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금 상환 지원제도’ 참여 기업, 2년 만에 15배 증가
인력난에 신입→관리직까지 임금인상 현상 확산

일본 종합설비기업 도에넥(TOENEC) 채용 페이지 사진. 사진=TOENEC
일본 종합설비기업 도에넥(TOENEC) 채용 페이지 사진. 사진=TOENEC
종합설비기업 도에넥(TOENEC)은 일본 중부(나고야) 지역의 전력 공급을 담당하는 주부전력의 자회사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전 자회사인 셈이다. 근로자 수 4808명에 매년 2000억 엔(약 1조8199억원) 안팎의 매출과 100억 엔(약 91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올리는 알짜 대기업이다.

본사는 나고야에 있고, 주식은 도쿄증시 최상위 시장인 프라임 시장에 상장돼 있다. TV·라디오 광고도 적극적이어서 인지도가 낮은 기업이라고 보기 힘들다. 직원 평균연령이 41.53세, 평균 근속연수는 19.37년으로 늙은 기업이라고도, 직원들의 애사심이 부족한 기업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에넥에는 주홍글씨처럼 붙는 딱지가 있으니 건설업종이라는 점이다. 일본 역시 3D의 대표적인 업종으로 분류되는 건설업은 젊은 인재들이 기피하는 산업이다. 기피 대상 건설업계, 신입사원 위해 학자금 대출 변제
도에넥이 올초부터 학자금 대출 변제 제도를 도입한 이유다. 직원들이 대학 시절에 진 학자금 대출 일부를 회사가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지원 금액은 매월 최대 1만 엔(약 91만원)이다. 내년 4월 200명이 입사하는데 이미 50명이 이 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미야케 다쓰야 도에넥 채용그룹장은 “저출산으로 (일자리보다 취업희망자 수가 적은) 취업자 우위 시장이 거세지고 있다. 인재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학자금 대출 변제 제도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히로시마의 중견 건설회사 미야타건설이 내건 조건은 더 파격적이다. 이 회사는 내년 대졸 신입사원에 대해 매월 갚아야 하는 대출금의 50%까지 총 200만 엔을 대신 갚아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미야타건설의 대졸 신입직원 초임 월급은 23만 엔으로 비슷한 조건의 기업에 비해 결코 나쁘지 않다. 하지만 매년 5명 정도의 신입 직원을 뽑으려 해도 실제 채용 인원은 1~2명. 빚을 대신 갚아준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게 된 배경이다. 미야타건설 관계자는 “이 제도를 통해 우리 회사가 조금이라도 구직자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이타현의 건설회사 헤이와건설도 올봄 대졸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총 상환액의 50%까지 최대 250만 엔을 대신 갚아준다. 이 회사가 제도를 도입한 이유 역시 “대졸 구직자들이 우리 회사를 바라봐 주신다면”이다.

직원 학자금 변제는 보통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의 ‘장학금 상환 지원제도(학자금 변제 제도)’를 이용한다. 기업이 JASSO에 직원의 상환 금액을 송금하면 JASSO가 직원 대신 대출금을 갚아주는 방식이다. 2021년 4월 이 제도를 시작할 때만 해도 65곳이었던 이용 기업이 올 7월 말 현재 972곳으로 늘었다. 이용자 수도 2021년 813명에서 2022년 1708명, 올해 7월 말은 2057명으로 증가해 예상을 웃돌고 있다.

기업들이 학자금 대출을 대신 갚아주면서까지 신입사원을 서로 모실 정도로 일본의 인력난은 심각하다. 대출 변제라는 조건을 신입사원 모집에 내걸 수 있게 된 것은 문부과학성 산하기관인 JASSO의 제도적인 지원 덕분이다.

JASSO의 학자금 변제 제도가 생기기 전까지 대출금을 대신 갚아주려는 기업은 직원의 급료에 학자금 상환분을 얹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환금액을 얹어주는 만큼 고스란히 소득이 늘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원이 물어야 하는 소득세가 증가했다. 또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사회보험료도 더 내야 했다.

JASSO의 학자금 변제 제도를 활용하면 기업이 직원 대신 내주는 대출 상환금은 원칙적으로 보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소득세도 사회보험료도 오르지 않는다. 기업은 기업대로 대신 갚아준 대출금을 손금(손실) 처리할 수 있어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빚을 대신 갚아주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종합상사, 대형 시중은행 등 전통적으로 대졸자들의 인기가 높은 기업들이 벌이는 인재쟁탈전도 치열하다. 경쟁이 얼마나 뜨거운지 ‘임금정체 영구동토’라고까지 불리던 일본의 지독한 임금 정체를 녹일 정도다. 인재 유치 경쟁에 낮았던 임금도 상승세
일본 3대 메가뱅크는 전통적으로 문과 출신 졸업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 가운데 하나다. 메가뱅크의 대졸 초임 월급은 오랫동안 20만 엔(약 181만원) 수준에 묶여 있었다. 다른 업종의 초임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사원에 따르면 2022년 4월 민간기업의 대졸 사무직 평균 초임은 20만7878엔(약 188만원)이었다.

일본의 임금이 얼마나 오르지 않았는지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미국 컨설팅 기업 머서의 2021년 조사에서 일본 대기업 부장의 연수입이 싱가포르·미국뿐 아니라 태국·말레이시아보다 적은 것으로 나타나 일본인들을 쓴웃음 짓게 했다.

2022년 조사에서도 일본 대기업 부장의 평균 연수입은 12만8351달러로 미국의 42%에 그쳤다. 입사 3년 차 사원의 연수입 역시 미국의 47%에 그쳤다. 중국에 비해서는 7년 차면 급여가 역전되고 부장급은 중국의 50%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력난이 극심해지면서 올 들어 만년 정체 상태이던 일본의 임금수준이 급변하고 있다. 메가뱅크 2위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은 2023년 입행 대졸자들의 초임을 25만5000엔으로 5만 엔(24%) 올렸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이 임금을 올린 건 16년 만이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 관계자는 임금을 인상한 이유로 “학생의 가치관이 다양해진 데다 인재의 유동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급여를 올리지 않으면 신입 행원을 뽑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미쓰이스미토모가 움직이면서 나머지 메가뱅크들도 손을 놓고 있어서는 우수한 신입 행원을 뺏길 처지가 됐다. 1위 미쓰비시UFJ가 즉각 5만 엔을 인상했고, 3위 미즈호는 2024년 초임을 5만5000엔 올리기로 했다. 메가뱅크 관계자는 “고액의 보수를 제시하는 종합상사와 컨설팅 회사에 밀리지 않는 수준이어야 채용경쟁에서 지지않는다”고 설명했다.

20여 년 만에 월급을 대폭 올렸지만 우수한 인재들이 메가뱅크로 몰릴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메가뱅크의 라이벌 종합상사도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최대 종합상사인 미쓰비시상사는 올해 4월 입사한 대졸 신입직원의 초임을 30만5000엔으로 1년 전보다 5만 엔 올렸다. 나머지 종합상사들도 인재 쟁탈전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임금인상 도미노를 벌였다.

선망받는 직장인 종합상사와 메가뱅크조차 신입사원 임금인상 경쟁을 벌이는 이유는 역시 인력난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리크루트웍스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3월 졸업 예정자의 구인배율은 1.71배로 2023년 졸업자의 1.58배보다 0.13포인트 상승했다.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내년 대학 졸업자는 일자리 1.71개 가운데 하나를 골라갈 수 있다는 의미다.

신입직원의 임금이 이렇게 오르는데 기존 직원의 급여가 오르지 않을 리 없다. 지금까지 춘계 임금협상의 대상 밖이었던 관리직과 고령 근로자들에게까지 임금인상의 도미노가 파급되고 있다.

전자 부품기업인 오키전기공업은 올해 4월 직급정년 제도를 폐지했다. 지금까지는 56세까지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한 관리직은 직급을 떼는 동시에 급여가 최대 15% 감소했다. 앞으로는 60세까지 직급을 유지할 수 있고, 급여도 동일하게 지급하기로 했다. 60세가 넘더라도 관리직에 남을 수 있는 길도 열었다. 오키 관계자는 “중도 채용시장의 경쟁이 격렬해져 젊은 사원 채용과 시니어 근로자 유지라는 두 가지 궤도를 병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오기노 노보루 노동정책연구·연수기구의 리서치 펠로는 “인력난을 계기로 영구동토 같았던 대졸 초임 인상과 관리직 및 시니어 직원의 처우개선이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