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수주산업, 고성장기 ‘재벌 리더십’ 바탕으로 성장
금융위기 여파로 주인 바뀌며 부침 겪어

대우건설이 2020년 준공한 아프리카 보츠와나 ‘카중굴라 교량’  사진=대우건설
대우건설이 2020년 준공한 아프리카 보츠와나 ‘카중굴라 교량’ 사진=대우건설
“건설은 대표적인 수주산업으로 지금 공사를 따더라도 매출이 언제 발생할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긴 안목의 투자가 필요하다. 건설업이 오너경영 체제하에서 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30여 년간 건설업에 종사한 한 관계자가 말했다.

섭씨 40도의 날씨, 모래바람을 맞으며 중동 현장의 더위와 싸워야 했던 그 시절의 모습은 지금도 옛 건설인들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불모의 땅에서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던 우리 건설은 1970~80년대 석유파동을 겪던 아시아 개발도상국에 ‘오일머니’를 안겨준 수출 효자상품이자 산업의 역군이었다. 상당수 대기업들은 건설업을 기반으로 성장했거나 건설업을 통해 몸집을 불렸다.

그러나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 역시 짙었다. 건설업은 본질적으로 많은 부채를 안고 외형성장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는 산업인 데다 경기 변화에 민감하다. 이 사이클에 잘못 올라탄 건설업체들은 대기업 전체를 흔들거나 몰락하게 하는 일이 반복됐다.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지각변동을 겪었다. 2020년 이후에만 대우건설, 쌍용건설, 두산건설,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등 내로라하는 국내 유명 건설사가 돌고 돌아 새 주인을 맞았다. ‘야수의 심장’이 이끌던 수주산업, 도전정신으로 성장
대우건설은 오랜 기간 현대건설과 함께 국내 건설업계 쌍벽을 이뤘다.
고(故)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1973년 도급순위 604위였던 영진토건을 인수해 건설업에 진출했다. 이 회사가 대우건설의 모태다.

대우건설의 첫 랜드마크는 서울스퀘어로 바뀐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옛 대우센터다. 오랜 기간 대우그룹 사옥이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교통부가 철도역사 앞에 짓던 건물이 화재로 흉물로 남아 있었고, 대우가 이 건물 공사를 맡아 대우센터를 지었다. 연면적 13만㎡ 규모로 당시 가장 넓은 건물이었으며 사무실 내에 기둥이 없는 구조,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최첨단 건축물이었다. 이 대우센터 준공을 계기로 대우건설은 기술력을 인정받게 됐다. 호텔롯데, 광화문 교보타워 등도 대우 작품이다. 이 밖에 대우건설은 동작대교, 울산화력발전소 등 토목, 플랜트 관급공사를 통해 기술력을 입증하며 해외진출의 기반을 닦았다.

이를 기반으로 신흥시장에 진출했다. 특히 대우건설은 당시 국내 건설업계 진출이 어려웠던 남미와 아프리카 등으로 나갔다. 리비아에서 토목, 플랜트, 건축 등 10년간 67억 달러를 수주하며 단일 국가 최대 수주액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창립 첫해 매출 6억원을 기록했던 대우건설은 10년 뒤 이를 1836배(1조760억원) 성장시켰다.

1980~90년대는 국내에서도 대형 토목, 플랜트 등 인프라 공사 발주가 많았고 중산층이 부상하면서 민영 주택시장 또한 커지던 시기였다. 서울 2호선 등 지하철과 올림픽대로(88올림픽고속도로), 월성 원전, 인천국제공항 공사 등이 이어졌다. 국내 건설사들은 한국 경제 부흥과 함께 전성기를 맞게 된다. K-건설 흔든 IMF·금융위기그러나 대우건설은 대우그룹과 운명을 함께한다. 대우그룹은 외환위기 기간인 1997년부터 2년간 22조90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 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알려지며 2000년 해체됐다. (주)대우 건설부문으로 있던 대우건설로 떨어져 나와 워크아웃에 들어간다.

2006년 대우건설의 대주주였던 자산관리공사(캠코)는 매각에 나선다. 금호아시아나 박삼구 회장은 그룹 설립 60주년을 앞두고 “우리도 제대로 된 1위 기업을 가져야 한다”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대우건설 인수에 6조6000억원을 투입한 것은 무리수였다.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지자 인수금융으로 끌어온 자금이 금호그룹을 압박했다. 그룹이 흔들리는 위기상황을 맞자 2010년 산업은행에 다시 넘기고 말았다.

이 같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대우건설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시공능력평가 1위를 기록하는 등 국내 최상위권 건설사로 남았다. 2018년 산업은행은 대우건설 매각에 나섰다. 호반건설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됐지만 우발채무를 구실로 인수를 포기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대우건설과 함께 외환위기로 주인이 바뀐 또 다른 대형 건설사는 쌍용건설이다. 김성곤 회장이 창업해 1987년 재계 서열 5위까지 올랐던 쌍용그룹은 외환위기를 맞아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때 그룹 주력이던 쌍용건설이 분사됐다.
쌍용건설이 2010년 완공한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모습. 사진=쌍용건설
쌍용건설이 2010년 완공한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모습. 사진=쌍용건설
1977년 시멘트 제조업체인 쌍용양회에서 독립한 쌍용건설(당시 쌍용종합건설)은 당시 대세에 따라 창사 이듬해인 1978년 쿠웨이트 지사를, 1979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지사를, 그다음 해에는 싱가포르 지사를 설립하는 등 동남아시아, 중동 시장에 집중했다. 1986년에는 해외건설수출 10억불탑을 수상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 쌍용그룹에서 분리된 뒤인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쌍용건설은 2004년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2007년 싱가포르 대표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 샌즈호텔’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지만 자금 사정이 악화되며 법정관리를 겪기도 했다. 법정관리 중이던 2014년 12월 두바이 투자청이라는 임시 주인을 만나게 된다.

금융위기로 부침을 겪은 곳은 이들 회사뿐만이 아니다. 두산건설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를 겪은 대표 건설사로 통한다. 두산건설은 2001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 이후 신용등급이 하락하며 부도난 고려산업개발을 두산그룹이 인수한 것이 그 시작이다. 기존의 식음료 중심에서 중공업 중심 대기업으로 변신을 꾀하던 두산그룹은 두산건설이 일산 탄현에 공급한 ‘일산 두산위브더제니스’가 금융위기를 맞아 대규모 미분양에 시달리며 연쇄부도 위기에 몰린다. 결국 두산건설은 2019년 상장폐지된 뒤 두산중공업 자회사로 편입된다. 결국 찾은 새 주인, 시너지 가능할까
정원주 대우건설 회장이 2023년 시무식에 참석해 임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대우건설
정원주 대우건설 회장이 2023년 시무식에 참석해 임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대우건설
이들 건설사는 2020년 들어 새 주인을 찾았다. 일각에선 10년 만에 찾아온 건설업 호황과 시장 유동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한다.

대우건설은 중흥건설에 인수됐다. 중흥건설은 2022년 2월 인수 대금 2조1000억원 납입을 완료했다. 중흥이 주택업계에 잔뼈가 굵은 기업인 만큼 당시 대우건설 주택 브랜드인 ‘푸르지오’가 ‘중흥S클래스’와 통합되거나 토목, 플랜트, 해외사업 등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중흥이 브랜드 통합에 선을 긋는 한편, 중흥 창업주 2세인 정원주 회장이 해외 수주활동에 적극 나서면서 이 같은 우려는 불식되는 분위기다.

쌍용건설은 두바이 투자청에서 의류 제조업체인 글로벌 세아로 주인이 바뀌었다. 작년 일이다. 하지만 건설을 주력으로 하는 중흥건설과 달리 세아그룹은 수주를 위한 대규모 투자에는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건설은 표면적으로 주인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두산그룹 영향권에 놓여 있다. 2021년 투자목적회사(SPC)인 더제니스홀딩스가 두산중공업이 보유하고 있던 두산건설 지분 54%를 인수하면서 두산건설은 그룹에서 분리됐다. 그 과정에서 더제니스홀딩스는 두산중공업으로부터 2500억원 규모 두산건설 신주를 인수했는데 두산중공업이 이 SPC에 현물출자를 했다. 이에 대해 업계에선 “두산이 아직 건설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밖에 2006년 영도조선소 노사분규로 어려움을 겪었던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은 2021년 동부건설 컨소시엄에 매각됐다. 공항과 항만건설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실적을 갖춘 HJ중공업 건설부문은 주택 브랜드 ‘해모로’를 보유하고 있다. HJ중공업 인수 펀드에 출자한 동부는 2016년 부동산신탁사인 한국토지신탁에 넘어갔기 때문에 현재 HJ중공업의 주인은 한국토지신탁 그룹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한국토지신탁은 부산 영도조선소 부지 가치를 높게 봐 한진(HJ중공업)을 인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