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오래되다 못해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회색빛 동네, 젊은 창업가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저렴한 임차료, 서울 중심부라는 편리한 교통, 신도시에 질린 젊은이들이 구도심으로 눈을 돌리는 트렌드까지…. 네 가지 요소가 모이면 뜨는 동네의 성공 방정식이 된다. 사람이 몰린 곳에는 곧 자본도 몰린다. 자본이 덮친 거리는 임대료가 오르고 이를 버티지 못한 1세대 예술가들이 떠나며 곧 도시의 특색도 사라진다. 서울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서 예술과 자본의 함수 관계가 나타난다. 이런 과정을 목격한 뉴욕의 유명한 미술가인 알렉산드라 에스포지토는 뉴욕 예술가들을 ‘미생물’에 빗대 표현하기도 했다. 가장 지저분한 지역에 들어가 더러운 것들을 다 먹어 치우고 깨끗하게 해 놓으면 땅값이 올라 또다시 더러운 곳을 찾아 떠난다는 이유에서다. 서울의 골목들도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또 다른 이야기를 발굴할 서울의 다음 거리는 어디일까.
압구정 로데오 거리 모습. 사진=한경비즈니스
압구정 로데오 거리 모습. 사진=한경비즈니스
맥도날드 1호 매장과 한국 최초 원두커피 전문점 쟈뎅이 들어선 곳. 야타족과 오렌지족 등이 파생된 거리. 패피(패션피플)의 메카.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인상 등으로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 1번지. 전부 압구정 로데오에 해당되는 말이다. 과거 부촌 거리로 상징성을 가진 압구정 로데오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다시 흐르는 로데오의 시
5월 4일 저녁 6시. 서울 강남구 압구정 로데오역 인근의 한 태국 음식점 까폼에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다. 대기표를 뽑는 기계 화면에는 ‘현재 대기 16팀’이라고 떠 있었고 예약 애플리케이션(앱)에는 ‘50분 대기’라고 적혀있었다. 대학생 윤혜윤 씨는 “앱으로 예약했는데 음식점을 고민하던 10분 사이 대기 시간이 30분씩 늘었다”며 “유명 인플루언서 유튜브 영상을 보고 방문했다. 그가 먹었던 카오카무(족발식 덮밥)는 꼭 주문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하에 있는 까폼은 이른 저녁임에도 테이블이 꽉 차 있었고 밤 9시가 넘도록 대기 줄이 이어졌다. 다른 음식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통 주점 백곰막걸리, 카페 파이브바 등 잘나간다는 가게 어디나 비슷했다.

밤 10시가 되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카페는 문을 닫지만 압구정 비스트릿과 백곰막걸리 등 술집 앞은 북적였다. 아이돌 뺨치는 외모의 젊은이들이 라운지바를 향해 걸어갔다. 골목 곳곳에 벤츠‧BMW‧제네시스 등이 흔하게 지나다녔고 롤스로이스‧벤틀리 등 럭셔리 카도 종종 보였다.

10년 넘게 멈춰 있던 압구정 거리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압구정 로데오거리 골목에 차량이 지나다니는 모습. 사진=한경비즈니스
압구정 로데오거리 골목에 차량이 지나다니는 모습. 사진=한경비즈니스
◆임대료 절반으로 낮추자 북적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창때의 압구정 로데오 거리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따지는 곳이 아니었다. 길 건너엔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이 들어섰고 오른쪽에는 청담동 명품거리가 조성됐다. 그 시절 멋쟁이들이 몰렸고 이들을 겨냥한 특색 있는 옷가게와 고급 카페·레스토랑이 즐비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분위기가 전환됐다. 땅값 오르는 속도가 상권의 성장보다 가팔라지면서 장사가 잘되도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1970년대 말 3.3㎡당 70만원에 거래되던 땅값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실거래가 1억원을 웃돌았다. 33㎡ 기준으로 최고 400만원까지 월세가 뛰었고 권리금은 33㎡당 2억~3억원 정도로 올랐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소비 심리가 위축됐고 인터넷 사용이 확대되면서 ‘가성비’를 따지는 소비자들이 늘었다. 오는 손님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임대료는 그대로였다. 결국 가게들은 떠나고 사람들 발걸음이 뜸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며 압구정 로데오는 2010년 이후 긴 침체기를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근에 가로수길이라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각종 리단길이 등장하면서 압구정 로데오의 부진은 깊어져 갔다.
압구정 로데오길에 위치한 한 음식점에서 외국인들이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 사진=한경비즈니스
압구정 로데오길에 위치한 한 음식점에서 외국인들이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 사진=한경비즈니스
추락한 상권은 어떻게 부활했을까. 열쇠는 임대료였다. 상가를 1년씩 비워 두는 것보다 합리적인 월세로 상권을 살리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임대인이 늘어났다. 이들은 2017년부터 임대료를 낮춰 주는 착한 임대료 운동을 했고 당시 1500만원(1층)이었던 월세를 절반으로 낮췄다. 강남구청과 함께 은하수 모양의 초대형 조명을 거리에 달기도 했다.

거리의 변화에 개성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20년 전 압구정을 떠나 가로수길에 둥지를 틀었던 상인들도 다시 압구정으로 돌아왔다. 도산대로 인근 상가는 오마카세 스시 레스토랑 등 파인 다이닝 식당(고급 음식점)이 들어서며 소득 수준이 높은 주변 지역의 소비자들을 빨아들였다. 현대·한양아파트 등 인근 아파트에는 약 3만 명이 거주 중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19년 1분기 6.7%였던 압구정 소규모 상가의 공실률은 올해 0%를 기록했다. 다 들어찼다는 얘기다. 도산대로 소규모 상가 공실률도 0%(2023년 1분기)다. 중대형 상가의 공실률도 하락세다. 압구정은 10%(2019년 1분기)에서 3.5%(2023년 1분기)로, 같은 기간 도산대로는 8.5%에서 3.8%로 떨어졌다.

코로나19 사태는 로데오 거리에 기회가 됐다. 통창을 열어두고 클럽 비슷한 분위기 속에서 즐길 수 있는 라운지바가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보드카 등을 마시던 바가 인테리어 공사를 거쳐 고급스러운 라운지바로 전환하면서 압구정 로데오 거리 건물 1·2층을 중심으로 라운지바가 크게 늘었던 것. 코로나19 사태 초기 이태원 클럽과 홍대 주점에서 연이어 확진자가 나오며 상권이 침체됐고 갈 곳을 잃은 2030세대가 압구정의 라운지바를 찾으면서 상권이 부활한 것이다. 빅데이터 전문 기업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압구정 로데로 거리를 방문하는 이용객의 금요일·토요일 비율은 약 36% 정도다.

압구정 로데오 상권의 부활은 매출로도 확인할 수 있다. 2018년 약 515억원을 기록하던 월평균 매출액은 올해 약 710억원으로 1.3배로 뛰었다. 다만 올해 2월 총 매출은 679억원으로 의료 매출(약 326억원)이 전체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유동 인구 비율은 젊은 여성이 높았다. 서울시 상권분석서비스를 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일평균 유동 인구는 약 8만 명으로 20대 여성(22%)이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가장 많이 방문했다. 3040 남성이 각 21.1%, 21.4%로 뒤를 이었고 30대 여성은 20.9%였다.
◆공실률 늘어난 가로수길 중앙도로
신사동 가로수길 중앙도로에 위치한 1층 상가에 '임대 문의' 카드가 붙여있다. 사진=한경비즈니스
신사동 가로수길 중앙도로에 위치한 1층 상가에 '임대 문의' 카드가 붙여있다. 사진=한경비즈니스
지하철 4호선 신사역 8번 출입구부터 신사중학교까지 이어지는 가로수길은 이국적인 분위기의 고급 상권으로 통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자리 잡은 화랑이나 젊은 의상 디자이너들의 멀티 숍들이 한국판 ‘소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2006년 이후 빈티지 숍과 카페 등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당시 가로수길에는 갤러리·의상 디자이너 숍·잡화 숍·카페 등 500개 이상의 아기자기한 숍들이 자리 잡았다. 신호등이 없고 양방 통행이 가능해 압구정과 신사동 일대에서 유동 인구 밀집에 유리하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시간이 흘러 중앙도로(대로변)에는 대기업과 패션 빅브랜드, 커피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섰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소호형 빈티지 숍들은 가로수길 사이의 세로 골목(세로수길)으로 자리를 옮겼다.

5월 9일 점심 신사동 가로수길을 방문했다. 인근 직장인과 삼삼오오 모여 이동하는 중년 여성들이 주로 눈에 띄었다. 중앙도로에 자리한 애플스토어와 골목골목의 식음료 매장 외에는 한가한 상황이었다. 특히 중앙도로의 1층 매장은 30% 정도가 공실이었다. 신사중학교 쪽으로 이동할수록 빈 점포가 한 건물 건너 하나꼴로 눈에 띄었다. 가로수길의 상징이었던 카페 커피스미스는 2021년 7월 13년 만에 폐업했다.

세로수길에서 10년 넘게 도넛 가게를 운영하는 A 씨는 “중앙도로 거리에는 점점 빈 점포가 생기는 반면 골목 거리는 공실이 없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A 씨는 코로나19 사태 때 장사가 더 잘됐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사태가 풀리고 앉아 디저트를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손님이 조금 줄었다”면서도 “거리에 사람들이 늘어서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형 상가는 대부분 나갔지만 중대형 상가는 빈 점포가 늘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1년 1분기 3.4%였던 신사역 소규모 상가의 공실률은 올해 0%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중대형 상가는 11.5%에서 12.4%로 증가했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유행)에도 가로수길 상권의 매출은 늘었다. 가게는 문을 닫았지만 ‘의료 서비스’가 전체 상권을 이끌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재택을 하고 마스크를 쓰면서 이 기간 보톡스·필러 등 미용 목적의 소비가 크게 늘었다. 나이스지니데이타에 따르면 가로수길의 2023년 1분기 월평균 매출액은 628억원으로 2018년(395억원)과 비교해 2배 가까이 늘었다. 의료 매출(2023년 1분기)이 절반 가까이 됐다.
압구정 로데오가 돌아왔다…임대료 급등은 롱런의 암초[상권 리포트⑧]
◆다시 뛰는 임대료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부활한 압구정 로데오거리, 코로나19 사태 이후는 어떨까. 일단 거리의 콘텐츠가 바뀌었다. 과거엔 도산공원 주변을 맛집·카페 거리로, 로데오거리를 패션 거리로 구분했지만 최근 들어 그 같은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의류 중심의 패션 거리에서 식음료 중심의 맛의 거리로 변신했다. 압구정 로데오에서 성공을 거두고 전국으로 매장을 확대하는 성공 사례도 나왔다. 도넛 맛집으로 이름을 알린 카페 노티드가 대표적이다.

박예은 나이스지니데이타 연구원은 “가로수길은 소매&유통 매출이 상대적으로 높고 로데오거리는 음식 업종이 크다”며 “이는 두 상권의 성격이 쇼핑과 다이닝으로 나뉜다고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다시 임대료가 올랐다. 부동산R114에 따르면 2019년 3.3㎡당 19만원이던 로데오길 상권의 임대료는 2022년 32만원이 됐다. 3년 만에 68% 뛴 것이다. 같은 기간 빈 점포가 늘고 있는 가로수길도 35만원에서 55만원으로 57% 상승했다.

압구정 거리가 제 2의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을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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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림 기자 t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