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2023 비트코인 컨퍼런스'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한국경제
지난 5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2023 비트코인 컨퍼런스'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한국경제
약 15년 남짓 짧은 크립토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은 일관된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내러티브가 탄생하고, 이를 홍보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대중의 관심을 자극한다.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 대비 과도한 기대가 생기고 투기 세력이 붙으면서 관련한 크립토 가격이 급등한다. 더 많은 시장참여자가 들어오고 매수세가 붙으면서 버블이 형성되지만 얼마가지 않아 결국 버블은 터진다. 관련한 내러티브는 아예 자취를 감추거나, 아니면 보다 진보한 형태로 발전하여 마침내 기대와 현실이 어느 정도 합의를 이루게 된다.

다음의 예를 보자. 2009년 출시된 비트코인은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개인 간 거래가 가능한 대안 화폐로 주목받았다. 따라서 초창기 비트코인을 지칭하는 용어는 ‘가상화폐’ 혹은 ‘암호화폐’였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결제 수단으로 쓰이길 바랐던 비트코인 커뮤니티의 꿈은 비트코인의 제한적인 확장성과 높은 가격 변동성으로 인해 아직까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비트코인 결제를 받는 상점이 존재하고 엘살바도르 같은 제3세계에서는 비트코인을 법화로 채택하기도 했지만, 아직은 예외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글로벌 컨설팅사 EY 블록체인 책임자 폴 브로디는 비트코인이 결제 수단보다는 자산으로 기능한다고 밝혔는데 실로 그렇다. 현재 기준 비트코인은 화폐라기보다는 투기성이 짙은 대체 자산으로 기능하는 것이 현실이다.

비트코인의 등장 이후 2015년 출시된 이더리움 백서에는 ‘차세대 블록체인’이라는 표현이 제목으로 들어가 있다. 이더리움 재단은 비트코인보다 진보한 블록체인 네트워크라는 것을 강조하며 비트코인이 주창한 ‘화폐’의 특성보다는 ‘스마트 컨트랙트 블록체인’이라는 내러티브를 유행시켰다.

이후 블록체인 2.0, 블록체인 3.0 등의 수식어를 단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탄생했고, 오늘날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의 대안으로 등장한 L1(레이어1)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10개가 넘는다. 비트코인 이후 유의미한 성과를 보여준 차세대 블록체인은 이더리움이 대표적이지만 이외에도 솔라나, 아발란체 등 ‘이더리움 킬러’를 표방하는 차세대 블록체인들이 등장하며 이더리움과 공생하고 있다.

이더리움과 스마트 컨트랙트 블록체인이 등장한 이후 프로그래밍이 용이해지고 알트코인 생태계가 확장되면서 실로 수많은 내러티브가 등장했다. 예를 들어 금융기관의 중개없이 P2P 금융 거래가 가능한 탈중앙 금융(Defi)은 2020년부터 2021년 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Defi 생태계에 유입된 자금은 2020년 한 해에만 약 25배 성장하며 대출, 중개, 투자,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태계를 형성했다. 탈중앙화, 효용 입증하지 못한 채 투기꾼 놀이터로그러나 은행 서비스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는 전 세계 17억 명 사람들을 위한 대안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명분과는 달리 Defi는 별다른 효용을 입증하지 못하며 투기꾼들의 놀이터로 전락했고 루나-테라 생태계의 몰락, 수많은 해킹 사건 등이 터지며 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현재 Defi에 유입된 자금은 최고점 대비 약 75% 이상 하락한 상황이다.

Defi의 뒤를 이어 2021~2022년 실로 무수히 많은 내러티브가 새롭게 등장했다. NFT는 창작자에게 보다 많은 권리를 부여하고, 기존에 사용자들이 소비하고 즐기는 문화를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며 등장했다. 우스꽝스러운 JPEG 이미지가 한때 수천만원, 수억원에 거래되고, 온라인 SNS 에 비싼 NFT를 프로필로 설정해 과시하는 풍조도 생겼다.

특이점은 스타벅스, 나이키, 롯데, 신세계 같은 기존 대기업들도 NFT 관련 사업을 직간접적으로 진행하며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대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NFT 시장은 2023년 들어 침체기를 맞았고, 주요 NFT들의 가격과 거래량은 최고점 대비 80~90% 수준으로 폭락했다.

느슨한 형태의 탈중앙자율조직(DAO)은 기존의 국가, 회사, 조직, 투자사 등을 전면적으로 대체할 것이라는 비전을 품고 등장했다. 그러나 시장이 침체되고 시장참여자들이 이탈하면서 상당수 DAO는 사실상 운영되지 않는 좀비 DAO로 전락했다. 필자 주변에서도 DAO를 하겠다고 한 지인들이 꽤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운영진끼리 불화가 생기거나, 상당한 기여를 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보상이 제공되지 않거나, 프리라이더를 낳는 등 여러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며 DAO는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사실상 글로벌 시장에서도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DAO를 많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필자는 인간이 운영하는 DAO는 가벼운 동아리·커뮤니티 수준에 머무를 뿐 이것을 체계화·사업화하는 시도는 공산주의의 역사를 그대로 답습할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인간이 개입하지 않고, 인공지능(AI)에 의해 운영되는 DAO가 등장한다면 어쩌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P2E게임과 X to Earn은 놀면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등장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관련 크립토 가격이 하락하고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무엇보다도 콘텐츠의 핵심 요소인 ‘재미’가 없다는 것이 무수히 많은 ‘X to Earn’ 프로젝트들이 실패한 요소일 것이다.

메타버스도 마찬가지다. 현실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 디지털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등장한 수많은 메타버스 프로젝트 중에서 현재 기준 100만 명 이상의 실사용자를 확보한 곳은 하나도 없다. 메타의 CEO 마크 저커버그 역시 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바꿀 정도로 메타버스에 주력했지만, 아직까지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분기당 조 단위 적자를 내고 있다.

2020년과 2022년에 등장한 수많은 내러티브를 함축하는 거대한 개념은 ‘Web3’이다. 사용자의 관점에서 Web1이 읽기, Web2가 읽기와 쓰기였다면, 읽기·쓰기 그리고 소유까지 가능하게 한 것이 Web3의 콘셉트다. 쉽게 말해 Web3는 민주적이고 개선된 형태의 인터넷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Web3가 자동차라면 크립토는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으로 비유할 수 있겠다. 필자는 Web3를 처음 주창하고 마케팅을 한 이들을(대표적인 예로 글로벌 크립토 VC a16z가 있다) 최고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Web3는 적대적인 세력을 만들지 않고서도(가상화폐, 암호화폐를 중앙은행과 정부가 반길 리 없다) 진보한 느낌을 주며(웹2는 구식, 웹3는 신식), 개념이 다소 추상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내러티브가 제시하는 ‘꿈의 유효기간’이 적어도 향후 수년은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2년과 2023년을 지배한 내러티브는 L2, zk, RWA, 소셜파이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더리움 L1을 보조하는 아비트럼, 옵티미즘, 베이스, zKSync, 맨틀 스타크넷 등 무수한 L2들이 출시되며, 기존에 존재하던 이더리움 킬러 L1들의 지위를 위협했다.

또한 zk(zero knowledge, 영지식 증명) 관련 인프라도 발행시장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현실세계의 자산을 토큰화하는 RWA(Real World Asset) 역시 주목받는 내러티브 중 하나였다. 아직까지 유의미한 규모의 RWA는 달러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 코인 정도인데(USDT, USDC가 대표적이다), RWA의 대상이 점진적으로 미국채, 부동산 등으로 확대되고 있는 양상이다. 마지막으로, 소셜파이는 사용자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개인의 명성과 영향력을 사고팔며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로, 프렌드 테크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이외에도 크립토 시장에 존재하는 내러티브는 더 많다. 필자가 위에 언급한 것들만큼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의도적으로 뺀 부분도 있고, 무지해서 놓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꾸준히 새로운 내러티브의 생성과 소멸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이 시장의 특징이다. 성과 없이 ‘꿈’으로 버블을 만들어내는 시장크립토만큼 실질적인 성과 없이 새로운 내러티브가 제시하는 꿈 만으로 이토록 빠르게 버블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업계는 많이 없다. 꿈이 있는 곳에 자본과 인재가 몰리는 벤처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끊임없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것도 크립토 업계 시장참여자들의 능력이라 할 수 있겠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비트코인 가격은 블랙록을 비롯한 현물 비트코인 ETF 승인 신청 기대감으로 인해 3만4000달러를 형성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2024~2025년을 강세장으로 점치고 있는데, 이는 비트코인 현물 ETF, 비트코인 반감기, 금리인하(혹은 인상 중지), 미국 대선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만약 강세장이 도래한다면, 다시금 피리 부는 사나이는 등장할 것이다. 그가 새로운 내러티브를 형성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면, 투기세가 붙고 버블이 형성되면서 꺼지는 기존의 패턴이 반복될 것으로 예상한다. 다음의 내러티브는 무엇일까? 아무도 모른다. 다만 크립토 VC 업계에 돈이 몰리는 트렌드를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글로벌 크립토 투자사 알파논스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크립토 VC 투자 트렌드에서 Cefi, NFT, 게임 섹터에 몰리는 투자금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반면에 Defi, 소셜, 인프라에 몰리는 투자금은 상대적으로 견조한 추세였다. 그리고 AI가 적용된 크립토 관련 솔루션에 최근 들어 돈이 몰리는 점은 인상적이다.

AI와 크립토의 결합에 대해서는 아직 유의미한 사용 사례가 없다. 다만 크립토에 특화된 AI 검색엔진(챗GPT와 유사한 솔루션), 진위 여부 증명, 보안, 가상 아바타, 분산 GPU, AI DAO 등등 아직은 구체화되지 않은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수년 내 AI와 크립토에 관한 꿈을 이야기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더 많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AI와 크립토의 결합을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을 권한다.


한중섭 ‘어바웃 머니’, ‘비트코인 제국주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