판단 지표로 보면 취약 신흥국 74개국 중 무려 58개국이 금융 위기가 발생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IMF도 디폴트설에 시달릴 정도로 재정 사정이 녹록하지 않다는 점이다. 최대 쿼터국인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국수주의로 재원 확충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된 금융 위기로 구제 금융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IMF는 1944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자체 국채 발행을 검토 중이다.

문제는 한국은행의 인식이다. 그 어느 국가보다 대외 환경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가 정작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확률이 낮다고 보고 있다. 복합 위기, 경제 태풍이 몰아칠 것이라는 새 정부의 시각과는 사뭇 다르다. 근거도 성장률이 크게 낮아진 잠재 수준을 밑돌 가능성이 낮은 점을 들고 있어 취약하다.

현재 한국은행의 인식대로 물가를 잡는 데 우선순위를 두더라도 실업률이 높아지면 노조가 강한 한국 경제 여건상 사회적 저항이 커질 수 있다. 금리 인상에 따른 부담도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소상공인 등 취약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칠 확률이 낮다는 한국은행의 인식부터 개선돼야 할 때다.

새 정부가 지금의 우리 경제를 복합 위기로 규정하고 앞으로 경제 태풍 위기가 닥칠 것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책 당국뿐만 아니라 여야 정치권, 기업 그리고 국민 모두 위기 극복에 나서는 ‘공공선’ 정신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분열과 이기주의는 복합 태풍 위기 극복에 최대 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상춘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