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는 미신과 종교 대신 과학적 이성과 합리를 앞세운 근대 사상의 정수다. 영국 출신의 로크와 홉스, 프러시아의 칸트, 프랑스의 루소·몽테스키외·볼테르가 대표 사상가로 꼽힌다.
차이에 대한 관용을 뜻하는 톨레랑스(tolérance)도 계몽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톨레랑스 논의를 주도한 것은 볼테르였다. 18세기 중반 루소와 쌍벽을 이룬 볼테르는 사상·종교·표현의 자유·노예제 폐지를 부르짖은 선구자였다.
과학적 사고와 합리적 이성을 강조한 그가 설마 복권이나 도박 같은 행위를 옹호했을 리 없다. 실제 그는 도박을 “우연에 의존하는 게으름의 악덕”이라고 규정했고 노력과 도전 대신 “삶의 현실과 책임을 외면하는 비이성적 도피주의”라고 비판했다.
현실은 달랐다. 정작 볼테르 자신은 복권으로 큰 부를 얻었다. 그렇게 형성된 자산에 의지해 평생 왕성한 사유와 창작 활동에 몰입할 수 있었다. 언행불일치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볼테르에게 복권은 요행수가 아닌 엄연한 ‘투자’였다고 한다.
복권을 투자라고 부른 그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해답은 당시 서유럽에 들불처럼 번진 ‘복권형 국채(Lottery Bonds)’라는 괴물에 있다.
금융이란 정장을 입은 복권 프랑스 최초의 공식 복권은 1539년 시작됐다. 당시 복권의 메카였던 이탈리아 밀라노를 침공한 프랑수아 1세는 의외의 전리품을 챙겨 온다. 전쟁으로 부실해진 왕실 재정의 해법을 복권 발행에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미숙한 운영 때문에 실험은 실패했고 그 후 복권은 1660년 루이 14세의 결혼식과 1661년 후계자 탄생 등 왕실 기념일의 일회성 오락으로만 존재했다.
잠잠하던 프랑스 복권 역사에 돌을 던진 것은 영국이었다. 1694년 영국 의회가 국고 확충 방안으로 100만 파운드의 ‘복권형 국채’ 발행을 결정한 것이다. 이른바 ‘백만 복권(Million Lottery)’으로 명명된 영국의 기획은 투기와 투자, 도박과 금융의 기이한 합성물이었다.
개인이나 회사처럼 국가도 빚을 지는데 그 채무 증서를 국채라고 한다. 오늘날 국채는 통상 만기까지 정기 이자를 지급받는 안정적 금융 상품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전쟁에 휘말린 당시 유럽 국가들의 국채는 심한 기피 대상이었다.
국고는 바닥났고 세금을 올리자니 조세 저항이 염려되고 복권을 추가 발행하자니 이권을 쥔 교회 측의 반발이 드셌다. 이에 비호감 채권에 진한 ‘립스틱’을 발라 리브랜딩한 상품이 ‘백만 복권’이었다. 달리 말해 원금 보장 장점을 지닌 채권 위에 정기 이자 대신 거액의 상금이 걸린 복권이란 토핑을 듬뿍 얹어 흥행 레시피를 완성한 것이다.
복권·채권 하이브리드의 등장에 돈이 궁했던 유럽 국가들은 열광했다. 스위스 신학자 장 르클레르는 1696년 저서에서 이 미혹의 금융 상품을 ‘교활하게 시민 주머니를 털어 낸 국가의 꼼수’라고 묘사했고 그 꼼수가 네덜란드에 이어 프랑스로 번져 갔다고 기술했다.
볼테르가 움켜쥔 파리시청 채권 18세기 초반 유럽의 패권을 꿈꾼 프랑스의 재정은 엉망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정복, 주화 호환용 지폐 발행,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참전 등이 주원인이었다. 이에 복권형 채권을 만병 통치약으로 판단한 루이 14세는 영국의 백만 복권을 압도하는 천만 프랑 복권까지 선보이는 무리수를 뒀다.
‘막 나가는’ 중앙 정부에 뒤질세라 자치단체들도 복권형 채권 사업에 열을 올렸다. 이미 발행된 채권에 복권을 덧붙이는 사례들도 속출했다. 채권 신규 구매도 늘었지만 만기 임박 채권도 복권 당첨에 대한 기대감에 연장 보유하는 사례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남발된 복권·채권 합성물은 볼테르와 그의 수학자 친구 라콘다민에게 천우의 기회였다. 이들이 보유 중이던 파리 시청(La Hôtel de Ville) 채권 역시도 복권 추첨을 도입했는데 1000프랑 채권당 복권 1장(1프랑) 구매 자격을 줬고 최대 당첨금은 50만 프랑이었다.
수리에 능한 이들은 즉각 보유 채권을 1000프랑 단위로 분할했다. 10만 프랑 채권을 1000프랑 100장으로 나누면 단돈 100프랑에 100장의 복권을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량의 복권은 높아진 당첨 확률을 뜻했고 그 확률에 맞춰 예측해 본 상금 규모는 애초 보유 채권의 가치를 크게 뛰어넘었다.
수학적 확신을 가진 볼테르와 그의 친구들은 심지어 차명 계좌까지 동원해 신규 채권과 복권 매입에 나섰다. 1729년 3월부터 매달 추첨이 진행됐고 라콘다민은 첫 추첨부터 1만3000프랑의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매달 수익을 쌓은 볼테르와 그의 여덟 친구들은 2년 후 거금을 모으게 된다.
로저 피어슨 옥스퍼드대 교수는 파리시청 복권 당첨으로 볼테르가 무려 50만 프랑을 벌었다고 말한다. 그 후에도 볼테르는 단독으로 로레인(Duchy of Lorraine) 지방 복권형 채권에 투자해 큰돈을 모으지만 그의 수법이 점차 알려지자 군수 물자·비단·시계 제조에 투자했고 그 후 부동산 거래와 사금융으로 선회하는 민첩함을 보였다.
세계로 퍼진 복권형 채권
17세기 말 출현한 복권·국채 하이브리드는 아직까지도 다양한 명칭과 파생 형태로 존재한다. 공공 금융과 사행성 투기 사이의 절묘한 결합이 정부로서는 안전하고 매력적인 재원 조달 수단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복권형 채권은 볼테르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동시에 중단됐지만 유럽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19세기 초 소생시킨다. 전쟁 자금을 위해 사설 도박을 억누르는 한편 복권을 통한 조세 수입 극대화를 노렸다. 그의 폐위 후 1836년 자선 용도를 포함한 일체의 복권이 금지됐다가 19세기 후반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 건설 민간 기업에 복권형 채권 발행을 허용하는 꼼수를 써 재가동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복권형 채권(Lottery Bonds)을 ‘로터리 론(Lottery Loan)’으로 고쳐 불렀다. 복권 판매를 미끼로 한 정부 빚이라는 것을 담백하게 인정한 것이다. 추첨을 분기 1회로 줄이고 상금 역시 25만 플로린(Florins)으로 제한했지만 100분의 1이라는 획기적 당첨 확률로 흥행을 이어 갔다. 그 결과 시민들 사이에 정부 채권 구매가 ‘게임처럼 활성화’됐다고 1863년 뉴욕 타임스 기사는 전한다.
종주국인 영국에서는 1826년 복권의 전면 금지와 함께 종적을 감췄다가 1956년 ‘프리미엄 채권(Premium Bonds)’이라는 모호하지만 매혹적인 명칭으로 컴백했다. 현재 국영은행(National Savings & Investments)이 관리하고 있는데 최고 5만 파운드로 투자금이 제한됐지만 소량의 국채 보유자에게도 매달 진행되는 최고 100만 파운드 상금(당첨 확률 2만4000분의 1)의 당첨 권리가 주어진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복권형 국채는 더 번져 갔다. 브라질·쿠바·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파키스탄·스웨덴·덴마크·아일랜드 등 30여 개국이 변형된 이름으로 활용해 왔다. 예컨대 뉴질랜드는 1970년부터 ‘보너스 채권(Bonus Bonds)’이라는 아리송한 명칭을 써 운영해 왔는데 2000년대 촉발된 세계 금융 위기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저금리 기조 때문에 2020년부터 중단됐다. 미국은 매우 특별한 사례다. 국채는 물론 민간 기업 채권에도 복권을 연계한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상금 연계 예금 계좌(PLSA)’라는 요상한 금융 상품을 슬쩍 출시했는데 ‘상금 연계’는 실상 ‘복권 연계’라는 말의 우회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사행성 복권과 버젓한 금융이 동거한다는 사실에 거북함을 느낀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2009년 이후 ‘거대 상금 예금(Big Prize Savings)’ 또는 ‘행운의 예금(Lucky Savers)’이란 암호화된 명칭으로 복권형 저축 상품들이 번져 가고 있다.
첫 질문, 볼테르의 복권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투자였을까, 도박이었을까. 사실 복권과 채권의 구분 그리고 도박과 투자의 분리는 우리 시대의 금융 정서이자 집착일 뿐이다. 볼테르의 시대는 보험·채권·주식·연금·복권이 합종연횡하던 근대 금융의 미명이었다. 평생 연금을 경품으로 내건 복권도 이 시기 등장했고 보험·복권·연금의 혼종성을 띤 톤틴(Tontine)도 이즈음 출현했다.
오늘날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어떤 것은 투자고 다른 어떤 것은 도박이라는 이항대립은 현대가 만들어 낸 신화이자 고의적 착시일지 모른다. 순수한 투자도, 절대적 투기도 없다. 다만 객관적 확률과 주관적 기대치 간의 긴장 어린 편차만 존재할 뿐이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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