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배터리, 전기차보다 더 큰 시장 열린다

[비즈니스 포커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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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보급 속도가 빨라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시장이 있다. 수명이 다한 전기차 배터리가 만들어 내는 ‘폐배터리’ 시장이다. 규모가 급증해 6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장에 배터리 기업은 물론 완성차 업체들도 뛰어들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는 통상 초기 용량 대비 70% 이하로 성능이 떨어지면 주행 거리 감소, 충전 속도 저하, 안전성 위험 증가 등의 문제로 교체해야 한다. 이를 그대로 버리면 폭발 위험과 환경 오염을 유발할 수 있어 폐배터리 활용은 필수적이다.

블룸버그ENF에 따르면 2032년 110GWh 이상의 폐배터리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이는 하루 평균 50km를 주행할 수 있는 순수 전기차 1100만 대를 만들 수 있는 규모다. 전 세계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은 2030년 12조원에서 2050년 600조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추정된다.

연간 완성차 신차 판매 시장이 9000만 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향후 폐배터리가 쏟아지며 배터리 처리 문제가 대두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게 되는 셈이다.

유럽은 유럽연합(EU)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라고 불리는 핵심원자재법(CRMA) 초안을 발표하는 등 전 세계적인 환경 규제 강화, 배터리 원재료의 가격 상승, 자원 고갈 문제 등이 맞물려 폐배터리 재활용·재사용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폐배터리 처리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차량용으로 더 사용하기 어려운 배터리를 에너지 저장 장치(ESS)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배터리 재사용(re-use)’, 차량 배터리에서 리튬·니켈·코발트 등 고가의 희귀 금속을 추출하는 ‘배터리 재활용(re-cycling)’ 등이다.

배터리를 ESS와 충전기 등으로 재사용하면 지속적인 충·방전이 가능해 자원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재활용은 폐배터리 내 금속을 추출해 신규 배터리 제조에 활용하는 것이다.

배터리는 전기차 원가의 40%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특히 양극재는 배터리 원가의 43%를 차지해 재활용 가치가 높다. 양극재 핵심 소재인 리튬·니켈·코발트·망간은 가격이 비싸고 대부분을 중국산에 의존하고 있다. 폐배터리를 재활용하면 안정적으로 원재료를 확보할 수 있고 수입 대체로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인도네시아가 핵심 광물인 리튬과 니켈 등의 국유화를 선언하면서 주요국들은 폐배터리 재활용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국은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 초기 단계로 폐배터리에 대한 수거·재활용 방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반면 유럽은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을 탈탄소 에너지 전환과 환경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해 왔다. 오래전부터 적극적으로 전기차 보급률을 높이며 폐배터리 재활용 시스템을 구축했다. 배터리 이력 관리를 위한 배터리 여권 제도, 배터리 재활용 원료 활용 비율 의무화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 1위 전기차 시장인 중국은 정부 주도로 재활용 국가 표준 제정, 생산자에 대한 재활용 책임 제도 명시 등 폐배터리와 관련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폐배터리 재활용 시장이 이미 성숙 단계에 진입했다.

한국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배터리 제조 기업들을 비롯해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도 폐배터리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폐배터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전기차 충전 ESS 등 배터리 재사용에 주력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재활용에 초점을 맞춰 수산화리튬 추출 기술을 검증하고 있다. 현대차는 배터리 순환 경제 로드맵 수립 후 에너지 기업과 협업해 ESS 실증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