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오산시 세교2 A6블록 아파트 주차장에 보강 공사를 위한 잭 서포트가 설치돼 있다./연합뉴스
경기도 오산시 세교2 A6블록 아파트 주차장에 보강 공사를 위한 잭 서포트가 설치돼 있다./연합뉴스
아파트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 무너졌다. 후폭풍도 거세다. 아파트 단지 하나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발주한 아파트 중 20개 단지의 철근이 누락된 것으로 조사됐다.

건설 이권 카르텔과 부실 시공의 민낯도 드러났다. 설계부터 감리, 콘크리트 타설에 이르기까지 시스템 전반에 걸쳐 후진적인 관행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국민 안전과 직결되는 사안인 만큼 아파트에 대한 불신과 불안도 커졌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우리 아파트 무량판 구조인지 알아보는 법’ 등이 퍼졌고 철근 누락을 빗대 ‘순살 아파트’라는 오명도 붙었다. LH 입주자 커뮤니티에는 “신뢰가 없다. 뭘 빼먹었을지, 어떤 카르텔이 있었을지 무너지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식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무량판’은 죄가 없는데…포비아 확산
경기도 파주시 초롱꽃 마을 3단지(파주 운정 A34) 지하주차장에서 보강 공사를 위해 천막이 설치되어 있다./연합뉴스
경기도 파주시 초롱꽃 마을 3단지(파주 운정 A34) 지하주차장에서 보강 공사를 위해 천막이 설치되어 있다./연합뉴스
시작은 LH가 발주하고 GS건설이 시공한 인천 검단 신도시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었다. 지난 4월 이 아파트 202동과 203동 사이 지하 1층 슬래브(지붕층·1104㎡)가 먼저 주저앉았고 이 무게를 견디지 못한 지하 2층 슬래브(185㎡)도 뒤이어 무너졌다.

붕괴의 핵심 원인 중 하나로 무량판 구조물의 핵심 재료인 ‘전단보강근(철근)’ 누락이 지목됐다. 무량판은 ‘없을 무’와 ‘대들보 량’으로, 대들보가 없는 건축물 구조다. 일반적으로 기둥이 천장을 잘 지지하려면 기둥과 천장 사이에 보를 연결한다. 이를 라멘식 구조라고 한다. 기존 라멘식 구조와 달리 무량판 구조는 천장을 지탱하는 게 기둥뿐이다.

이 때문에 천장과 기둥을 결속시켜주는 전단보강근을 꼼꼼하게 감아 줘야 한다. 천장 하중을 견디지 못하면 기둥이 슬래브를 뚫는 일명 ‘펀칭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무량판 구조 자체에는 죄가 없다고 말한다. 보 없이 기둥으로만 천장을 지탱하는 방식인 무량판 공법을 도입했을 때 인건비는 물론 공사비가 크게 절감되고 층고를 비롯해 비교적 더 넓은 지하 주차장 공간 확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LH 역시 무량판 공법을 도입해 공사비를 750억원 정도 절감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삼성동 아이파크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 될 사우디아라비아 ‘제다타워’도 구조 설계에 무량판 구조를 택했다.

최원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교수(건축공학과 박사)는 “대부분의 건물은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들어서는 코어가 건축물 전체를 지탱하고 있다”며 “웬만한 건축물은 이 코어가 건물 전체의 균형을 잡아 주기 때문에 아주 심하게 부실 시공이 된 부분이 없는 한 무량판 구조라고 해서 무너질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전단보강근 빼먹어도 이익 안 남아”…시공 아닌 감리·설계 문제?
이한준 사장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LH 서울지역본부에서 열린 사장 주재 회의에서 최근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와 관련한 사과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이한준 사장이 지난 2일 오후 서울 강남구 LH 서울지역본부에서 열린 사장 주재 회의에서 최근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와 관련한 사과 인사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무량판 구조물의 핵심 재료인 철근은 왜 누락된 것일까. 일부에서는 “시공사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철근을 빼먹었다”는 비난이 나오지만 사실이 아니다. 건설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전단보강근을 의도적으로 빼먹을 가능성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A 건설사 관계자는 “마치 시공사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전단보강근을 빼돌린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기둥에 들어가는 전단보강근은 다른 철근보다 훨씬 얇고 단가도 싸 굳이 빼돌릴 이유가 없다”며 “지금 문제가 되는 것도 설계와 감리인데 책임을 지는 행동은 건설사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현재 공사 중인 단지는 공사비에서 안전 점검 비용을 충당하고 이미 준공한 단지는 시공사가 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점검 이후 결과에 따라 시공사가 설계사에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정했다.

이에 건설사들은 안전 점검 비용을 일단 시공사가 부담하라는 의미는 일종의 책임 전가가 아니냐는 분위기다.

실제 검단 단지 붕괴 뒤 LH 전수 조사에서 철근 누락이 확인된 21개 단지 사례를 보면 문제는 ‘설계-시공-감리’ 전 단계에 걸쳐 있었다. 특히 누락 원인이 파악된 단지 중 10개 단지에서 ‘설계 오류’가 확인됐다.

최원철 교수는 “설계에서부터 전단보강근이 빠지는 것은 굉장히 비상식적인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무자격자들이 구조 설계 프로그램이나 시스템도 없이 엉터리로 설계했다는 얘기”라며 “애초에 설계도면이 엉터리라면 감리에서 오류를 잡아 내기도 어려운 데다 현장에서는 코로나19 시기에 숙련된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거나 비자가 만료돼 고국에 돌아가면서 전문 인력이 부족해지자 복합적인 문제가 얽혀 발생한 일”이라고 진단했다.

설계 과정에서도 하청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품질 관리가 제대로 안 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한국콘크리트학회 소속 최경규 숭실대 건축학부 교수는 “전단보강근이 누락된 상황은 과거보다 더 숙련공이 부족하며 구조적 지식이 거의 없어 시공 오류를 찾아내지 못하는 감리 업체의 비전문성에 기인했다”며 “이 밖에 초저가의 설계 업무 환경, 설계·시공사의 수주 후 재하청 등으로 업무가 분절되는 것도 큰 이유”라고 말했다.

LH 등 발주처가 설계 용역을 주면 건축사(설계 총괄)가 구조기술사(하중 등 건물의 구조 계산)에 구조 설계를 재용역하고 또 구조기술사는 제삼의 영세 업체에 구조 도면을 그리게 하는 게 통상적이다. 세 주체가 구조 계산 검증을 철저히 해야 안전이 보장되는 구조다.

다음 단계인 감리에서도 문제가 발견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직접 감리를 맡은 공사장의 82%에서 법이 정한 감리 인원 정원도 채우지 않고 공사를 진행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감리는 공사 단계마다 설계대로 시공되는지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시정 또는 공사 중지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LH가 발주한 아파트에서는 감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장철민 의원실이 LH에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1~7월 LH가 자체 감리를 맡은 공사 현장은 104곳이다. 이 가운데 85곳(81.7%)은 법이 정한 감리 정원조차 채우지 못한 상태로 공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19명이 배치돼야 하는 공사 현장에 4분의 1도 안 되는 4명만 투입한 현장도 있었다. 최근 지하 주차장 철근 누락이 확인된 단지 중 자체 감리를 한 4곳은 모두 필요한 감리 인원을 배치하지 않은 채 공사를 해 온 사실도 확인됐다.뿌리 깊게 자리 잡은 ‘엘피아’
이 과정에서 건설업계에 뿌리 깊게 자리한 이권 카르텔도 드러났다. LH는 업계에서 ‘엘피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관예우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공공 주택 설계, 감리 업체 공모에서 LH 퇴직자가 재취업한 곳이 상당수 일감을 따가는 경우가 많아 소위 전관예우에 의한 ‘인맥 수주’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LH나 건설사에서 퇴직한 인물이 감리 업체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로 국토교통부가 전날 공개한 LH의 철근 누락 아파트 15개 단지 중 일부는 LH 고위직 출신 인사가 취업한 업체에서 감리를 맡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LH에서 근무한 2급 이상 퇴직자가 최근 5년간 재취업한 용역 업체 수는 9개사이고 이들 업체가 LH와 2019년부터 올해까지 계약한 설계·감리 건수는 203건, 2319억원에 달했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건설 이권 카르텔을 근절할 방침이다. 이와 관련해 국토부는 오는 10월 LH 전관과 관련된 건설 이권 카르텔 해소 종합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8월 16일에는 경찰이 LH본사를 압수 수색했다.

후폭풍에 휩싸인 LH는 설계와 감리 등 용역계약 체결 절차를 전면 중단한 데 이어 이미 체결을 마친 전관업체와의 용역계약까지 해지하기로 했다.

계약이 해지되는 전관 업체는 LH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의 철근 누락 사실을 발표한 지난 달 31일 이후 계약을 체결한 곳이다. 해당 업체는 총 11건, 648억 원 규모다.

LH는 입찰 또는 심사 절차가 진행 중인 설계, 감리 용역 23건에 대해서도 후속 절차를 전면 중단하기로 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