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인 없는 ‘별도 합의서’ 법적 효력 불인정
김앤장의 쌍방대리·백미당 매각 제외·가족 예우 등 모두 ‘기각’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 전경. 사진=한국경제신문
남양유업 지분 매각을 두고 홍원식 회장 일가와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한앤컴퍼니가 벌인 본안 소송 1차전에서 한앤컴퍼니가 웃었다.

한앤컴퍼니는 앞서 세 차례 가처분 소송에 이어 본안 소송 1심에서도 승소하면서 기선 제압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홍 회장 일가는 남양유업뿐만 아니라 외식사업부 ‘백미당’에 대한 경영에서도 손을 뗄 위기에 내몰렸다.

“홍 회장, 계약대로 남양유업 매각해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0부(부장판사 정찬우)는 2022년 9월 22일 한앤컴퍼니가 홍 회장과 가족을 상대로 낸 주식 양도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홍 회장 일가가 한앤컴퍼니와 계약한 금액대로 남양유업 주식을 매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홍 회장 일가는 2021년 5월 27일 한앤컴퍼니에 남양유업 지분 53.1%를 3107억원에 팔겠다는 주식 매매 계약(SPA)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4월 13일 “불가리스 제품이 코로나19 감염을 억제하는 효과를 확인했다”는 허위 사실 주장으로 남양유업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고발당한 뒤 거센 불매 운동과 비난 여론에 휩싸였던 이른바 ‘불가리스 사태’가 매각 결정을 내린 배경이다.

이번 분쟁은 홍 회장 일가가 방침을 바꿔 남양유업을 매각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비롯됐다. 홍 회장 일가는 그해 7월 30일 매각 절차를 완료하기 위한 남양유업 임시 주주 총회에 불참하면서 계약 파기 가능성을 내비쳤고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9월 1일 한앤컴퍼니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당시 홍 회장 측은 계약을 깬 데 대해 “한앤컴퍼니가 매각 대상에서 백미당 제외, 오너 일가에 대한 처우 보장 등 계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계약 조건이 담긴 별도의 합의서가 있었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반발한 한앤컴퍼니는 “계약대로 남양유업 지분을 넘기라”고 요구하며 소송전을 시작했다. 한앤컴퍼니는 그해 8월 홍 회장 측의 변심을 확인한 뒤 재빨리 홍 회장 등을 상대로 한 주식 처분 금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홍 회장의 계약 해지 선언 직후엔 의결권 행사 금지 가처분도 신청했다. 두 가처분 신청이 모두 법정에서 인용되면서 한앤컴퍼니가 법적 분쟁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했다.

홍 회장 측은 한앤컴퍼니의 이 같은 조치에도 파기한 계약을 원상 복귀할 뜻이 없음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다. 오히려 그해 11월 대유위니아그룹에 남양유업을 매각한다고 발표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매각 가격은 3200억원으로 한앤컴퍼니를 상대로 매각을 타진했을 때보다 93억원 비싼 정도였다. 이에 한앤컴퍼니는 곧바로 홍 회장과 대유위니아그룹 간 ‘상호 협력 이행 협약’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역시 법원에서 받아들여졌다.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2021년 5월 4일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에서 ‘불가리스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이 2021년 5월 4일 서울 강남구 남양유업 본사에서 ‘불가리스 사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 기자 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불복한 홍원식 회장…긴 법적 분쟁 예고

홍 회장 측은 본안 소송에서도 계약 해지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1심 재판부는 홍 회장 일가가 주장한 별도 합의서의 존재에 대해 “홍 회장 측에서 작성한 것으로 원고와 피고 모두 날인한 적이 없다”며 “이 문서만으로 계약일 이전에 한앤컴퍼니가 백미당 분사나 홍 회장 일가 처우 문제에 대해 확약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계약서 어디에도 ‘백미당’이나 ‘외식사업부’ 등의 언급이 없다”고도 덧붙였다.

홍 회장 측이 항변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의 ‘쌍방 대리’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홍 회장은 김앤장이 자신과 한앤컴퍼니를 동시에 맡아 남양유업 매매 계약을 진행하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계약을 하도록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앤장이 홍 회장 측을 대리한 것이 아니라 자문한 것으로 봤다. 이 때문에 법에서 금지한 ‘쌍방 대리’를 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홍 회장은 계약 직후 쌍방 자문 사실을 알았을 것이나 즉시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고 변호사에게 추가 질의도 했다”며 “이는 홍 회장 역시 쌍방 자문에 동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홍 회장 측은 1심 패소 후 곧바로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심에서도 “가업으로 물려받은 회사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매도인 권리를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는 주장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앤컴퍼니는 1심 선고 후 홍 회장에게 “남양유업의 경영 정상화가 이뤄지도록 판결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약속한 경영 퇴진과 경영권 이양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2심이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패소한 쪽이 곧바로 상고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회사 경영권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치열한 상황에서 남양유업의 경영이 다시 안정을 찾을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남양유업은 ‘불가리스 사태’에 따른 소비자 불매 운동과 경영권 분쟁 등의 악재로 실적 악화를 겪고 있다.

이 회사는 2022년 상반기 영업 손실 421억원을 기록하며 2020년(767억원)부터 2년 넘게 적자를 이어 가고 있다. 같은 기간 매출은 4690억원으로 2021년 상반기(4705억원)에 다소 못 미쳤다. 현재 추세라면 3년 연속 연간 매출이 1조원을 밑돌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남양유업은 2021년 10월 비상 경영 체제로 전환한 뒤 김승언 경영혁신위원장에게 경영지배인을 맡긴 상태다.


[돋보기]
시장이 원한 것은 주인 교체?…매각 발표 후 급등한 남양유업 주가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된 것과 별개로 홍원식 회장 일가의 남양유업 매각은 회사 주가에 강력한 호재로 작용했다. 한앤컴퍼니에 회사를 매각한다는 발표 직후 2거래일 동안에만 주가가 50% 이상 치솟았을 정도였다.

남양유업은 2021년 5월 31일 유가증권시장에서 전 거래일보다 22.81% 뛴 70만원에 장을 마감했다. 직전 거래일인 5월 28일(29.84%)에 이어 20% 넘게 폭등했다. 주가는 그 후 잠시 주춤하다 6월 말 다시 오르막을 타며 7월 1일 76만원까지 날아올랐다. 매각 발표 1주일 전인 5월 21일(38만5000원)과 비교하면 기업 가치가 두 배 가까이 뛴 셈이다.

이를 두고 주식 시장에선 “그만큼 투자자들이 남양유업 주인 교체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란 해석이 잇따랐다. 남양유업은 ‘불가리스 사태’가 발생하기 훨씬 전인 2013년 대리점을 상대로 한 물품 밀어내기 사태로도 홍역을 앓았다. 당시 이 회사 영업 사원이 대리점주에게 욕설 섞인 폭언을 한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갑질 횡포’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이미 전적이 있던 차에 불가리스 사태가 터지자 홍 회장을 비롯한 남양유업 경영진에 대한 평판은 더욱 떨어졌다. 회사 실적이 나빠지고 있다는 점도 부정적 여론 조성에 한몫했다. 남양유업은 2020년부터 2년 넘게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년 6개월 동안 쌓은 영업 적자만 1966억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식음료 분야 투자에서 성공 경험이 있는 한앤컴퍼니가 새 주인이 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투자자들은 남양유업의 변신 가능성에 ‘베팅’했다는 평가다. 한앤컴퍼니는 2013년 12월 웅진식품을 1150억원에 인수해 5년간 기업 가치를 키워 낸 뒤 2019년 3월 2600억원을 받고 회사를 매각했다.

남양유업에 대한 투자 심리는 홍 회장이 변심한 시기에 또 한 번 드러났다. 홍 회장이 거래 계약 종결을 위한 남양유업 주주 총회에 돌연 불참한 2021년 7월 30일(60만3000원)부터 남양유업 주가는 8거래일 연속 내리막을 타며 8월 10일 53만5000원으로 주저앉았다.

홍 회장이 한앤컴퍼니에 계약 해지를 통보한 9월 1일 이후에도 5거래일 연속 하향 곡선을 그리며 40만원대로 추락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