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과 전쟁으로 상승한 달러 가치…장기적으로 미국은 ‘강달러’ 원하지 않아

미국의 6월 소비자 물가(CPI) 상승률이 ‘인플레이션의 저주’라고 불릴 만큼 워낙 충격적으로 나옴에 따라 국제 금융 시장도 빠르게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6월 CPI 상승률 9.1%는 단순 비교하면 40년 만에 최고치이지만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의 새로운 물가 추계 방식대로라면 사상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

가장 주목해야 할 변화는 1990년대 중반보다 더 심한 대발산(great divergence)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달러 강세가 재현되고 있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이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해 5월 이후 달러 인덱스는 20% 급등했다. 유로화 가치는 20년 만에 등가 수준(1달러=1유로)이 붕괴됐다. 엔‧달러 환율도 20년 만에 최고 수준인 달러당 140엔에 육박하고 있다.
미국 달러, ‘기축 통화’ 넘어 ‘제왕 통화’ 되나 [한상춘의 국제 경제 읽기]
이에 따라 미국 달러화의 위상이 기축 통화를 넘어 제왕(king) 통화가 될 것이라는 시각까지 나오고 있다.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2020년대 들어 국제 통화 질서가 당면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하나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제왕 통화가 도입될 만큼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됐느냐, 다른 하나는 그동안 기축 통화의 역할을 담당해 왔던 달러화의 위상이 기축 통화를 뛰어넘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2008년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 2009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2011년 미국 국가 신용 등급 강등 조치 등을 계기로 달러 가치가 흔들리면서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에 묵시적으로 유지돼 온 ‘제2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돼 왔다. 브레튼 우즈 체제는 1944년 국제통화기금(IMF) 창립 이후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 통화로 하는 금환본위 제도를 말한다.

제2의 브레튼 우즈 체제는 1971년 닉슨의 금 태환 정지 선언 이후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를 골간으로 미국과 아시아 국가 간의 묵시적인 합의에 따라 유지돼 온 환율 제도를 의미한다. 미국이 이 체제를 유지한 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공산주의의 세력 확산을 방지하려는 숨은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기준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제2 브레튼 우즈 체제는 이런 미국의 의도를 충분히 달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일부에서 제2 브레튼 우즈 체제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유럽의 부흥과 공산주의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이 지원했던 마셜 플랜의 또 다른 형태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후 제2 브레튼 우즈 체제에 균열을 보이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초 무렵이다.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통화에 대한 의도적인 달러화 강세로 미국의 경상 수지 적자는 더 이상 용인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여러 방안을 동원했지만 결국 선진국 간의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다.

제2 브레튼 우즈 체제에 또 한 차례 균열을 보이게 된 계기를 제공한 것은 1995년 4월 달러화 가치를 부양하기 위한 역(逆)플라자 합의와 아시아 외환 위기다. 역플라자 합의에 따라 미 달러화 가치가 부양되는 과정에서 외환 위기로 아시아 통화 가치가 환투기로 폭락하면서 ‘강한 달러-약한 아시아 통화’ 간의 구도가 재현됐다. 역플라자 합의 이후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79엔에서 148엔이 될 정도로 강한 달러 시대가 전개됐다. 당시 미국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의 이름을 따 ‘루빈 독트린’이 전개됐던 시기다.
제2 브레튼 우즈 체제 유지되는 국제 경제
신흥국은 대규모 자금 이탈에 시달렸다. 1994년 중남미 외채 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 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국가 채무 불이행) 사태까지 이어지는 ‘그린스펀‧루빈 쇼크(Greenspan & Rubin’s shock)가 발생했다. 미국도 슈퍼 달러의 부작용으로 미국의 경상 수지 적자가 불거지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 초 상황이 재연됐다. 쌍둥이 적자 이론에 따라 미국은 경상 수지 적자가 확대되면 재정 수지 적자도 확대된다.
미국 달러, ‘기축 통화’ 넘어 ‘제왕 통화’ 되나 [한상춘의 국제 경제 읽기]
강한 달러 시대가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자국 통화의 약세라는 반사적인 이익을 누린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무역 수지 흑자가 대폭 확대됐다. 국민 경제 3면 등가 법칙(X-M=S-I, X=수출, M=수입, S=저축, I=투자)에 따라 아시아 국가의 과잉 저축분은 미국 자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왔다. 한때 세계 경제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앨런 그린스펀 미 중앙은행(Fed) 전 의장이 자산 거품을 해소하기 위해 2004년부터 기준금리를 올렸지만 중국의 국채 매입으로 시장 금리가 더 떨어져 자산 거품이 심해지는 그린스펀 수수께끼 현상이 발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거품 붕괴 모형에 따라 자산 거품을 떠받치는 돈이 더이상 공급되지 않으면 터진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의 실체다. 세계 제일의 경제 대국과 달러처럼 기축 통화국의 지위를 바탕으로 레버리지 투자(증거금 대비 총투자 금액)가 활성화돼 있는 미국에서 자산 거품이 터지면 자국의 금융사는 마진콜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디레버리지 과정에서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고 2009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같은 대형 금융 위기가 발생한다.

사상 초유의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Fed는 전시 때나 사용하는 비전통적 통화 정책을 동원했다. 대공황 관련 연구를 가장 많이 한 벤 버냉키 당시 Fed 의장은 한꺼번에 두 단계 이상 내리는 ‘빅스텝(big step)’ 방식으로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내렸다. 유동성 공급도 무제한 국채를 사주는 양적 완화(QE : Quantitative Easing) 정책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헬리콥터기 물을 뿌리듯이 돈을 풀었다.

브라운 방식으로도 알려진 Fed의 비전통적 통화 정책은 달러 가치와 위상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특정 국가가 금융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자국 통화를 평가 절하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인접국이나 경쟁국에 전가된다. 대표적인 ‘근린 궁핍화 정책’이다. 특히 미국과 같은 중심국이자 기축 통화국에서 자국 통화를 평가 절하하면 그 피해는 경제 발전 단계상 한 단계 아래 국가에 집중된다. 중국과 한국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해당된다.

금융 위기 이후 국제 통화 제도는 1976년 킹스턴 회담(길게는 스미스소니언 체제 포함) 이후 시장의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국가 간 조약이나 국제 협약이 뒷받침되지 않아 ‘없는 시스템(non-system)’ 혹은 ‘젤리형 시스템(jelly system)’이라고 불린다. 그 결과 킹스턴 달러 중심의 브레튼 우즈 체제는 이전보다 느슨하고 불안한 형태로 유지돼 왔다.
변함없이 유지되는 달러 기축 시스템
시스템이 없는 국제 통화 제도하에서는 기축 통화의 신뢰성이 크게 저하되더라도 이를 조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이 때문에 새로운 기축 통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는 통화는 없다. 유일한 기축 통화국인 미국은 대외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하지만 무역 수지 흑자국은 이를 조정할 유인이 없다. 새로운 기축 통화 논쟁과 함께 글로벌 환율 전쟁이 수시로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 위기 이후 달러화 중심의 브레튼 우즈 체제가 흔들리는 것은 크게 보면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하나는 금융 위기 극복 과정에서 누적된 재정 수지 적자와 국가 채무 등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로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금융 위기 후유증에 따른 ‘낙인 효과’라고 볼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브레튼 우즈 체제가 재차 강화되면 제3기에 해당한다. 외형상 여건은 형성돼 있다. 유럽·일본·중국 등 미국 이외 국가는 양적 완화, 마이너스 금리 제도 등을 통해 금융 완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의도 여부와 관계없이 이들 국가의 통화 가치는 떨어지고 달러화 가치는 강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달러화 강세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미국 경제는 완전하지 못하다. 달러 강세에 따른 경기 부담은 의외로 크다. Fed의 계량 모델인 ‘퍼버스(Ferbus=FRB+US)’에 따르면 달러 가치가 10% 상승하면 2년 후 미국 경제 성장률이 무려 0.75%포인트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제롬 파월 Fed 의장이 고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경기가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달러 강세가 재현된다면 언제든지 침체 국면에 빠질 위험이 높다. 현실화된다면 ‘제2의 에클스 실수’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재무장관이 잊을 만하면 대미 흑자국을 중심으로 환율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밝혀 왔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론을 맺는다면 인플레 판단 실수로 뒤늦은 Fed의 금리 인상으로 달러화 강세가 되는 틈을 타 고개를 들고 있는 제왕(king) 달러화에 대한 시각은 일단 미국이 바라지 않는다. 인포데믹, 즉 잘못된 정보에 현혹되지 말기를 당부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국제금융 대기자 겸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