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넘어 시(時)성비의 시대가 온다 [글로벌 현장]
최근 일본에서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에 이어 ‘시(時)성비(시간 대비 성능)’가 대세다. 개인의 라이프스타일부터 기업의 경영 전략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으로 떠오르면서 ‘타임 퍼포먼스’를 줄인 ‘타이파’라는 말까지 생겼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1초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이 즐겨 듣는 J팝만 보더라도 도입부(인트로) 길이가 10년 새 3분의 1로 줄었다. 1980~1990년대와 2011년 20대 히트곡의 도입부는 평균 17초로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2021년 20대 히트곡의 도입부는 평균 6.3초로 10년 만에 10.7초 줄었다.

26년째 오리콘 차트 여성 싱글 앨범 판매량 1위를 지키는 아무로 나미에의 ‘캔 유 셀리브레이트’의 도입부는 29초였다. 반면 요아소비의 ‘밤을 달리다’와 애니메이션 ‘원피스’의 수록곡 ‘신시대’ 등 최근 인기곡의 도입부는 0초, 전주 없이 ‘다짜고짜’ 시작된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듣는 시대가 저물고 정기 구독형으로 음악을 무제한 골라 듣는 시대가 되면서 생긴 변화다. 첫 소절이 나올 때까지 시간이 걸리는 곡은 가차없이 스킵 당하니 도입부도 과감하게 생략하는 것이다.

전주만 짧아진 게 아니라 노래 길이 자체가 2~3분으로 줄어든 것도 최근 10년 사이의 변화다. 곡의 길이가 짧을수록 재생 횟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너무 소중하다. 세이코홀딩스의 ‘세이코 시간 백서 2022년’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자신 만의 1시간’에 매기는 가치는 1만3639엔으로 매년 늘어나고 있다.

시성비의 트렌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배속 시청이다. 세이코홀딩스의 2021년 조사에서 온라인 강의를 배속 시청하는 학생이 절반을 넘었다. 드라마나 유튜브 콘텐츠를 1.25배속이나 1.5배속으로 듣는 30~40대 소비자들도 30%에 달했다.

콘텐츠를 배속으로 시청할 정도로 시간을 아끼다 보니 행동 양식도 ‘멀티(다중 작업)’로 변해 간다. ‘들으면서’를 뜻하는 ‘기키나가라 서비스’의 인기가 이를 반영한다. 시간을 물리적으로 늘릴 수 없으니 들으면서 일이나 가사 노동을 하는 시간 활용법이다.

책 읽어 주는 서비스인 오디오북재팬 이용자 수는 2019년 100만 명 미만에서 2022년 25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일에 치이면서 자기 계발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직장인에게는 독서도 사치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비즈니스 서적 1권을 10분으로 요약해 읽어 주는 정기 구독 서비스도 등장했다. 정기 구독료가 월 2200엔인 플라이어의 회원 수는 2019년 50만 명에서 지난해 100만 명을 돌파했다.

오디오북재팬 운영사 오토뱅크의 구보타 유야 사장은 “보통 사람들의 귀는 하루 평균 3.7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 시간을 활용하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먹는 시간도 아깝다. 인간은 꼭 하루에 꼭 세 끼를 먹느라 시간을 허비해야 할까. 공상과학 영화처럼 하루에 한 끼 그것도 알약 한 알로 식사를 해결할 수는 없을까. 그런 시대도 머지않은 것 같다.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를 한 끼에 담은 ‘완전 영양식’이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는 음료 타입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빵과 컵면 등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16년 창업한 베이스푸드는 빵 외에 파스타와 쿠키 형태의 완전 영양식을 내놓았다. 전립분에 대두와 다시마 등 10종류 이상의 식재료를 섞어 한 끼로 하루 동안 필요한 영양소를 3분의 1 이상 섭취할 수 있다. ‘미소베이션’은 미소시루, 일본식 된장국 타입의 완전 영양식을 판매한다.

밥 먹을 시간도 없는데 밥 할 시간이 있을 리도 없다. 닛신식품이 작년 4월 내놓은 ‘0초 치킨라멘’은 발매와 동시에 매진됐다. 먹는 시간을 줄이려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에 딱 들어맞은 상품이라는 점이 인기 비결로 꼽힌다.

‘라면땅’과 같은 라면 과자나 라면 스프를 뿌린 봉지 라면과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닛신식품 관계자는 “어디서나 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식품”이라고 강조한다. ‘멀티가 가능한 식사’라는 뜻이다.

0초 치킨라멘의 원조는 2017년 자사 TV 광고다. 자사 라멘을 맛있게 먹는 방법을 소개하는 시리즈 광고의 하나였다. ‘봉지를 뜯자마자 그대로 먹어도 맛있다’는 점을 어필하려고 ‘0초 먹기’를 내보냈는데 이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로 대박이 났다.

반쯤은 장난이었던 라면땅 광고가 대박이 나자 짠맛을 줄이고 영양소를 추가해 진짜 식사거리로 내놓은 게 0초 치킨라멘이었다. 0초 라멘의 인기에 힘을 얻은 닛신식품은 2022년 5월부터 즉석면뿐만 아니라 즉석컵밥·스무디 등 다양한 형태로 진화시킨 ‘완전 메시(완전한 밥 이라는 뜻)’ 시리즈를 내놓았다.

필요한 영양소 33종류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짧은 시간에 완벽한 식사를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완전 메시는 발매 5개월 만에 500만 개가 판매됐다.

밥을 하지 않으니 장 볼 시간도 줄어들었다. 일본의 온라인 쇼핑 시장은 최근 5년 새 40% 커졌다. 밥 먹는 시간을 아끼는 마당에 술 마실 시간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푸드서비스협회에 따르면 패스트푸드 시장이 성장세를 이어 가는 반면 이자카야 시장은 13년 연속 줄었다.

왜 사람들은 시간 대비 성능을 따지기 시작한 것일까. 니혼게이자이신문의 대표 칼럼리스트 나카무라 나오후미는 디지털 기술이 인간을 편리하게 만든 동시에 정보의 양을 폭발적으로 늘려 바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잉 정보 사회라는 지금까지 없던 지구 환경의 변화에 인간이 진화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언제든지 무제한으로 콘텐츠에 접속할 수 있는 시대에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려면 화제를 공유해야 한다.

날 잡아 ‘사랑의 불시착’과 ‘BTS’ 전편, 전곡 감상했는데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으면 시간 낭비일 수밖에 없다. 그 시간에 ‘오징어 게임’이나 ‘이태원 클래스’ 등 다른 콘텐츠를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다.

배속 시청으로 대표되는 시성비는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투자한 콘텐츠가 유익하지 않을 때의 낭비도 줄이는 절충안이다. ‘작품을 감상한다’는 행위에 ‘정보 수집을 위해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스타일이 새로 추가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시성비 추구를 가속화했다. 오늘날 일본인 가계의 70%는 맞벌이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가사 노동에 쏟는 시간과 노력이 늘어났다. 그만큼 가사 시간을 줄이는데 대한 수요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시성비에 집착하는 이유는 다소 안쓰럽기까지 하다. 일본 광고회사인 하쿠호도생활종합연구소가 소비자의 행동 패턴을 조사한 결과 생활 리듬의 고속화를 요구하는 비율이 1999년 37.4%에서 2019년 57.4%로 상승했다. 젊은 세대일 수록 ‘더 빨리, 더 빨리’를 요구 받는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세대가 시성비를 따지는 현상을 후지타 유이코 메이지대 교수는 결핍과 불안이라는 단어로 풀이한다. 30년 장기 침체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불안정한 저성장기를 보낸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글로벌 경쟁에서 뒤진 일본의 미래를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이라는 자원을 조금이나마 유효하게 사용해 남들보다 빨리 성장해 안심하고 싶다는 의식이 강한 세대”라고 후지타 교수는 설명했다.

“60%의 힘으로 60세까지 일하기보다 100%로 전력을 다해 40대까지 일하는 쪽을 선택하는 세대”,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는 스킬을 중시하기 때문에 ‘멀티’에 대한 수요가 높은 세대”라는 설명이다.

도쿄(일본)=정영효 한국경제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