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불가능한 기술력 보유한 기업 다수… 시장점유율 90% 달하는 ‘슈퍼 을 오브 을’도
거래에는 ‘갑(甲)’과 ‘을(乙)’이 있다. 통상 거래 계약 시 구매자는 ‘갑’으로, 납품하는 업체는 ‘을’로 표현된다. 그런데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해 시장을 독점하거나 경쟁사는 많지만 기술 격차가 크다면 이례적으로 납품 업체가 구매자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데 이들을 ‘슈퍼 을’이라고 한다.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슈퍼 을’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다. 완제품을 만들기 위한 부품 가운데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슈퍼 을 반도체 기업이 가지는 위상은 다른 부품사와는 큰 차이가 있다. 반도체는 전자·정보기술(IT)뿐만 아니라 금융·자동차·헬스케어 등 다양한 산업으로 사용처가 확대되고 있어 영향력이 더 커지고 있다.
슈퍼 을 수준의 점유율을 확보하지 않았지만 수십년 반도체 시장에서 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기업도 다수다. 메모리 시장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만 있는 게 아니고 비메모리 시장에는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회사) 1위 기업인 TSMC만 있는 게 아니다. 메모리뿐만 아니라 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는 비메모리 분야 그리고 장비업계에도 쉽게 접하지 못한 다양한 기업이 있다.
◆ ‘절대 강자’ ARM, 시장점유율 90%…파운드리 세계 3위 ‘UAM’
대표적인 슈퍼 을 기업은 최근 삼성전자와 인수·합병(M&A)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관심을 받는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업체 ‘ARM’이다. 1990년 설립된 영국의 팹리스 회사로, 자체 설계 라이선스를 여러 반도체 회사에 판매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전체 파운드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미미하지만 특정 사업에서는 ‘슈퍼 을’이다. 특히 스마트폰에 탑재하는 애플리케이션(앱) 프로세서(AP) 시장에서는 점유율 90%를 기록하고 있다. 태블릿용 AP 시장에서는 85%를 점유하고 있다. 고객사로는 삼성전자·애플·퀄컴·구글·엔비디아 등이 있다.
ARM의 경쟁력은 시장 가치로 잘 나타난다. ARM의 지난해 매출은 27억 달러(약 3조9000억원)인데, 현재 시장에서 ARM 인수가로 최대 100조원까지도 관측하고 있다.
이와 함께 파운드리 시장에서 점유율 7%(시장 조사 업체 트렌드포스 기준)를 확보한 대만의 UMC는 ‘슈퍼 을’에 해당하지 않지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와 삼성전자에 이어 3위로 영향력 있는 기업이다.
1980년 설립돼 대만 신주시에 본사를 두고 있는 UMC는 대만 최초의 반도체 회사다.
지난해 4분기 21억2400만 달러, 3분기 20억700만 달러, 2분기 18억1900만 달러, 1분기 16억7700만 달러 등을 기록해 연간 기준 76억2700만 달러(약 11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UAM은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생산 능력을 적극적으로 키우고 있다. 올 2월에는 싱가포르의 기존 팹 인근에 새로운 생산 라인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2024년 말 월 3만 개의 웨이퍼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고 올해에만 36억 달러(약 5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전체 투자 규모는 50억 달러(약 7조원)다.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의 TSMC·UMC, 한국의 삼성전자, 중국의 SMIC 등 아시아 기업들이 상위 5위권을 차지하며 주를 이루는데 여기에 유일하게 포함되는 미국 기업이 있다. ‘글로벌파운드리(GFS)’다.
트렌드포스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파운드리의 점유율은 6%로 TSMC·삼성전자·UMC에 이어 4위에 해당한다. 지난해 매출은 63억7000만 달러(약 9조1000억원)다.
2009년 AMD에서 분사돼 설립된 글로벌파운드리의 주요 고객사는 AMD·퀄컴·브로드컴 등이고 12나노미터, 14나노 등이 주력 라인이다. 삼성전자와 TSMC 등이 선도하는 초미세 공정으로 기술력을 개선하지 못했지만 10나노 이상의 공정에서는 여러 기업들과 탄탄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인텔에 M&A될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지만 기업공개(IPO)를 추진하면서 M&A 가능성을 차단했다. ◆ 비메모리에서 떠오르는 ‘CIS·MCU’ 시장…어떤 기업 있나
최근 주목받는 비메모리는 ‘광학 반도체’에 속하는 ‘CMOS 이미지 센서(CIS)’다. 시장 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CIS 시장은 일본의 소니(40%)와 한국의 삼성전자(25%)가 과반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다음이 바로 ‘옴니비전(12.9%)’이다.
옴니비전의 점유율은 2019년까지 한 자릿수에 불과했지만 최근 2년간 지속 성장하며 약 13%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옴니비전은 1995년 대만 엔지니어들이 설립한 기업이었지만 2019년 중국의 웨이얼반도체가 인수하면서 중국 기업이 됐다.
시장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옴니비전은 다양한 제품 포트폴리오, 스마트폰용 초고해상도 센서의 혁신, 자동차 등 산업 부문의 수요 증가로 올해 CIS 매출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CIS 시장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중국 기업은 옴니비전뿐만이 아니다. 2003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갤럭시코어’는 점유율 4.7%(카운터포인트리서치)를 확보, 시장 5위권을 유지 중이다.
갤럭시코어는 휴대전화, 스마트 웨어러블, 모바일 결제, 태블릿, 노트북, 카메라, 자동차 전자 제품 등에 탑재하는 고성능 CMOS 이미지 센서를 설계·개발·판매하고 있다. 갤럭시코어의 고객사는 오포·샤오미·삼성전자·레노보 등이다.
CIS 반도체와 함께 주목받는 또 다른 비메모리 부문은 ‘차량용 반도체(MCU)’가 속하는 마이크로 시장이다. 지난해부터 차량용 반도체 수급 부족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MCU 제조사에 대한 관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시장 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글로벌 MCU 시장 규모는 2020년 380억 달러(약 54조원)에서 2026년 676억 달러(약 96조원)까지 크게 성장할 것으로 추정된다.
MCU 시장의 1위는 2006년 필립스에서 분사돼 설립된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NXP세미콘덕터(이하 NXP)’다. 시장 조사 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NXP의 지난해 시장점유율은 18.8%로, 한 해 매출은 지난해 기준 37억9500만 달러(약 5조5000억원)다. 매출은 전년 대비 27% 급증했다.
NXP는 지난해부터 삼성전자의 M&A 물망에 오른 기업 중 한 곳으로, 애플·보쉬·델·에릭슨·폭스콘·노키아 등 다수의 글로벌 기업을 거래처로 두고 있다.
MCU 시장에서 NXP와 경쟁하는 미국의 ‘마이크로칩’도 있다. 마이크로칩의 매출은 2020년 28억7200만 달러(약 4조원) 수준에서 지난해 35억8400만 달러(약 5조원)까지 확대됐다. 점유율은 지난해 17.8%로, 시장 2위를 기록했다.
마이크로칩은 MCU를 주력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메모리와 아날로그 반도체 등 다양한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일본의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도 꾸준히 매출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기업이다. 2003년 일본 정부 주도로 히타치제작소와 미쓰비시 등이 공동 투자해 설립한 회사다. 2010년 NEC일렉트로닉스와 합병, 지금의 르네사스가 완성됐다.
르네사스는 과거 MCU 시장의 독보적 1위였지만 점차 점유율이 낮아지면서 3위까지 밀려났다. IC인사이츠가 발표한 MCU 시장 자료에 따르면 2015년 르네사스의 매출은 25억6000만 달러(약 3조6000억원)로, 시장점유율 20% 이상을 확보하며 1위에 올랐다. 당시 매출 20억 달러 이상을 기록하는 곳은 르네사스가 유일했다.
하지만 이듬해 NXP가 경쟁사 프리스타일반도체를 인수하면서 단숨에 1위로 올라서자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졌다. 르네사스는 지난해 27억4800만 달러(약 3조9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17%의 점유율을 확보했다.
◆ 애플 선택받은 ‘YMTC’…메모리 강자 ‘난야·윈본드’까지
메모리 시장에서는 ‘양쯔메모리(YMTC)’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동종 업계의 메모리 회사에 비해 최근(2016년) 설립된 후발 주자다.
칭화유니그룹과 중국 후베이성이 공통 투자해 만든 회사로, 본사는 중국 우한에 있다. 3D 낸드 플래시 메모리 설계와 제조를 주력으로 하며 종합 반도체 기업(IDM)을 목표로 사업 범위를 키우고 있다. 주요 제품은 엔터프라이즈 SSD, 클라이언트 SSD, eMMC 임베디드 메모리, UFS 임베디드 메모리 등이다.
양쯔메모리가 주목받는 것은 ‘애플과의 관계’ 때문이다. 애플이 아이폰14 시리즈 일부 제품과 보급형 모델 등에 양쯔메모리 제품을 탑재할 것으로 알려졌다.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삼성과 SK 등 기존 공급처와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일각에서는 양쯔메모리의 품질이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양쯔메모리의 메모리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기준 0.9%(1위)로, 낸드 시장에서는 2.3%(7위)를 차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낸드 매출은 15억7200만 달러(약 2조3000억원)다.
D램을 주력으로 하는 난야테크놀로지(이하 난야)는 대만 기업이다. 1995년 설립된 회사로, 본사는 대만 타오위안시에 있고 PC용 D램 칩을 주로 생산한다. 난야의 제품 생산 범위는 표준 D램, 저전력 D램, MCP(Multi-Chip Packaging), KGD(Known Good Die), 자동차 관련 D램 등 광범위하다.
난야의 메모리 점유율은 지난해 1.8%, D램 분야에서는 3.2%를 차지한다. 점유율은 한 자릿수지만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세계 3대 D램 회사에 이어 4위를 차지할 만큼 영향력 높은 기업이다. 난야가 D램 시장에서 지난해 기록한 매출은 30억2100만 달러(약 4조원)다.
난야는 마이크론과 기술 파트너십을 체결 중이다. 양 사는 대만의 또 다른 D램 회사인 이노테라에 공동 투자하는 등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난야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생산 능력과 효율성을 개선했고 그 결과 업계 최고의 D램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가 됐다”고 강조했다.
D램 점유율 1.0%를 확보한 ‘윈본드’ 역시 대만의 반도체 회사다. 1987년 설립된 윈본드는 메모리 분야에서코드 스토리지 플래시 메모리, 특수 D램, 모바일 D램 등을 생산하고 있다.
윈본드는 지난해 D램 시장에서 매출 9억6500만 달러(약 1조4000억원)를 올리며 시장 5위를 기록했다. 윈본드는 홈페이지에서 “자체적으로 D램과 플래시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대만 유일의 회사”라고 설명한다.
업계에서는 윈본드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반도체 시장 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윈본드의 올 상반기 매출은 제품 믹스로 감소했다”면서도 “올해 회사의 가오슝 팹 가동이 시작되면 생산 능력이 점진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윈본드 역시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올 4분기부터 대만 가오슝의 새로운 팹에 새로운 웨이퍼 용량을 추가할 예정”이라며 “DDR3 출하량은 전체 D램 매출의 30%를 차지하는데, 2024년에는 50%로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 ‘슈퍼 을’ 숨어 있는 제조 장비…ASML부터 램리서치까지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에도 ‘슈퍼 을’ 기업이 많다.
ASML이 대표적이다. ASML은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웨이퍼에 회로를 프린팅하는 기계)를 만드는 회사로, 반도체 장비 시장 2위(점유율 18.1%)를 차지하고 있고 AMAT의 경쟁사다. 네덜란드 벨트호벤에 본사가 있고 1984년 필립스와 ASMI가 합작해 설립됐다.
전체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는 2위지만 ‘노광 장비’ 부문에서는 점유율 90% 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 등이 뛰어든 미세화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반드시 ASML 장비가 필요한 만큼 반도체 기업 중에서도 영향력이 가장 큰 ‘슈퍼 을’로 꼽힌다.
실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유럽 출장 시 ASML 본사를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지난 6월 유럽 출장 당시 ASML 본사를 방문했고 2020년 10월에도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를 살폈다.
ASML은 지난해 186억 유로(약 25조원)의 매출을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한국에서 발생한 매출 비율이 34.46%(62억2300만 유로)에 달한다. 이는 삼성전자가 7나노부터 세계 최초로 EUV 기반 양산을 결정하는 등 초미세 공정 기술 개발에 EUV 장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향으로 관측된다.
램리서치는 시각 장비 점유율 절반이 넘는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 3위 기업이다. 1980년 설립된 미국 기업으로, 시장점유율은 15% 수준이다.
램리서치는 반도체 식각(에칭)·증착·세정 장비 부문 등에 진출했는데, 특히 식각 장비(웨이퍼에 액체 또는 기체의 부식액을 이용해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장비) 부문에서 전 세계 1위다. 업계에 따르면 램리서치의 식각 장비 점유율은 과반이다. 램리서치의 고객사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 등이다.
램리서치는 한국 사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1989년 한국 법인을 설립하고 한국에 들어왔고 2003년부터 반도체 장비 공급망 관리를 위해 소재·부품 현지화를 추진했다.
또한 최근 2년간 램리서치는 한국에서 장비 생산량을 두 배 가까이 늘렸고 지난 4월 경기도 용인에 글로벌 연구·개발(R&D)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활용할 최첨단 R&D센터 ‘램리서치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를 완공했다.
전체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 1위는 따로 있다.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다. 시장 조사 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지난해 AMAT의 점유율은 18.6%다. AMAT의 지난해 연매출은 230억6000만 달러(약 33조원)에 달한다.
그럼에도 반도체 시장의 빅 플레이어는 단연 ‘인텔’과 ‘삼성전자’다. 연간 기준으로 유일하게 두 자릿수 점유율을 확보한 곳이다. 글로벌 시장 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인텔의 점유율은 13.0%, 삼성전자는 12.8%를 차지했다.
인텔의 연매출 규모는 765억6900만 달러(약 109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 역시 752억800만 달러(약 107조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양 사의 매출은 전체 반도체 시장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뒤 이어 SK하이닉스(6.3%), 퀄컴(5.0%), 마이크론테크놀로지(4.9%), 브로드컴(3.6%), 엔비디아(3.5%), 미디어텍(3.0%), 텍사스인스트루먼트(2.9%), 어드밴스트마이크로디바이스(AMD, 2.8%) 등이 상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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