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흔드는 제네시스…국내서 벤츠‧BMW‧렉서스와 맞붙는 첫 번째 차
수입차보다 국내 판매량 앞서
디자인‧품질‧내구성에 낮은 AS비용까지

정주영‧정몽구‧정의선의 ‘포니‧그랜저‧제네시스’

[스페셜 리포트] 제네시스에 담긴 축적의 시간, 한국 자동차 60년
그래픽=박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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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가 벤츠·BMW·아우디의 경쟁자가 됐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대자동차의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가 선택의 목록에 포함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동차 커뮤니티에는 ‘독일차 비싸게 주고 살 바에 제네시스 풀옵션을 사겠다’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단순 통계만으로 우위를 판단하기 힘들지만 판매량도 만만치 않다. 제네시스는 2년 연속 한국 자동차 시장에서 벤츠·BMW·아우디 등 ‘독일 3형제’의 판매량을 압도했다. 2021년 벤츠와 BMW의 한국 판매량은 각각 7만6152대와 6만5669대로, 제네시스 내수 판매량(13만8757대)의 절반에 그쳤다. 아우디는 2만5615대로 제네시스 판매량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고급차의 선택 기준은 다양하다. 디자인·가격·성능 등과 함께 브랜드 파워도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2000년대 초 미국 자동차가 한국에서 팔리지 않은 것도 이 영향이 컸다. 한국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지위를 보여주는 수단이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에 브랜드가 중요했다. 고급차 경쟁에서 제너럴모터스(GM)의 캐딜락·포드·크라이슬러가 독일 3사와 렉서스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제네시스는 이 고급 브랜드 경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첫째 국산차가 됐다는 점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가장 비싼 G90의 선전
제네시스가 처음 나올 당시인 2008년만 해도 제네시스를 벤츠, BMW와 비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제네시스 스펙이 좋아도 독일 3사의 브랜드 파워에는 밀렸다. 쉽게 말하면 BMW나 벤츠를 사려는 사람이 제네시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13년이라는 시간은 제네시스의 브랜드 파워를 높이는데 충분했다. 현대차와 한국수입자동차협회 등에 따르면 올해 1~8월 제네시스 G90 판매량(1만4658대)은 전년 동기보다 265% 급증했다. 6년 만에 시장에 나온 2세대 G90은 1억원이 넘는 가격에도 사전 계약 첫날에만 1만2700대가 계약되는 등 연초부터 인기를 끌었다. 같은 기간 판매량은 가격대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벤츠 E클래스(1만9014대)에는 밀렸지만 S클래스(1만2대)는 간단히 넘어섰다. BMW 5시리즈, 아우디 A6의 판매량도 웃돌았다. 연내 자율 주행 기술이 탑재돼 G90의 흥행은 올해 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G90 아래에 있는 라인 G80과 G70의 인기는 더하다. 지금 계약해도 올해 차를 인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종에 따라 2024년에야 받을 수 있는 차도 있을 정도다.

제네시스는 품질과 기술 평가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제네시스 브랜드보다 26년이나 앞서 나온 일본 도요타의 고급차 브랜드 렉서스를 제치고 미국의 시장 조사 업체 제이디파워의 ‘2022년 신차 품질 조사(IQS)’에서 프리미엄 브랜드 1위를 차지했다. 또 ‘2022 미국 기술 경험 지수 조사(TXI)’에선 캐딜락·벤츠·볼보·BMW 등 유수의 완성차 브랜드를 제치고 1위를 거머쥐었다.
제네시스는 어떻게 성공했나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제네시스의 역사는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차는 2004년 고급차 출시를 위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전사적으로 설계와 파워트레인(동력을 전달하는 기구), 디자인 등의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2008년 1세대 제네시스(BH), 2013년 2세대 제네시스(DH)를 출시했다. 다만 독립 브랜드 출범은 미뤘다.

현대차에 가장 큰 시장은 미국인데 2000년대 들어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국 완성차 업체들이 크게 휘청거리며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또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 담보 대출) 부실 사태로 금융 위기가 불어닥친 것도 영향을 줬다.

현대차는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 제고보다 미국 현지 공장을 증설하고 판매량을 늘리며 미국 시장에서 외형을 확장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 2015년 11월 제네시스 브랜드를 독립 출범시켰다. 도요타의 렉서스, GM의 캐딜락 같은 별도의 디비전을 갖겠다는 현대차의 목표가 제네시스를 통해 시작된 셈이다.

‘75만 대.’ 제네시스의 국내외 누적 판매량이다. 출범 첫해인 2015년 384대를 판매했던 제네시스는 2021년 20만 대를 돌파했다. 한국에서의 판매를 기반으로 해외로 진출하는 현대차의 전통적 전략을 활용했다.

제네시스가 최고급차 시장에서 자리 잡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리더십이라는 평가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당시 현대차 부회장)은 제네시스 브랜드 초기 기획 단계부터 외부 인사 영입과 조직 개편까지 브랜드 출범 전 과정을 기획하고 주도했다. 정 회장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출시 행사에 직접 나서 “우리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이유는 오직 고객에게 있다”며 제네시스 브랜드 개발 과정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현대차가 쌓아 온 축적의 시간은 제네시스를 고급차 소비자들로부터 인정받게 만들었다. 그 핵심에는 품질이 있다. 과거에도 현대차는 품질이 뛰어났다. 하지만 내구성과 디자인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내구성, 즉 품질은 정몽구 명예회장의 집착으로 해결했다.

품질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지난해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가 제네시스 GV80를 몰고 가다 차량이 뒤집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안전성을 알린 사건이다. 당시 커뮤니티에선 GV80를 두고 ‘타이거 우즈를 살린 차’라는 평이 나왔다.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에서 제네시스에 대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GV80는 올해 1~7월 미국에서 1만 대 가까이 팔렸고 전체 제네시스 판매량은 3만 대가 넘는다.

바통을 이어 받은 정 회장은 여기에 ‘디자인’을 더했다. 기존 차량과 달리 전혀 다른 새로운 차를 개발하기 위해 기존 엔지니어링 중심 디자인에서 탈피했다. 엔지니어의 설계에 맞게 차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설계를 엔지니어가 구현하는 순서로 이해하면 쉽다. 품질에 기반한 디자인 관점의 설계는 제네시스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결과물이 3세대 G80다. 3세대 G80는 한국은 물론 주요 시장인 미국에서 “독일 3사와도 경쟁할 수 있는 디자인”, “최고의 신형 럭셔리 세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네시스의 엠블럼에서 착안한 전면부의 크레스트(방패 모양) 그릴과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두줄 쿼드램프(4개 램프)는 제네시스의 고급화 이미지를 정착시키는 데 일조했다. 고급화 이미지는 벤츠의 삼각별 로고처럼 소비 욕구를 자극했다. 3세대 G80이 출시된 2020년 제네시스 한국 판매량은 10만 대를 돌파했다. 그중 G80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외부에서 인재를 데려오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벤틀리·도요타·아우디 등 완성차 업체 출신 외부 인사들을 적극 등용하며 글로벌 시장을 정비했다. 내부적으로는 성과를 낸 직원에게 확실하게 보상하는 등 전통적 현대차 경영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 제네시스가 성과를 내자 지난해 말 전무급이었던 이상엽 현대차 디자인담당을 부사장으로 승진시키기도 했다. 이 부사장은 현대차 디자인센터장으로 제네시스의 디자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제네시스의 새로운 목표는
현대차는 제네시스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엔진의 시대에는 유럽, 미국, 일본 차에 뒤졌지만 전기차와 미래 모빌리티 경쟁은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다. 이때 ‘브랜드 파워’는 과거 추격자 전략을 쓸때와 질적으로 다른 변수가 된다.

현대차는 2025년부터 모든 신차를 전기차로 내기로 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또 2030년까지 총 8개 수소·배터리 전기차 라인업을 완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도 발표했다.

그 맨 앞줄에 제네시스가 서 있는 셈이다. 첨단 기술을 고급차에 가장 먼저 적용함으로써 전체 현대차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이미 제네시스 전기차는 시장에서 디자인과 품질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면에서 제네시스는 단순히 고급차가 아니다. 현대차를 대변하는 브랜드가 되고 있다. 프리미엄 라인의 성공은 마진이 좋을 뿐만 아니라 중저가 브랜드에도 영향을 미친다. 렉서스가 도요타 판매에 기여하고 있는 것과 같은 논리다.

철공소 수준에서 시작한 한국 자동차가 독일 3사의 경쟁자가 되고 차세대 자동차 경쟁을 같은 선상에서 출발해 어떤 성과를 낼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