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상승 대안 투자로 채권 인기, ‘신규’ ‘중소액’ 투자자 유입 활발

[스페셜리포트]
동학 개미? 이제는 ‘채권 개미’의 시대다 [채권 개미들①]
“채권 시장 속 개인 투자자는 주식 시장의 ‘개미(개인 투자자를 비유하는 말)’와 비교하면 ‘하루살이’다.” 10년 전 SK증권의 한 애널리스트는 채권 시장의 개인 투자자를 빗대 이같이 말했다.

하루살이, 당시 개인 투자자들의 채권 거래 규모가 0.16%에 불과해 주식 시장의 개인 투자자(24.1%)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랬던 채권 시장의 하루살이가 달라졌다. 2020~2021년 ‘동학개미 운동’으로 주식 시장을 끌어올렸던 주역인 개인 투자자들이 이제는 채권 시장에 달려들고 있다. 글로벌 약세장이 지속되며 증시 매력도가 떨어진 것은 물론 레고랜드·흥국생명 사태로 채권 시장의 자금줄이 마르면서 우량 채권이 더 높은 이자 수익을 주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는 ‘수익’과 ‘안전’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국고채·회사채가 더 이상 자산가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큼 다가온 채권 투자의 시대,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 임재윤(37) 씨는 11월 초 자녀들 계좌로 2019년 9월 발행돼 잔존 만기 17년인 20년 만기 국고채 19-6을 샀다. 이 국채의 표면 금리는 1.125%이지만 수익률(유통 금리)은 4.1% 수준이어서 가격은 6400원대다. 액면가 1만원을 한참 밑도는 가격이다. “국채 가격이 올랐을 때 팔아도 거래 차익을 얻을 수 있고 혹여 자본 차익을 얻지 못하더라도 만기 시 이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적금보다 이득일 것 같더라고요. 저는 삼성전자 주식 대신 국채를 물려주려고요.”

채권 시장에 ‘개미’들이 몰려들고 있다. 2020년 ‘동학개미’가 등장했다면 2022년에는 ‘채권개미’가 등장한 것이다.

레고랜드·흥국생명 사태로 채권 시장에 암흑기가 왔지만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황금 같은 투자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채권 시장의 자금줄이 마르면서 우량 채권이 더 높은 이자 수익을 주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용이 낮은 기업들은 금리를 올려도 채권이 팔리지 않아 자금 경색을 호소하지만 개인에겐 우량 채권을 매수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게 증권업계의 평가다.

지표도 이를 입증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2022년 10월 16일부터 11월 16일까지 1개월간 장외 채권 시장에서 순매수액은 24조606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6.2% 감소했다. 작년과 달리 과도한 긴축으로 금리가 상승하며 안전 자산인 채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근 레고랜드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채무 불이행 해프닝과 흥국생명발 콜옵션 조기 상환 미이행 등의 여파로 안전 자산으로 여겨지던 채권 시장에 불안감이 감돌면서 매수세가 주춤한 영향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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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의 분위기는 달랐다. 지난 1개월간 은행, 자산 운용, 보험, 국가·지자체의 채권 순매도가 이어지는 동안 개인은 순매수에 나섰다. 순매수 규모만 2조4565억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가파른 성장세다. 2021년 10월 15일부터 11월 15일까지 1개월간 채권 순매수액은 4016억원에 그쳤다. 1년 새 개인 투자자의 순매수 거래 자금이 6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김상훈 신한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가장 눈에 띄는 주체는 단연 개인”이라며 “타 주체들과 비교될 정도로 잔액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인 투자자들의 자금이 채권으로 몰린 것은 올 상반기부터다. 금리 상승에 따른 대안 투자 상품으로 채권이 떠오르며 개인 투자자들의 매수세가 몰렸다. 레고랜드 등 최근 한 달 간의 이슈 외에도 개인 투자자의 장외 채권 월평균 거래 대금은 2021년 약 1조1000억원에서 2022년 1월부터 9월까지 약 2조원으로 83.7% 증가했다. 전체 거래 대금 중 개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배 이상 높아졌다.

개인 투자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신규’ 투자자, ‘중소액’ 투자자의 유입이 활발했다. KB증권이 자체 분석을 통해 올해 KB증권에서 채권을 매수한 고객 총 1만4289명을 조사한 결과 이 중 약 63.5%가 기존 채권 경험이 없거나 올해 처음 계좌를 개설한 신규 고객으로 나타났다. 채권 투자의 벽이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는 점에 비춰 보면 상당한 규모다. KB증권 관계자는 “주식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금리의 채권에 투자하는 것이 위험 대비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어 신규 투자자 비율이 높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령층은 4050대가 과반을 이뤘다. 40대 이상 연령층 고객의 채권 보유가 81.9%다. 그중에서도 채권을 가장 많이 보유한 연령층은 50~60대로 51.8%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브라질 채권과 외화전단채 비율이 높았다. 40대는 일반 채권 보유 비율이 높았고 20~30대 저연령층 개인 고객은 신종자본증권·달러채권 중심의 거래 양상을 보였다.

KB증권에서 채권 자산을 보유한 고객 수도 지난해 말 약 2만 명에서 올해 9월 말 약 2만9000명으로 45% 증가했다. 증가한 고객 중 약 63%는 총자산이 ‘1억원 미만’인 고객으로 나타났다. 고액 자산가의 투자 상품이던 채권 투자의 고객층 저변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올 초부터 시작된 개인의 채권 매수 흐름은 최근 위축된 기관투자가들의 매수세를 개인들이 빠르고 크게 채우고 있다는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최근 개인 투자자들의 채권 매수 흐름이 채권 시장의 자금 경색 해소에도 기여하고 있다”며 “마치 2020년 상반기에 외국인·기관들이 쏟아낸 물량을 동학개미들이 받아 주가 하락을 막아 냈던 것처럼 지금은 채권개미들이 고금리·고신용도 채권에 투자하면서 채권 시장의 유동성 경색에 단비같은 자금을 투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비과세 매매 차익에 고액 자산가 몰려 개인들은 왜 채권으로 눈을 돌렸을까. 가장 큰 이유는 금리다. 표면 금리(쿠폰금리), 즉 채권에서 지급하기로 약정된 금리가 연 4% 수준으로 올라오면서 개인의 뭉칫돈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금리가 인상되면 시장에서 거래되는 채권 가격은 내려간다. 신규 발행 채권의 표면 금리가 기존 채권보다 높기 때문이다. 예·적금과 다르게 채권은 금리가 변동돼도 처음 약정된 표면 금리가 변동되지 않기 때문에 금리가 더 높은 신규 채권에 수요가 몰리게 된다. 신규 발행 채권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채권 가격이 하락하게 된다. 이때 투자자들은 가격이 떨어진 채권을 구매해 매매 차익을 노리거나 더욱 높은 이자 수익을 얻기 위해 신규 발행 채권을 구매한다.

김지만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채권 금리가 전반적으로 크게 상승하면서 투자 매력이 높아졌고 동일 금리를 가정할 때 예·적금 대비 적은 세금으로 실질적인 이자 소득이 더 크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금은 이자, 주식은 배당과 매매 차익이라면 채권은 ‘이자+알파(α)’, 즉 ‘이자’와 ‘매매 차익’으로 수익을 얻는다. 채권은 매매 후 가격이 오르면 팔아 매매 차익을 취할 수 있고 가격이 제자리거나 내리면 만기까지 보유해 확정된 이자만 챙길 수도 있다.

채권은 이자 수익에 대해서만 세금이 발생하고 채권을 매매해 발생한 자본 차익에 대해서는 현재 비과세다. 최근에는 이 비과세를 활용해 고액을 투자하는 슈퍼 개미들도 늘었다. 2020~2021년 시중 금리가 낮았을 때 발행된 ‘저쿠폰 채권’은 최근 시중 금리 상승으로 채권 유통 시장에서는 대부분 발행 당시 가격인 1만원보다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데 만기에는 발행 가격인 1만원으로 상환되므로 만기까지 보유하면 비과세 수익인 매매 차익을 얻을 수 있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지난 8월까지 30억원 이상 초고액 자산가의 저쿠폰 채권 매수 금액은 전년 동기 대비 6.4배 급증했다. 한국 채권은 표면 금리 1% 내외 국채에 주로 집중됐다. 상품에 따라 고객의 평균 매수 금액은 22억원을 기록했다. 특정 채권은 1인당 평균 250억원의 투자가 몰리기도 했다. 삼성증권 관계자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라면 발행 금리가 낮은 저쿠폰 채권을 매수하면 절세 효과를 기대하면서 실질 수익률을 높일 수 있어 초고액 자산가들은 저쿠폰 채권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채권 시장의 최근 불안정도 오히려 개미들이 올라타기 좋은 요건을 만들었다. 회사채 시장의 경색이 극에 달하면서 초우량 등급(‘AAA’) 공기업 채권인 한전채 3년물(16일 5.410%)이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AA-’급 3년물 5.35%)보다 이자를 더 주는 상황이다. 김지만 애널리스트는 “개인들의 채권 투자는 절대 금리 상승으로 기존의 ‘A’ 등급에서 ‘AA’ 등급 투자로 확대됐다”며 “이에 따라 개인들은 우량 크레딧 채권 투자로 수익성과 안정성 등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미국 금리 인상 기조가 유지되는 만큼 채권에 투자하기 좋은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제롬 파월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11월 2일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 회의를 마친 뒤 “금리 인상 중단에 대해 생각하거나 언급하는 것은 매우 시기상조”라며 높은 수준의 기준 금리를 오래 유지할 방침인 것을 암시했다.

전문가들은 채권 투자의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고 말한다. 채권 투자가 보다 보편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 애널리스트는 “기존 전통적인 예금 위주의 투자에서 우량 크레딧 채권을 통해 수익성과 안정성에 대한 투자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개인들의 채권 투자는 주요한 투자 수단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