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전세 제도의 종말을 예고했다. 집주인(임대인)이 세입자에게 목돈을 받고 다음 세입자가 없거나 시세가 집값보다 아래로 내려가면 전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돌려 막기식’ 제도를 본격적으로 손보겠다는 얘기다. 원 장관은 보증금이라는 제도와 가격의 투명성, 관리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개선하겠다며 하반기에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겠다고 했다.
전세를 끼고 집을 매매하는 '갭투자'의 부메랑이 전세 사기와 역전세로 돌아와 수많은 피해자가 생기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세 사고, 4개월간 지난해 1년 치 넘어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집계한 올해 4월까지 전세 보증 사고 금액은 1조830억원에 달했다. 4개월 만에 작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사고 금액(1조1726억원)에 맞먹는 피해가 발생했다. 올해 들어 빠른 속도로 보증 사고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보증 사고 상당수가 다세대 주택 등 저가형 주택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피해자는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심각한 것은 전국에서 터지고 있는 전세 사기로 인해 보증 사고 금액이 늘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조직적인 범죄라는 정황마저 드러나 피해 금액 상당수는 공사의 부담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사기 수법도 고도화되고 있어 우려를 더하게 한다. 한 집을 놓고 전세 계약과 매매 계약을 각기 다른 사람과 맺은 뒤 임대인을 바꿔 버려 책임 소재를 흐리는 수법도 등장했다. 또 컨설팅업자가 수백 건에서 수천 건에 달하는 전세 계약을 매매 가격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체결한 뒤 바지 임대인에게 아예 명의를 넘기는 유형도 있었다. 임대인이 재산을 숨기고 개인 회생 혹은 파산 신청을 하거나 임대인이 세금을 체납해 전세 보증금이 임대인의 세금 납부에 쓰이는 사례도 흔하다.
깡통 주택,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유형이 다양한 만큼 정치적 논의도 복잡해지고 있다. 임대인이 시장 침체로 역전세를 맞아 파산하게 됐는지, 고의적으로 전세 사기를 벌였는지에 따라 전세 사기 피해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당초 정부는 전세 사기 피해자 인정 기준 6가지를 발표한 뒤 까다롭다는 비판을 받고 4가지로 줄인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여야의 시각차로 인해 피해 구제가 지연되고 있다. 전세 보증금 피해자들은 10명 중 2명(17.5%)만 전세 사기 피해자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며 피해자 범위를 확대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세 보증금 합하면 가계 부채 OECD 1위 전세는 집을 빌려 쓰는 대가로 목돈을 집주인에게 일정 기간 맡겨 놓는 제도라는 단순함을 넘어서는 금융 거래다. 즉 본질적으로 ‘숨은 빚’이다. 한국은행이 공식 집계한 지난해 말 기준 가계 신용 잔액은 1867조원이었다. 여기에 전세 보증금은 빠졌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추산한 전세 보증금은 무려 1058조3000억원이다. 둘을 합하면 2925조3000억원으로, 3000조원에 육박한다.
2021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가운데 4위다. 여기에 전세 보증금을 합하면 곧바로 1위로 올라선다. 전세 보증금은 집주인이 집을 담보로 세입자에게 목돈을 빌리는 ‘사금융’이다. 시중 은행에서 빌린 전세 자금 대출 잔액은 통계에 잡히지만 대출이 아닌 돈까지 합한 전세 보증금 전체 금액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전세 보증금이 금융 부채라는 것을 인식한 지는 얼마 안 됐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전세 사기가 전국에서 터져 나오면서 전세 보증금이 가계가 떠안고 있는 부채라는 사실을 전 국민이 체감하게 됐다. 채권자는 세입자, 채무자는 집주인이다.
과거 세입자에게는 ‘주거 사다리’였고 임대인에게는 무이자 대출이었던 전세 제도는 그동안 서로에게 ‘윈-윈’으로 여겨져 왔다. 임대인은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금을 새로운 세입자에게 받아 해결하면 됐다. 최초에 받은 전세 자금을 굴려 돈을 불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집값은 올랐고 전세 수요도 꾸준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금리가 급속도로 오르며 집값과 전셋값이 동반 하락했다. 지난해 서울 아파트 매매가는 22% 하락했고 전셋값 하락률도 15%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전세 대출이 시장을 왜곡했다고 분석한다. 2020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평가한 보고서에서 “전세 제도는 잠재적 ‘차환 리스크(rollover risk)’를 가지고 있다”며 미리 경고하기도 했다. 대출로 떠받친 전셋값 문제 전세의 역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전세 제도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논밭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고,해당 논밭에서 수확하는 농작물을 이자로 밭던 ‘전당 제도’가 그 시초였다. 이후 조선 후기 집을 빌리는 ‘가사전당’이 현대의 전세 제도와 비슷하다. 수도인 한양으로 사람들이 몰리며 본격적으로 전세가 늘어났고 인천 부산 등지를 개방하며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후 산업화 시대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들며 전세는 일반적 주택 거주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수십 년간 아무 일 없는 것 같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 부동산 침체기에 전세 사기 등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최근 벌어진 전세 사기 등 비극의 시작은 전세 자금 대출이었다는 점이다,
전세 자금 대출은 2008년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 때 전세 대출 한도 1억원으로 출발, 다음해에는 한도를 2억원까지 늘렸다. 이전까지 전세금은 어디에서 확보했을까. 가계의 여유 자금과 이자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은행 대출이 전부였다. 하지만 전세 대출이 가능해지면서 사실상 은행에 월세를 내며 사는 지금의 전세 제도가 시작됐다. 목돈이 없어도 전세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임대인들이 전셋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2012년 부동산 정보 업체 부동산써브가 낸 자료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 5년간 전셋값 상승률은 37%에 달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전세 대출 한도를 5억원까지 늘렸다. 전세금을 매매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전세 자금 대출 규모가 커졌고 전셋값과 집값 상승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문재인 정부 때 전세 자금 대출 규모는 안정을 찾는 것 같았지만 말기 임대차 3법 시행 이후 다시 급속히 늘었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금지하기 위해 규제 범위를 넓히고 주택 공급을 제한하면서 전셋값은 더 가파르게 올랐다. 2020년 임대차 3법이 도입되면서 전세 인상률을 5% 내로 제한하자 오히려 전셋값이 폭등했다는 주장도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제로 금리 시대가 열리자 전세 자금 대출은 정점을 찍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0.50%까지 내려갔던 2021년 말 전세 자금 대출 잔액은 180조원까지 폭증했다. 23조원에 불과했던 2012년과 비교하면 8배 가까이 늘었다. KB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같은 기간 전세 자금 대출 이용 가구 비율은 2012년 5.6%에서 2021년 12.2%로 2배 넘게 높아졌다.
KB경영연구소는 2022년 4월 낸 보고서(‘전세 자금 대출 증가에 따른 시장 변화 점검’)에서 “전세 자금 대출은 전셋값 상승에 영향을 미쳐 갭 투자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을 수 있다”고 했다. 전세 자금 대출 확대가 집값 상승에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올해는 전세 자금 대출 잔액이 다시 줄기 시작했다.
5대 은행의 전세 자금 대출 잔액은 올해 들어서만 7조1074억원 감소했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에 따르면 5개 은행의 지난 4월 전세 자금 대출 잔액은 124조8796억원으로, 전달보다 1조7346억원 줄었다. 전세 자금 대출이 줄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10월부터다.
당시 전세 자금 대출 금리가 연 5~7%로 상승하자 대출 이자 부담이 큰 전세보다 월세를 선호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전세 대출 축소가 시작된 계기가 고금리였다면 최근 전셋값 하락이 대출 축소를 이끄는 것으로 해석된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 4월 서울 아파트의 전세가격지수는 85.47로, 2020년 10월(85.03) 이후 최저치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전세 자금 대출 규모가 확대되면서 전세 보증금에서 부채 비율이 높아졌고 결국 집주인과 세입자 모두 은행에 월세(이자)를 내는 구조로 전세 제도가 왜곡됐다”고 말했다.
그는 “전세 거래에서 발생하는 부채 비율을 줄여야 하고 사금융에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손볼 때가 됐다”며 “전세 제도 자체를 없애기보다는 임차인의 전세 보증금을 집주인이 아닌 금융회사에 맡겨 놓는 ‘에스크로’ 등 다양한 안전장치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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