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연합외신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연합외신
코로나19 시기 명품주 주가는 급등했다. 그 결과 에르메스의 주가수익률(PER)이 거의 50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인공지능(AI) 열풍을 타고 급등한 엔비디아에 맞먹는 수준이다. 세계 최대 명품 제국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를 이끌고 있는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세계 최고 갑부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명품은 일반 경제의 대리인이 아니다(Luxury is not a proxy for the general economy)”며 경기 침체에도 성장을 자신했던 명품 기업들의 주가는 실제 지난 5년 동안 호황이나 불황과 관계없이 꾸준히 올랐다. 코로나19 사태가 강타한 지난 2년간 상승 폭은 더 가팔랐다.

명품이라 불리는 사치품의 주요 고객은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반 소매품과 달리 명품 기업들의 비용 인상은 비교적 자유롭다. 오히려 가격을 올려야 ‘명품’의 입지가 유지되고 브랜드 가치가 높아진다.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비용 인상을 전가할 수 있기 때문에 원가 상승으로 인한 실적 타격도 없다.

하지만 최근 명품주의 상승세가 주춤하고 있다. 최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1분기에 탄탄한 실적을 발표했음에도 주가 그래프는 꺾이고 있다.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매출 상승세가 둔화되고 ‘큰손’인 중국의 경제 성장 정체가 명품 기업 주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엔비디아 맞먹는 에르메스 PER
테슬라 이겼던 루이비통, 이제 성장세 꺾이나[특이점이 온 명품②]
최근 세계 주식 시장에서 몇 가지 장면이 화제가 됐다. 먼저 ‘세계 최고 갑부’ 자리를 둔 쟁탈전이다. 지난 5월 31일 아르노 회장이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에게 ‘세계 최고 부자(블룸버그 억만장자 순위 기준)’ 타이틀을 내줬다. LVMH는 루이비통·크리스챤 디올·티파니앤드코 등 75개 브랜드를 거느린 명품 제국이다.

아르노 회장이 머스크 CEO에게 ‘세계 부자 1위’ 자리를 처음 뺏은 것은 지난해 12월. 이후 약 6개월 동안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 최근 머스크 CEO가 1위를 탈환했다. 자산 추이만 놓고 보면 테슬라가 성장해서가 아니라 LVMH가 꺾인 영향이었다.

하지만 빅테크 중에서도 가장 ‘핫’한 테슬라 CEO와 경쟁하고 애플·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사우디아람코 등 글로벌 기업의 CEO를 모두 제친 것만으로도 최근 몇 년간 프랑스 명품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엿볼 수 있다.
꺾일 줄 모르던 LVMH 주가가 내려앉은 것은 지난 5월 22일이다. 프랑스 파리 증시에서 LVMH의 주가는 834.2유로로 전 거래일보다 5.01% 하락했다.

LVMH의 주가가 5% 이상 빠진 것은 1년 2개월 만이었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이날 유럽 명품 부문에서 증발한 시가 총액은 300억 달러(약 39조1350억원)에 달한다. LVMH를 포함해 주요 명품 기업 10곳이 포함된 스톡스유럽럭셔리지수는 5월에만 5% 가까이 떨어졌다. 월간 기준으로 이 지수가 하락한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프랑스 소재 자산 운용사 카르미냑의 케벵 토제 투자위원은 “최근 주가 움직임을 보면 명품주 투자 열풍은 이제 끝난 것 같다”면서 “추가 상승 여력은 상당히 제한돼 보인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는 명품주의 하락이 유럽 시장 전체의 하락, 특히 프랑스 시장의 약세를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명품주가 이끄는 유럽 증시도 휘청
테슬라 이겼던 루이비통, 이제 성장세 꺾이나[특이점이 온 명품②]
분위기는 불과 몇 주 만에 반전됐다. 4월까지는 명품주의 강세가 이어지는 듯했다. 지난 4월 24일 유럽 전체를 뒤흔든 소식도 들렸다. LVMH의 시가 총액이 파리 주식 시장에서 유럽 기업 최초로 5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날 LVMH의 주가는 장중 903.7유로를 기록했다. 앞서 4월 13일에는 프랑스 기업 최초로 시가 총액 기준 세계 10대 기업에 오르며 미국 빅테크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명품주의 질주는 글로벌 주식 시장의 판도도 바꿨다. LVMH·에르메스·크리스챤 디올 등 프랑스 기업의 주가가 급등하자 지난해 11월 파리 주식 시장은 런던을 누르고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에 올랐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프랑스 증시의 대표 지수인 CAC40은 지난해 9월~올해 5월 30% 정도 급등했다. 시가 총액 증가분의 3분의 1은 에르메스와 LVMH, 로레알, 구찌의 모회사인 케어링 등 4개 기업의 몫이었다.
구찌는 지난 5월 16일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 ‘구찌 2024 크루즈 패션쇼’를 열었다./뉴스1
구찌는 지난 5월 16일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 ‘구찌 2024 크루즈 패션쇼’를 열었다./뉴스1
주요 명품 기업들의 1분기 실적은 하락세를 그리고 있는 주가 흐름과 정반대다. LVMH가 공개한 1분기 매출은 210억3500만 유로로 전년 동기(180억 유로)보다 17% 증가했다. 증가율은 시장 예상보다 2배 이상 높았다.

에르메스의 지난 1분기 매출은 전년 대비 23% 증가하며 매출 증가율로 LVMH를 앞섰다. 호실적을 냈지만 명품 기업에 가장 큰 시장인 미국과 중국의 성장세가 둔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주가 상승에 제동이 걸렸다. 작년 70% 이상 상승했던 주가는 최근 한 달 새 4%대 하락세로 돌아섰다.

모간스탠리가 지난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주최한 ‘럭셔리 콘퍼런스’ 행사에서도 명품 기업 성장에 먹구름이 낄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에두아르드 오빈 모간스탠리 연구원은 “명품 기업들의 미국 실적이 상대적으로 짓눌리고 있다”며 “특히 소비 여력이 없음에도 명품을 사왔던 ‘열망 소비자’들의 소비가 감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중국 성장 선반영, 미국 시장 둔화가 문제
런던 헤롯 백화점에 전시된 디올 가방./연합외신
런던 헤롯 백화점에 전시된 디올 가방./연합외신
LVMH는 지난해 매출의 27%를 미국에서 올렸다. 중국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 매출(30%)에 가까운 수치다. 하지만 성장률만 보면 가장 큰 시장인 미국 매출은 8% 증가하는 데 그쳤다.

매트 갈랜드 도이체방크 연구원은 미국 시장 우려에 더해 밸류에이션 부담도 지적했다. 그는 “명품 기업의 주가는 역사적으로 높은 수준의 프리미엄에서 거래되고 있다”며 “중국 수요 증가가 명품 기업들의 매출을 떠받치고 있지만 앞으로는 투자자들이 명품 기업에 더욱 까다로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케어링 역시 미국 성장 둔화의 직격탄을 맞았다. 로이터에 따르면 케어링은 1분기에 미국 매출이 급감하면서 전년 대비 매출이 1%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가격 인상, 물가 상승 등을 감안하면 사실상 역성장한 셈이다.

중국에서는 소매 판매 둔화, 소비 심리 위축, 청년 실업률 상승 등 경기 둔화 신호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기에 중국의 리오프닝은 이미 주가에 반영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카이로스파트너스의 알베르토 토키오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포천에 “중국 리오프닝은 이미 주가에 완전히 반영됐고 소비 지출에서 ‘부정적 서프라이즈’가 나올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명품주의 비율을 조정할 때”라며 “최근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여전히 높다”고 지적했다.<박스> 명품의 사회학
“한국에서 명품은 사회적 갑옷”
명동 롯데백화점 명품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한국경제
명동 롯데백화점 명품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한국경제
“성형으로 얼굴을 바꾸는 것처럼 명품 가방은 자신의 지위를 보여주는 사회적 갑옷이 됐고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젊은 세대의 배출구가 됐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가 한국의 명품 소비 현상에 주목했다. 정확히 말하면 명품업계가 서울을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썼다. 최근 루이비통과 구찌가 서울에서 패션쇼를 하고 샤넬과 디올이 블랙핑크를 모델로 쓰는 등 명품업계가 한국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피가로는 한국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이 세계 1위라는 모간스탠리의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며 “겉모습으로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유교 사회에서 한국의 명품에 대한 관심이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날카로운 지적도 이어졌다. 한국은 가계 부채가 선진국 중 가장 높은 편인데 여기에 도전이라도 하듯 성수동에 있는 디올 팝업 매장 앞에는 젊은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고 전했다.

미국 투자은행과 유럽 외신이 주목할 만큼 한국에서 명품 사랑은 과시 소비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파노폴리’ 효과가 한국 특유의 체면 문화와 맞물려 유별난 명품 사랑을 만들어 냈다고 진단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명품을 소비하는 심리적 요인에는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자신과 자신이 이상향으로 삼는 특정 집단을 동일시하는 ‘파노폴리’ 효과가 작용한다”며 “현실에서의 실질적인 계층 이동은 어렵지만 높은 계층의 소비를 함으로써 신분이 상승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명품 소비에 대한 심리적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는 것도 원인이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과 비슷한 소득 수준인 사람들이 모두 비싼 소비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만 뒤처질 수 없다’는 심리가 확산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