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연줄 찾고 북미 대관에 힘 싣는 재계…미국 로비 총력전

[비즈니스 포커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4월 12일(현지 시간) 삼성전자와 인텔 등을 초청해 ‘반도체 공급망 화상 회의’를 열고 실리콘 웨이퍼를 흔들며 반도체 공급 확대를 위한 투자를 당부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4월 12일(현지 시간) 삼성전자와 인텔 등을 초청해 ‘반도체 공급망 화상 회의’를 열고 실리콘 웨이퍼를 흔들며 반도체 공급 확대를 위한 투자를 당부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
한국의 기업들이 미국 대통령과 정계 인사 영입에 발 벗고 나서며 북미 대관 업무를 강화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칩스법), 바이오 행정명령 등 미국 내 생산 제품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자국 내 첨단 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미국 중심의 보호무역주의 정책 기조와 정치적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다.

한화, 美 전직 관료 스카우트

한화그룹은 미래 먹거리인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중심으로 대관 업무에 힘을 싣고 있다. 최근 한화큐셀 수석부사장 겸 북미대관담당 총괄로 대니 오브라이언 폭스코퍼레이션 수석부사장을 영입했다.

오브라이언 수석부사장은 미국 상원에서 수석 고문으로 재직하며 당시 상원의원이던 조 바이든 대통령과 로버트 메넨데스 상원 외교위원장의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공공 정책 부문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다. 바이든 대통령이 부통령으로 출마한 2008년 대선 캠프에선 핵심 고문 역할도 맡았다.

한화가 오브라이언 수석부사장을 영입한 이유는 미국 정부의 정책 기조가 한화솔루션의 북미 사업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국은 IRA가 본격적으로 발효된 2023년부터 자국 내 태양광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세액 공제 등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한화솔루션은 조지아 주에 3조2000억원을 투자해 북미 최대 규모의 태양광 통합 생산 단지인 ‘솔라 허브’를 구축하고 있다. 증권가에선 한화솔루션의 IRA에 따른 세제 혜택이 10년간 누적 8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한화큐셀의 미국 텍사스주 168MW급 태양광 발전소. 사진=한화솔루션 제공
한화큐셀의 미국 텍사스주 168MW급 태양광 발전소. 사진=한화솔루션 제공
한화에너지는 송용식 전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조정실 혁신행정담당관(과장)을 대관 업무 담당 전무로 영입했다. (주)한화는 에드윈 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센터 회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퓰너 회장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친분이 두텁다. 헤리티지재단은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연구 기관으로 브루킹스연구소와 함께 미국 정가를 이끌어 가는 양대 싱크탱크로 꼽힌다. 미국의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1981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헤리티지재단이 제시한 ‘작은 정부’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워싱턴 정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앞서 삼성전자는 2022년 2월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를 북미법인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삼성전자는 보도 자료를 통해 그가 입법, 규제 동향과 정책을 기업·비즈니스 전략에 결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삼성전자 북미법인에 합류하기 전 미국 보잉 부사장, 유튜브 아시아·태평양지역 정책 총괄 등을 역임했다. 2022년 5월 바이든 대통령의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방문에 동행하기도 했다.

한국의 반도체·배터리·자동차 기업들은 갈수록 거세지는 미국의 통상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 네트워크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SK·현대차·LG 등 4대 그룹 모두 워싱턴D.C. 현지 사무소를 설립한 상태다.

LG그룹은 4대 그룹 중 가장 늦게 워싱턴D.C. 사무소를 설립하며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공동 대표로 영입했다. 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들이 미국 현지에 공장을 짓고 현지 기업과 합작도 늘어나는 데 따른 것이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2021년 1월 9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언론 브리핑을 통해 '반도체 기업 자료 제출'을 언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2021년 1월 9일(현지 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언론 브리핑을 통해 '반도체 기업 자료 제출'을 언급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IRA·반도체법 본격화, 대미 로비액도 역대 최대

삼성·SK·현대차는 2022년 미국 정·관계 로비에 역대 최고 금액을 지출했다. 미국 정부의 입법, 규제 동향을 살피고 행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자사 이익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기 위해서다.

미국 책임정치센터(CRP)가 운영하는 로비 자금 추적 사이트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그룹(삼성전자·삼성반도체·삼성SDI 미국법인)은 2022년 미국 로비 자금으로 579만 달러(약 76억원)를 썼다. 전년(372만 달러·약 48억원)보다 약 56% 증가한 수치다. 등록 로비스트도 32명에서 53명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

삼성은 미국 혁신 경쟁법(USICA)에 가장 많은 로비 자금을 쓴 것으로 분석됐다. 미국 혁신 경쟁법은 미국의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 확대와 미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 등 미국 경쟁력을 극대화해 중국의 기술 굴기에 대응한다는 취지다.

이 법안에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이 보조금 수혜를 볼 수 있는 반도체지원법이 포함돼 있다. SK하이닉스(SK하이닉스 미국법인·솔리다임)도 전년(368만 달러·약 48억원)보다 43% 늘어난 527만 달러(약 69억원)를 지출했다. 두 그룹의 대미 로비 자금이 500만 달러를 넘은 것은 2022년이 처음이다.

현대차그룹(현대차·슈퍼널·현대제철·기아 미국법인)은 2022년 역대 최고 금액인 336만 달러를 로비 자금으로 썼다. 이 자금은 미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IRA 관련 활동 등에 쓰였다.

4대 그룹 중 LG그룹(LG화학·LG에너지솔루션)이 지출한 로비 금액만 감소했다. 109만 달러를 대미 로비 활동에 집행했는데 이는 전년(172만 달러)보다 37% 감소한 것이다. 4대 그룹의 주요 로비 대상 기관은 백악관·상원·하원·상무부 등이었다.

삼성·SK·현대차·한화는 미국의 3대 싱크탱크 중 하나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도 수천만~수억원대의 기부금을 후원해 고액 기부자 명단에 올랐다. 미국 워싱턴의 주요 싱크탱크는 입법·사법·행정·언론에 이어 제5 권력으로 불릴 정도로 정책 결정 과정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해 주요국의 대미 로비 창구로도 활용되고 있다.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반도체법 관련 보조금의 의회 통과를 위해 2022년 미국과 외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집행한 로비 금액은 5900만 달러(약 768억원)로 전년(3600만 달러)보다 64% 늘었다.

IRA·반도체법 여파에 한국 등 외국 기업들이 대미 로비 지출액을 앞다퉈 늘리면서 미국 로비 업체들은 기록적 수익을 올렸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이들 업체가 2021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수익이 19억2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들은 1995년 제정된 로비활동공개법(LDA)에 따라 관련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픽=배자영 기자
그래픽=배자영 기자
146억원 썼는데 독소 조항 못 막아

미국 상무부는 2월 28일부터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기업에 지급하는 총 390억 달러(약 50조원) 상당의 보조금에 대한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더 많은 보조금을 확보하기 위한 미국·외국 기업들의 로비 경쟁이 더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로비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투입한 금액 대비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나온다. 2022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집행한 대미 로비 자금 총 지출액은 146억원에 달한다. 막대한 로비 자금을 썼는데도 보조금의 독소 조항은 피하지 못했다.

미국 반도체법이 규정한 투자 보조금을 받게 되면 초과 이익 환수, 재무 정보 공개, 첨단 반도체 시설 접근권 등 독소 조항으로 인해 경영권 침해와 영업 비밀 노출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또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이 보조금을 받으면 이후 10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 상무부가 3월 21일(현지 시간) 공개한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의 세부 규정안에 따르면 첨단 반도체의 경우 생산 능력을 5% 이상 확장하지 못하게 하고, 이전 세대의 범용(legacy) 반도체는 생산 능력을 10% 이상 늘리지 못하게 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현재 중국에서 생산하는 반도체는 첨단 반도체에 속한다.

산업계는 반도체법의 국가 협상력을 높여 미국 의회가 IRA 법안을 통과시킨 뒤에야 뒷북 대응에 나섰던 잘못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외교부가 미국 의회 관련 사항, 법안이나 제도에 대한 자문을 받기 위해 2022년 로비 업체 5곳과 계약하고 23억원의 예산을 편성했지만 한국의 자동차 수출에 악재가 되는 IRA 관련 내용을 사전에 전혀 파악하지 못해 이 법안이 미 상원을 통과하기 나흘 전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방한 때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의회에서 법안 수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골든타임을 한국 정부가 놓쳤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기업들은 미국 의회와 연방 정부를 상대로 한 로비 활동을 각개전투로 벌일 계획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외교력에 기댈 수만은 없는 상황이지만 정부의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미국 의회와 연방 정부를 상대로 한 자체 로비 활동을 이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