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멍완저우 직접 DX 비전 선포…자주적 결정 위한 비상장 체제 여전히 고수

[글로벌 현장]
화웨이 창업자의 장녀로 순환회장에 오른 멍완저우.(사진=연합뉴스)
화웨이 창업자의 장녀로 순환회장에 오른 멍완저우.(사진=연합뉴스)
세계 1위 통신 장비 업체인 중국 화웨이가 산업 현장의 디지털 전환(DX) 지원을 새로운 주력 사업으로 제시했다. 미국의 전방위 제재에 첨단 반도체 조달이 막힌 가운데 제품보다 기술과 노하우로 승부하겠다는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화웨이 창업자의 장녀로 순환회장에 오른 멍완저우가 최근 직접 DX 지원 비전을 발표하며 눈길을 끌었다.

공식 데뷔한 후계자 멍완저우

멍완저우 순환회장은 4월 19일 광둥성 선전 본사에서 개막된 ‘화웨이 애널리스트 서밋(HAS) 2023’ 기조연설에서 이런 비전을 발표했다. 멍 순환회장은 4월 1일 6개월 임기의 순환회장에 올랐다. 화웨이는 창업자인 런정페이 최고경영자(CEO)와 3명의 부회장으로 구성된 순환회장이 함께 경영하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올해로 20회를 맞은 HAS는 런 CEO의 큰딸인 멍 순환회장의 공식 데뷔 무대로 주목받았다. 멍 순환회장은 2010년부터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맡아 왔다. 그는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위반한 혐의로 캐나다에서 3년 가까이 가택 연금됐다가 2021년 9월 석방됐고 지난해 4월 순환회장단에 합류했다. ‘항미의 아이콘’으로 국민적 지지를 받으며 올해 80세가 된 런 CEO의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다.

멍 순환회장은 “DX가 모든 산업 영역의 블루오션으로 떠올랐다”며 “화웨이는 통신·컴퓨팅·클라우드 등의 분야에 지속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DX는 산업 현장에 사물인터넷(IoT)·빅데이터·인공지능(AI)·클라우드 등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활동이다. 화웨이가 DX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통신 장비 등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접목한 종합 솔루션 제공자로 변신하겠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미국 IBM, 독일 지멘스 등 DX 부문 선두 주자가 화웨이의 경쟁자로 꼽힌다.

화웨이는 통신 장비로 시작해 스마트폰·스마트카·클라우드 등으로 영역을 확장해 왔다. 중국 기업으로는 드물게 내수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시장에 진출해 통신 장비 1위, 스마트폰 2위까지 올랐다. 하지만 2018년 본격화한 미국의 전방위 제재로 첨단 반도체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주력 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

화웨이와 계열사들은 현재 미국 정부의 승인 없이는 미국의 기술이 들어간 반도체와 관련 소프트웨어·장비 등을 구입할 수 없는 수출 통제 대상이다. 이에 중저가 스마트폰 사업부를 선전시정부에 매각하는 등 사업 재편을 진행 중이다. 소비자 부문은 헬스케어와 스마트카 중심으로 개편했다. DX 사업은 기존 역량을 집결한 새로운 먹거리다.

미국의 제재 아래서도 화웨이는 통신 장비에서 여전히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델오로에 따르면 화웨이는 지난해 기준 글로벌 통신 장비 시장점유율 31%로 2위 노키아(17%)를 크게 앞서고 있다. 미국과 유럽 기업들이 주목하지 않는 동남아시아와 중남미·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을 중저가 맞춤형 제품으로 공략한 결과다.

화웨이는 지난해 1615억 위안(약 31조1400억원)을 연구·개발(R&D)에 투입했다. 전체 매출의 25.1%에 달한다. 금액과 비율 모두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제재를 R&D로 뚫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화웨이는 지난해 전년 대비 0.9% 증가한 6423억 위안의 매출을 올렸다. 2021년 28.6% 급감한 매출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다만 지난해 순이익은 69% 감소한 356억 위안에 그쳤다.

화웨이는 제재 이후 78종의 핵심 기술을 선정해 독자 개발에 나섰다. 최근 발표한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포함해 총 12종의 기술 자립에 성공했다. 또 자사 제품의 핵심 부품 1만3000여 개를 국산으로 교체하고 회로기판 4000여 종을 재설계하기도 했다.

화웨이는 4월 20일 회사의 정보기술(IT) 운영 체제를 독자 개발한 ‘메타 ERP’로 교체했다고 발표했다. ERP는 생산·판매·인사·재무 등 기업의 전 영역에 퍼져 있는 자금·인력 정보 등 경영 자원을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독일 SAP와 미국 오라클이 세계 1·2위를 달린다. 화웨이는 오라클의 ERP 시스템을 써 왔다. 하지만 오라클은 화웨이가 미국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가자 2019년부터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중단했다.

화웨이가 미국의 수출 통제에 대한 대안을 마련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의 제재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타오징원 화웨이 품질·기업운영·IT부문 사장은 “우리는 3년 이상 지난 낡은 ERP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봉쇄를 돌파했고 살아 남았다”고 강조했다.
기술력으로 미국 제재 ‘정면 돌파’ 선언한 화웨이[글로벌 현장]

유럽 도시를 본뜬 화웨이 R&D센터

화웨이는 본사가 있는 선전, 선전의 이웃 도시인 둥관 등에 대규모 R&D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기자가 최근 방문한 둥관 R&D센터는 런 CEO의 R&D에 대한 집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설이다.

약 125만㎡의 부지에 2만5000여 명의 R&D 인력이 근무하는 이 시설은 2018년부터 가동됐다. 유럽의 도시 이름을 딴 12개 단지가 있고 각 단지는 10여 개의 건물로 구성된 하나의 R&D 본부다. 통신·클라우드·소프트웨어 등 화웨이 주력 사업의 연구가 대부분 이곳에서 진행된다.

단지들에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영국 옥스퍼드, 이탈리아 볼로냐 등 각국에서 대학이 가장 먼저 들어선 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각 단지에는 도시의 성이나 대학 등 그 지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물과 정원이 들어서 있다. 각 단지 사이는 빨간색 전기 트램이 운행된다. 단지 위로 자동차가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직원들은 트램을 주로 활용한다.

회사 관계자는 “런 CEO는 언제나 직원들에게 유럽과 미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며 “각 단지에 유럽의 연구 중심 도시 이름을 붙인 것도 연구를 중시하는 문화를 다지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웨이의 작년 말 기준 전체 직원 수는 20만7000여 명이다. 이 가운데 55%인 11만4000명이 연구 인력이다. 본사가 있는 선전에는 둥관보다 더 큰 132만㎡ 규모의 연구소가 있다. 상하이에선 스마트카 연구소를 별도로 운영한다.

화웨이의 특징 중 하나는 1987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직원들이 주식(소유권)을 갖는 비상장 회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화웨이는 이런 독특한 구조 때문에 종종 “중국 공산당이 소유한 기업”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또 소유 구조가 어떻든 공산당과 인민해방군 관련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공시 의무가 있는 상장사가 되는 것을 기피하는 것이란 추측도 있다.

상장하면 자본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쉬워진다. 또 비상장사에 비해 공신력이 올라가는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화웨이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던 시절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의 상장 권유 내지는 압박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비상장 상태를 유지하는 이유로 화웨이 관계자는 ‘자주적 의사 결정’을 제시한다. “상장사가 되면 주주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연 매출의 25%를 R&D에 투자하는 식의 결정은 하기 어려워진다”는 설명이다.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 이전까지는 통신 장비와 스마트폰 등 주력 사업에서 창출하는 현금으로 운영 자금을 해결해 왔다. 회사채는 역외 시장에서 해외 투자자들과 소통하는 차원에서 1년에 한두 차례 발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미국 제재가 본격화한 2020년 이후부터 역내 시장 위안화 채권 발행을 대폭 늘렸다. 지난해 4차례, 140억 위안(약 2조7000억원)어치를 발행한 데 이어 올해 들어선 3월까지 이미 4차례, 120억 위안 규모의 자금을 회사채로 조달했다.

베이징(중국)=강현우 한국경제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