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울 만큼 뛰어난 인공지능 창작물 늘어날 것…‘어떻게 쓸지’ 정하는 게 인간의 힘

“나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상상 속의 질서와 지배적 구조를 창조해 내는 인류의 독특한 능력을 재검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 그 힘은 뛰어난 사고력과 글쓰기 능력을 가진 일부 작가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 문장을 쓴 주체를 알고 나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인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의 10주년 특별판 서문에 들어간 글의 일부다. 그런데 하라리 교수가 쓴 것이 아니다. 하라리 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인공지능(AI) ‘GPR-3’가 썼다. 이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호모 사피엔스의 고유한 창작 능력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 든다.

GPR-3는 특정 지시를 받고 글을 썼다. ‘하라리처럼 쓰라’는 주문이었다. GPR-3는 이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능력까지 보여 줬다. 여러 문장으로 이뤄진 하나의 글을 일관성 있게 완성했다. “국민 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상상 속의 질서 덕분에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전례 없는 번영과 복지도 이뤘다. 하지만 그 상상 속의 질서가 오늘날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있다.”

자신을 대필한 AI 작가의 솜씨를 본 하라리 교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는 “글을 읽는 동안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문화·예술과 기술의 공생 관계는 끝나 가는 것일까. 인간이 발전시키고 활용해 온 기술이 언젠가는 인간의 창작 활동을 잠식하게 될까.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 / 사진=한국경제신문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 / 사진=한국경제신문
상상력을 구현하고 경계를 허무는 기술
문화·예술과 기술은 오랜 시간 시너지를 내며 함께 발전해 왔다. 인쇄술 덕분에 책이 만들어지고 출판 산업이 발전했으며 영상·공연 기술이 고도화되며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기술이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무한한 상상력을 구현하고 이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펼쳐 보일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된 것이다.

기술을 적극 활용해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는 콘텐츠도 탄생했다. 13년 전 개봉돼 현재까지도 세계 박스오피스 1위 기록을 유지하고 있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아바타’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3D 기술의 발전이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오는 12월 개봉될 신작 ‘아바타 : 물의 길’에선 더욱 진일보된 3D 기술을 펼쳐 보일 예정이다.

‘아바타’에 적용된 기술은 스토리가 주는 감동, 그 이상의 특별한 감정과 체험을 하게 한다. 신작은 물을 전면에 내세운다.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18분짜리 푸티지 영상(특정 장면을 담은 영상)만 봐도 극장 전체가 거대한 바다로 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물결의 흐름과 파도의 높낮이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몸을 맡기고 유영하는 듯한 착시 효과까지 든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허구와 실재,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경험의 제공은 문화·예술 안에 기술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최종 목표다. 많은 사람들이 상상 속 세계에 들어가 극도의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모든 창작자들이 원하고 꿈꾸는 것 자체다. 그리고 기술은 이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기술이 문화·예술에 접목돼 시간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인물이나 기억을 다시 소환해 내는 방송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된다. 이 프로그램들은 김광석, 김현식, 그룹 ‘거북이’의 터틀맨 등 세상을 떠난 가수들의 모습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했다. 그들이 눈앞에서 살아 숨쉬는 듯 활발히 움직이며 노래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과거와 현재의 단절이 극복되고 하나로 연결되는 기분이 든다.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커다란 장벽에도 K팝이 국경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것도 기술의 힘이 컸다. 이전엔 K팝 아티스트들이 해외 투어 공연을 통해 현지 팬들을 직접 만나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가상현실(VR)·증강현실(AR)·확장현실(XR) 등 다양한 첨단 기술을 활용한 멋진 온라인 공연을 선보이며 새로운 출구를 찾아냈다. 지금도 오프라인 공연과 온라인 공연을 병행하며 해외 팬들과의 소통을 이어 가고 K팝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이처럼 문화·예술과 기술이 결합하고 함께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강력한 창작 욕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각 특수 효과(VFX)를 통해 멋진 우주를 표현해 보이겠다는 한국 창작진의 의지로 탄생한 것이 한국의 첫 우주 SF영화 ‘승리호’였듯이 말이다. 그렇게 기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구현해 줄 가장 강력한 효과적인 수단이 됐다.
창작의 중심축이 바뀐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차원의 기술 앞에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사피엔스’의 서문을 쓴 GPR-3와 같은 AI의 등장과 발전이 또 다른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미술계에서 일어난 사건도 그런 의미에서 더욱 화제가 됐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람회 미술대회’의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은 인간이 아닌 ‘미드저니’라는 AI가 만든 작품이다. 미드저니의 우승 소식이 전해지자 미술계 사람들은 크게 긴장했다. 심지어 미드저니에 텍스트로 지시를 입력한 사람조차 화가가 아니었기에 더욱 논란이 커졌다. 그는 미술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는, 게임 기획자인 제이슨 M. 앨런이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지시를 입력하자 미드저니는 단 몇 초 만에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우승 결과를 받아든 앨런 기획자는 이렇게 말했다. “AI가 이겼고, 인간은 패배했다.”

그의 주장대로 정말 인간이 패배한 것일까. 아직은 아니라고 해도 인간의 패배가 머지않은 것일까. AI의 연이은 성과에 위기론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우리는 상상하고 사고하며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믿어 왔다. 하지만 AI가 이제 그 영역을 침범하며 창작 주체로서의 인간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는 생각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인간과 AI의 창작 비율 자체만 보면 이 생각은 결코 기우가 아니다. 인간은 AI에 특정 지시만 내리는 역할, AI는 이에 맞춰 작품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창작 비율을 따지면 AI가 훨씬 앞선다. 창작 비율의 역전은 곧 중심축의 이동을 의미한다. 하라리 교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힘의 중심이 인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AI로 인해 창작자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만의 아우라가 붕괴되거나 침해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아우라는 독일 철학가 발터 벤야민이 제시한 개념으로, 다른 것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예술 작품의 고고하고 독특한 본질과 특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최근 만들어진 한 이미지는 원본이 가진 아우라에 균열을 냈다. 지난 10월 AI 프로그램인 ‘달리(DALL-E)’가 선보인 작품 얘기다. 달리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재해석해 이미지로 만들었다. 원작처럼 검은 배경 속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소품이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집 한복판에 서 있는 소녀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낯설고 생소한 배경과 그 속에 덩그러니 배치된 소녀의 모습에선 원작이 가진 매혹적이고 신비로움을 찾아보기 힘들다.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인 ‘달리(DALL-E)’가 그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미지와 텍스트를 입력하면 화풍, 그림자, 빛이 들어오는 방향 등을 분석한 뒤 주변 배경을 알아서 만들어준다. 오픈AI 제공
인공지능(AI) 이미지 생성 프로그램인 ‘달리(DALL-E)’가 그린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미지와 텍스트를 입력하면 화풍, 그림자, 빛이 들어오는 방향 등을 분석한 뒤 주변 배경을 알아서 만들어준다. 오픈AI 제공
그럼에도 AI 기술은 더욱 발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화·예술에 활용되는 사례도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희망은 과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카메라가 나왔지만 그림은 계속 그려지고 있고 TV가 나왔지만 라디오는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그 무엇보다 AI의 폭발적인 힘을 제어할 힘이 인간에게 있다는 점에서 끝까지 희망을 가져볼 만하다. 하라리 교수 역시 “AI를 비롯한 혁신적인 기술을 어떻게 개발하고 사용할지, 그 틀을 결정할 힘을 (인간이) 아직도 보유하고 있다. 이 힘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문화·예술과 기술이 공생할 수 있는 윤리적·법적인 제한과 권리를 규정하고 지켜나갈 힘은 여전히 인간이 온전하게 갖고 있다.

앞으로 우리는 AI 프로그램에 어떤 지시를 입력하게 될까. 그동안은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이젠 보다 신중해져야 할 것 같다. 상상력과 주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 가며 말이다. GPR-3가 ‘상상 속의 질서가 오늘날 우리를 분열시키려고 하고 있다’고 썼듯이 기술 만능주의로 만들어진 또 다른 상상 속의 질서가 우리를 분열시키지 않도록….

김희경 한국경제 문화부 기자,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