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흔의 쉬운 경제]

[편집자 주 = 매일 수많은 경제 기사가 쏟아집니다. 기사를 읽고 나면 경제 이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더’ 들어가면 잘 모르는 경제 지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작은 시도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복잡한 경제 이슈와 그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경제 지식부터 공부해 보기로 말입니다. 때로는 경제학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한 대목을, 때로는 경제학에 큰 획을 그은 경제학자들과 같은 사람의 이야기로 ‘오늘의 경제’를 공부해 보는 건 어떨까요. ]

늦은 저녁, 고된 업무를 마치고 집에서 느긋하게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길 즐기는 편입니다. 최근 즐겨 보기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 하나 있습니다. tvN의 ‘서진이네’입니다. 6년 전 ‘윤식당’부터 손발을 맞춰 온 출연진은 새로운 시작을 맞아 승진에 성공(?)했습니다. 이사였던 이서진은 ‘사장’으로, 정유미는 이사로 승진했죠. 그런데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임원이 된 데 기뻐한 정유미에게 사장 이서진은 말합니다. “너 그냥 이사 아니라 '등기 이사'야. 문제 생기면 다 네 책임이라고.”
임원이라고 다 똑같은 임원이 아냐…”등기이사, 문제 생기면 다 책임져야 한다고?”[이정흔의 쉬운 경제]
한국 대기업 총수, 4명 중 1명 ‘비등기 이사’

그저 웃으며 내뱉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뼈가 있는 말입니다. 실제 ‘이사’라고 다 똑같은 이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해 우선은 우리가 일하고 돈을 버는 회사가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는지부터 차근차근 짚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일하는 대부분의 회사는 ‘주식회사’입니다. 주주가 출자한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를 말합니다.

주식회사를 구성하고 있는 3개의 주요 기관은 ‘주주 총회’와 ‘이사회’ 그리고 ‘감사’입니다. 회사의 주인은 그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주주들입니다. 하지만 주주들이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이때 주주들을 대신해 회사의 경영을 도맡아 직접 운영하는 기관이 ‘이사회’입니다. 이 이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이사’입니다. 주주들은 대신 정기적으로 ‘주주 총회’를 개최해 회사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게 되죠. 회사를 직접 이끌어 갈 이사를 선임하는 것도 이 주주 총회가 책임지고 있는 주요 의사 결정 사항 중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는 회사의 경영을 감시하는 업무를 도맡고 있는 기관이죠.

다시 ‘이사회’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한국에서는 회사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주식회사는 3명 이상의 이사를 둬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금 10억원 미만이면 1명 또는 2명의 이사를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깐, 2~3명의 ‘이사’만으로 회사의 경영을 모두 이끌어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보다 많은 숫자의 ‘임원’들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장·사장·전무·상무·이사와 같은 직함을 달고 있는 분들이죠. 쉽게 말해 회장이나 사장은 기업 내에서 맡고 있는 역할에 따른 ‘직함’이라면 대표이사나 전무이사는 ‘상법상 명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수장 역할을 맡고 있는 대표이사는 ‘이사회의 대표’라는 뜻이죠.

여기서 ‘등기 이사’와 ‘비등기 이사’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회사 내의 수많은 임원들 중에서도 기업의 최고 의결 기관인 ‘주주 총회를 거쳐 선임된’ 이사들은 법인 등기부등본에 ‘등기’해야 합니다. 모든 기업들이 갖고 있는 법률상 의무죠. 이렇듯 회사 등기부등본에 이름을 올린 임원들이 등기 이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비교해 ‘비등기 이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하지 않기 때문에 상법상 이사가 아니고 이사회에 참석할 권한이 없죠.

사실 ‘등기 이사’와 ‘비등기 이사’는 회사 내 지위와 업무 영역이 거의 동일합니다. 하지만 법률상 책임의 무게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등기 이사는 이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회사의 주요 경영 전략 등에 밀접하게 관여합니다. 이 때문에 이사회에서 결의된 회사 경영상의 주요 결정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면 등기 이사들은 자신들의 결정에 대해 회사와 ‘연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은 재벌 기업들의 책임 경영을 얘기할 때 ‘등기 이사’인지 여부가 자주 언급되곤 합니다. 오너 일가가 등기 이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경영 전면에 나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가 지난해 8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대기업 총수 4명 가운데 1명은 이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비등기 이사(미등기 임원)’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회사의 주요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전문 경영인보다 수십 배나 많은 연봉을 받고 있음에도 비등기 이사로서 법적인 책임을 피하려는 ‘꼼수’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등기 임원 복귀 불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이 회장은 2019년 10월 사내 이사 임기를 종료한 뒤 재선임 절차를 밟지 않았습니다. 당시 박근혜 정부 국정 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이 진행 중이었던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습니다. 지난해 8·15 특별 사면에 이어 10월 회장직에 취임했지만 아직까지 ‘무보수 미등기 임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책임 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올 3월 주주 총회를 통해 ‘등기 임원 복귀’를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부당 합병과 분식 회계 등의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을 고려해 최종적으로 주총 안건에서 빠진 것입니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