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반도체 그 이후 넥스트K가 온다]
컨테이너 하역 중인 부산항. 사진=연합뉴스
컨테이너 하역 중인 부산항. 사진=연합뉴스
[편집자주] 미국·중국 갈등과 두 개의 전쟁, 글로벌 경기침체로 글로벌 산업지도가 격변하고 있다. 그동안 경제성장을 견인했던 반도체산업과 중국 수출 중심의 기존 성장 전략이 한계를 맞고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이 부진하면 기우제를 지내듯 반도체 경기회복과 중국만 바라보는 ‘천수답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빈약한 수출 선수층을 두껍게 해야 할 때다. 한경비즈니스는 세계 시장에서 ‘K-수식어’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한국의 전기차·배터리·방산·원전·바이오·식품·콘텐츠·금융·패션뷰티 산업을 ‘넥스트K’로 주목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망 신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수출품목을 다변화하고 반도체 등 핵심 기술개발에 투자해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확대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경기 화성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클린룸에서 직원이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경기 화성의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클린룸에서 직원이 웨이퍼 원판 위 회로를 만드는 데 쓰는 기판인 포토마스크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제공
한국 수출이 변곡점을 맞고 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답게 수출은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한계가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전체 수출의 절반 이상이 상위 10대 품목에 집중돼 있고, 10대 품목도 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없어 주력 품목의 고령화가 심각하다. 이들 주력 품목의 경쟁력도 떨어지고 있다.

한국의 수출이 반도체와 중국에 편중돼 있어 수출상품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수출이 특정 품목과 주요국에 편중돼 있으면 일부 지역의 수출규제나 업황 의존도가 높아 글로벌 경제침체나 자국우선주의 등에 더 취약해진다.

이미 충격은 현실이 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누적 무역적자 규모가 264억6700만달러(약 36조원)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무역협회가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인용해 국가별 수출입 통계를 집계한 결과다. IMF가 집계한 208개국 가운데 무역수지 순위는 200위로 주저앉았다. 무역 규모가 의미없는 나라가 다수 포함돼 있어 순위 자체가 에 의미를 크게 둘 필요는 없지만, 현재 한국의 수출이 심각한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처럼 특정 품목 및 국가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대외 환경 변화로 인한 수출 충격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 수치다. 중국의 성장둔화에 따른 구매력 약화와 금융 변동성 확대는 전 세계 경제와 산업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만, 특히 중국 의존도가 높은 국내 산업에는 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자료: 맥킨지앤드컴퍼니·그래픽=박명규 기자
자료: 맥킨지앤드컴퍼니·그래픽=박명규 기자
“20년째 주력 수출상품 변화 없어”

한국무역협회와 유엔의 국제무역 통계를 분석한 결과 한국의 2020∼2022년 수출 품목 집중도는 779.3포인트로 세계 10대 수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한국의 전체 수출액 중 반도체가 포함된 전기장치·기기가 20.2%, 자동차가 10.5%를 차지하는 등 특정 품목 의존도가 높다는 얘기다.

상위 10대 품목의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의 68.7%로 10대 수출국 평균인 58.8%보다 9.9%포인트 높다. 지역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한국 수출의 24.5%가 중국, 15.2%가 미국에서 이뤄지는 등 특정 국가에 대한 수출 의존도도 10대 수출국 중 2위였다.

품목별로 보면 취약성은 더 분명해진다. 2022년 반도체의 중국 수출 의존도는 40%에 이르렀다. 중국에 대한 수입의존도는 높아진 반면 대중 수출은 양적·질적으로 정체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국산화 정책에 의한 중간재 자립도 향상, 중국과의 기술격차 축소로 한국의 수출경쟁력이 빠르게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한국 경제를 ‘서서히 뜨거워지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했던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앤드컴퍼니는 최근 10년 만에 한국 경제를 분석한 ‘한국의 다음 S-곡선(Korea’s Next S-Curve)’ 보고서를 내고 “한국의 대표 수출상품이 20년간 고작 한 품목만 바뀌었다”며 “그만큼 역동성이 사라졌다”고 꼬집었다.

한국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2000년 이후 20년 넘게 장기화하고 있다는 게 맥킨지의 진단이다. 2000년 12위였던 세계 GDP 순위는 올해 13위로 20여 년간 변화가 없다. 2005년과 2022년 수출 상위 10개 품목의 변화도 디스플레이 한 품목만이 새로 추가됐을 정도로 주력 수출품목의 고령화도 심각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7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제주포럼에서 “우리 경제가 지난 10년간 중국 특수에 중독돼 구조개혁의 시기를 놓쳤다”고 쓴소리를 한 바 있다. 이 총재는 “한국이 새로운 산업으로 변화해 갔어야 하는데 패러다임 전환에 나서지 않고 중국의 낮은 임금을 향유하며 10년간 안주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한국 수출, 세계 6→8위로 추락

반도체에만 의존하는 사이 한국의 세계 수출 시장점유율은 2018년 3%대에서 2022년 2.74%로 떨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강타한 이래 가장 낮은 수준이다. 수출 경쟁력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세계 수출 순위도 6위에서 8위로 하락했다.

미국·중국 갈등과 글로벌 경기 부진 속에 주력 수출품목인 반도체와 중국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줄어든 결과다. 수출 점유율이 0.1%포인트 하락할 경우 약 14만 개의 일자리 감소 효과가 나타날 정도로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끼친다. 한국이 반도체·철강·석유화학·디스플레이 등 중간재 위주 수출산업 구조를 갖추고 있어 글로벌 경기 악화의 타격을 크게 입은 것이다.

한국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도 2021년 19.9%에서 2022년 18.9%, 올해 1분기에는 13.6%로 하락했다. 수출에서 반도체의 비중이 15% 미만으로 떨어진 것은 2016년 이후 7년 만이다. 1분기 기준 자동차·부품 합산 수출액이 반도체를 제치고 무역수지 1위 품목에 올라서기도 했다. 주요 대미 수출 품목인 자동차·부품 수출이 양호한 흐름을 보이며 전체 자동차 수출도 호조를 보인 것이다.

한국 전체 교역의 20%를 차지하는 대중 수출 부진은 지속되고 있다. 미·중 갈등과 맞물려 대중 수출 비중이 줄고 대미 수출 비중은 늘어나며 한국의 무역구조가 바뀌고 있다. 대미, 대중 수출 비중 격차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에 따르면 2022년 22% 수준이었던 대중 수출 비중이 올해 들어 19%대로 떨어진 반면 대미 수출 비중은 16%에서 18%로 높아졌다.
현대차 아산공장 승용차 생산라인. 사진=현대차 제공
현대차 아산공장 승용차 생산라인. 사진=현대차 제공
반도체·중국→자동차·미국…수출 엔진 이동

반도체 부진과 자동차 호황 속에 한국의 수출 대상 1위 국가가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올해 1분기 주요 품목별 대중 수출은 반도체(-44.6%), 석유제품(-20.6%), 석유화학(-26.2%), 철강(-23.9%), 자동차부품(-34.0%), 디스플레이(-52.8%), 2차전지(-38.7%) 등에서 모두 큰 폭으로 하락했다.

반면 대미 수출은 올해 1분기 72억 달러 흑자를 기록하며, 미국이 한국의 1위 무역 흑자국이 됐다. 이 기간 대미 수출을 품목별로 보면 석유제품(30.5%), 석유화학(24.7%), 철강(26.6%), 자동차부품(16.2%), 2차전지(50.0%), 플라스틱제품(15.9%) 등 총 7개에서 수출액이 증가했다.

올해 5월까지 한국 전체 수출에서 대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27%에서 19.6%로 급격히 하락했다. 같은 기간 미국 수출 비중은 12%에서 18%로 늘어 2002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런 추세라면 월간 기준으로 대미 수출이 대중 수출을 20년 만에 뛰어넘을 수 있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전문가들은 지금이 구조개혁을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보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중심으로 산업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수출을 살리기 위해선 수출 지역과 품목 다변화, 산업 경쟁력 강화 등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필수적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망 분야 중심으로 수출품목을 다변화하고 반도체 등 핵심 기술개발에 투자해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확대해야 한다. 맥킨지는 최근 발표한 한국 경제 보고서를 통해 수요 감소와 같은 리스크가 있는 석유화학 산업은 과감한 구조개편이 필요하다고 조언하며 모빌리티, 청정에너지, 바이오 제약, 반도체 등 분야에서 초격차 산업을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실장은 “특정 품목·국가에 편중된 수출구조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수출시장 다변화와 함께 연구개발(R&D) 등 민간의 혁신 지원 확대를 통해 경쟁력 있는 품목을 다양하게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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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