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는 위기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인 디즈니플러스에서 시작됐다. 2개월 연속 구독자가 감소 중이다. 3월 기준 디즈니플러스의 구독자 수는 1억5780만 명. 전 분기 대비 400만 명(약 2%) 줄었다. 이는 시장 전망치(1억6317만 명)에도 크게 못 미친다. 특히 북미 지역에서만 60만 명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즈니플러스의 구독자 수는 지난해 4분기에도 약 240만 명 줄었다.
구독자 수의 급감으로 주가도 출렁이고 있다. 디즈니는 5월 10일 그리 나쁘지 않은 1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1분기 매출은 218억2000만 달러로, 전년 대비 13% 증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실적 발표 직후 디즈니의 주가는 5월 11일 전일 대비 8.73% 폭락한 92.31달러를 기록했다. 디즈니플러스 구독자 수의 급감이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한 것이다. 디즈니플러스의 ‘예상된 적자’에도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위기에 빠진 디즈니는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지난 3월부터 세 차례에 걸쳐 7000여 명의 직원을 정리 해고해 내보냈고 비용 절감을 위해 제작이 예정됐던 30여 편의 영화와 TV 시리즈 등의 제작을 취소했다. 그 비용만 15억 달러에 달하고 3분기 내에 4억 달러 상당의 콘텐츠를 추가로 제작 취소할 계획이다.
갑작스러운 듯 보이는 ‘디즈니 왕국의 추락’은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디즈니 왕국은 어쩌다가 ‘꿈과 희망을 심어 주던 콘텐츠의 마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매력 잃어버린 ‘디즈니랜드’
월트디즈니의 시작은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00년 동안 월트디즈니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품질 높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미키마우스’와 같은 캐릭터를 시작으로 ‘인어공주’, ‘백설공주’ 그리고 ‘겨울왕국’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만화로, 혹은 영화로 탄생시켰고 그 결과 회사 또한 눈부시게 성장했다.
미디어 기업으로서 디즈니의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은 ‘매력적인 콘텐츠’와 ‘친근한 캐릭터’다. 이와 같은 콘텐츠와 캐릭터의 힘을 부각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디즈니랜드·디즈니월드와 같은 테마파크다.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를 통해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들이 창출하는 부가 가치를 만끽해 왔다. 1928년 탄생된 ‘미키마우스’가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고 ‘인어공주’와 같은 만화 속 세계가 고스란히 눈앞에서 펼쳐진다. 파리·상하이·홍콩·도쿄 등 전 세계에 있는 디즈니랜드는 매년 1억 명이 넘는 관광객을 그러모은다. 디즈니 전체 매출 중 테마파크가 차지하는 비율은 30%가 넘는다.
하지만 이 ‘꿈과 환상의 세계’는 지난 3년간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의 직격탄을 맞아야 했다. 전 세계 테마파크는 줄줄이 문을 닫았고 디즈니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팬데믹을 겪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재개장 여부 또한 불투명해지면서 디즈니랜드 직원 2만8000여 명을 해고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3년여간의 팬데믹이 끝나고 일상이 회복되면서 디즈니랜드 또한 예전과 같은 활기를 찾아가고 있다. 실제 디즈니의 1분기 실적 발표에 따르면 테마파트 사업 부문의 매출은 전년 대비 17% 증가(77억 달러)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디즈니랜드는 코로나19 사태 이전과 비교해 그 매력을 잃어버린 듯하다. 팬데믹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디즈니랜드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다른 불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디즈니는 코로나19 사태 당시 입었던 타격을 만회하기 위해 최근 2~3년간 지속적으로 디즈니랜드의 입장권 가격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10월 9% 정도를 인상한 입장권 가격은 1일 최고 가격이 179달러(약 25만원)에 달할 정도다. 디즈니랜드의 놀이기구는 ‘긴 대기 시간’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입장권 가격마저 비싸진 상황에서 이는 더욱 큰 불만으로 돌아오고 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디즈니랜드의 월평균 놀이기구 운행 중단 건수도 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긴 대기 시간을 더욱 길어지게 만든다. 끊임없이 오르는 가격표와 긴 줄 그리고 잦은 놀이기구 운행 중단, 벽을 가득 채운 인파 등에 지친 사람들은 디즈니랜드 대신 유니버설 스튜디오나 다른 테마파크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IP 공장이 된 디즈니, ‘잃어버린 콘텐츠 마법’
‘디즈니 왕국의 위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1989년)’, ‘프리티 우먼(1990년)’ 등 영화는 물론 ‘미녀오 야수(1991년)’, ‘알라딘(1992년)’, ‘라이온킹(1994년)’ 등으로 황금 시대를 구가했던 디즈니는 2004년 창사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게 된다.
당시 디즈니를 이끈 인물은 마이클 아이즈너 최고경영자(CEO)였다. 그는 1984년 수장이 된 이후부터 줄곧 ‘콘텐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며 디즈니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디즈니는 지나치게 아이즈너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관료적인 조직으로 변해 갔고 이는 콘텐츠 기업의 핵심인 ‘창의성과 역동성’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경영이 악화되며 2004년 당시로서는 중소형 케이블 방송사였던 컴캐스트가 디즈니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2005년 아이즈너 CEO는 디즈니를 떠나게 됐고 디즈니의 새로운 구원자로 등판한 것이 밥 아이거 CEO다.
아이거 CEO는 ‘콘텐츠 제왕’ 디즈니를 ‘지식재산권(IP) 제왕’으로 완벽하게 탈바꿈시키며 새로운 전성기를 써 나갔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식은 인수·합병(M&A)이었다. 2006년 애니메이션업계에서 디즈니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픽사’를 시작으로 2009년 마블, 2012년 루카스필름, 2019년 21세기 폭스 등을 차례로 인수하며 디즈니를 세계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왕국으로 만들었다.
아이거 CEO는 2021년까지 15년간 디즈니를 이끌었는데 그동안 디즈니의 순이익은 연간 2배 이상씩 성장했다. 2005년 25달러 수준에서 거래되던 디즈니의 주가 또한 2021년 200달러 선까지 뛰어올랐다.
하지만 아이거 CEO가 퇴임하고 그의 후임인 밥 체이팩 CEO가 자리에 앉으면서 디즈니의 콘텐츠는 빠르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불운도 있었다. 체이팩 CEO는 테마파크 전문가였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테마파크가 발이 묶인 것이다. 체이팩 CEO는 아이거 전 CEO가 시작한 디즈니플러스를 키우는 데 집중했고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는 고스란히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경영이 위태로워지자 체이팩 CEO는 수익성을 강화하기 위해 디즈니플러스의 구독료를 인상했고 그 여파가 구독자의 급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체이팩 CEO는 디즈니의 콘텐츠 제작 시스템에도 큰 변화를 줬다.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 투자와 플랫폼 전략을 모두 아우르는 ‘DMED(Disney Media & Entertainment Distribution) 부서’를 신설했다. 이전까지 디즈니는 예산과 유통 권한을 각각의 제작 파트에 일임했다. 하지만 DMED가 이 권한을 독점하게 됐고 디즈니의 콘텐츠 제작은 수직적으로 변했다.
DMED가 디즈니의 모든 콘텐츠 제작부서 위에 군림하는 동안 디즈니의 콘텐츠도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미 거대한 세계관을 구축하며 ‘덕후’몰이를 하고 있는 마블은 ‘블랙 위도우’를 시작으로 ‘토르’, ‘블랙팬서’, ‘앤트맨’ 등을 앞세운 영화들이 모두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픽사의 ‘버즈 라이트이어’ 등도 흥행에 실패하며 감독과 프로듀서 등이 대거 해고되기도 했다.
미디어 기업인 디즈니의 최근 행보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디즈니는 그동안 ‘전 세계 어린이들이 시청하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기업으로서 소수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2021년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에 ‘인종 차별 경고’ 문구를 삽입하는가 하면 최근 개봉된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 또한 백인에 빨간 머리를 지닌 원작의 설정과 달리 흑인 여배우를 캐스팅하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한쪽에서는 ‘인어공주는 당연히 백인’이라는 편견을 깼다는 데 대한 응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원작의 설정을 무시했다’는 비판이 이어지며 ‘내 애리얼이 아니다(#notmyariel)’는 해시태그가 유행 중이다.
디즈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콘텐츠의 창의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이 나오며 디즈니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해 11월 아이거 CEO를 다시 불러들였다. 과거 디즈니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숙제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콘텐츠를 확장하기 위해 그의 경쟁사들을 모두 품에 안기로 한 디즈니의 전략은 오히려 ‘디즈니의 콘텐츠 매력’을 잃게 한 자충수가 됐다는 지적이다. 스스로 ‘미디어 제국’을 건설하며 경쟁이 필요없어진 디즈니의 콘텐츠는 이미 그 힘을 잃어버렸고 이를 되찾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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