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낸드플래시, 휴대용 노트북 개발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
2000년대 들어 원전사업 시작하며 내리막길
12월 20일 상장 폐지…영향력 제고 후 재상장 계획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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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바는 한때 반도체 산업의 메인 플레이어였다.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뒤흔들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반도체만 잘하지 않았다. 휴대용 PC 제품인 랩톱(노트북형 컴퓨터)을 세계 최초로 출시한 것도 도시바다. 20세기 IT시장은 소니와 함께 도시바가 양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IT의 황금기를 이끈 도시바가 오는 20일 상장폐지된다. 1949년 도쿄 증시에 상장된 지 74년 만이다.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의 대표 반도체 기업 도시바는 왜 이런 상황에 처했을까.반도체 왕국의 몰락도시바는 1875년 일본 도쿄에서 설립된 IT 회사로, 올해로 148년을 맞는다. △하드디스크(HDD) △반도체 △전자제품 등이 주요 사업부문이다.

도시바는 2000년 이전까지 트랜지스터 TV(1959년), 컬러 비디오폰(1971년), 일본어 워드 프로세서(1978년), 휴대용 노트북(1985년), 낸드형 플래시메모리(1987년) 등을 개발·발명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도시바가 글로벌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반도체 영향력이 커진 1980년대다.

도시바를 포함한 주요 일본 기업들은 1970년대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다. 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 주도하던 D램 시장에 도시바, NEC, 후지쓰, 히타치 등 주요 일본 기업들이 경쟁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수율(합격품의 비율)은 높으면서도 미국산 대비 10%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점유율을 공격적으로 확대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을 제치고 매출 상위 기업에 이름을 올렸다.

도시바도 그중 하나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도시바의 매출 순위는 1985년 5위(15억 달러)에서 1990년 2위(48억 달러)로 뛰었다. 2000년에는 매출이 110억 달러까지 확대하며 전체 순위 2위, 일본 기업으로는 1위를 기록했다.

도시바는 혁신을 통해 세계 최초의 기록도 여러 개 썼다. 1980년 도시바 소속의 마쓰오카 후지오 박사가 세계 최초로 ‘노어(NOR) 반도체’를 개발하며 플래시메모리 시장을 열었고, 1986년에는 ‘낸드(NAND) 반도체’까지 개발했다. 도시바는 1년 만에 상용화까지 성공하며 반도체 시장을 주도했다.

현재 사용하는 노트북의 시초인 휴대용 컴퓨터도 도시바가 1985년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이외에도 도시바는 일본 기업 최초로 전기 냉장고와 세탁기를 만들고, 전기 청소기를 선보일 만큼 영향력이 큰 기업이었다. 잘못된 신사업에 거짓말까지도시바의 위상은 21세기 들어 약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반도체 사업을 이을 차세대 먹거리로 ‘원전’을 택하면서 도시바의 운명이 달라졌다.

2017년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쓰나카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나’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원전 사업”이라고 대답할 만큼 원전은 도시바 쇠락의 시초로 지목된다.

2006년 아베 정부는 원자력발전 사업을 새로운 수출사업으로 선정하고 육성에 나섰는데, 이때 도시바는 정부 기조에 동참하기 위해 미국의 원전 설계 회사인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다. 도시바는 원전 시장 전망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에 시장 예상가의 2배에 달하는 54억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도시바는 이르면 2015년, 늦어도 2020년까지 투자금을 회수할 계획으로 사업을 전개했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사태가 발생하면서 원전 사업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시바는 2015년까지 전 세계에 25개 원전을 수출할 계획을 세웠지만 도시바가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2~3호기 제조사라는 점이 수출에 걸림돌이 됐다. 회사 신뢰도가 떨어진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원전 추가 건설을 백지화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2015년 발생했다. 2015년 7월 21일 도시바의 회계부정이 발각됐다. 2008년 4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총 1518억 엔(1조4100억원)의 영업이익을 과대 계상했다.

이후 일본 증권거래감시위원회 조사 결과 도시바가 적자인 사업을 흑자로 속여 7년간 부풀린 이익 총액은 2248억 엔(2조13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도시바는 2015년 창사 이래 최대 손실액(4600억 엔)을 기록했고,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업 구조조정에 나서며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재기 노리는 도시바도시바의 몰락은 잘못된 경영 판단과 내부 잡음의 결과다. 수익성 악화로 타 기업에 매각한 사업들은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중국 하이엔스는 2017년 도시바의 TV 사업을 인수한 이후 빠르게 성장해 올 상반기 출하량 기준 TV 시장 3위까지 올라섰다. 도시바의 백색가전을 인수한 중국 메이디 역시 중국 시가총액 1위의 가전 업체가 됐다.

2008년 인수한 웨스팅하우스는 원전 사업을 지속할 수 없어 10년 만인 2018년 캐나다 사모펀드인 브룩필드 비즈니스 파트너스에 매각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여전히 전 세계 50%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에 원자로와 엔지니어링 등을 제공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심화한 경영진들의 파벌싸움은 도시바가 실패한 직접적 원인으로 꼽힌다. 2000년대 들어 상명하복 문화가 자리 잡고, 가전사업과 인프라 사업이 나뉘어 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다. 실제 도시바 CEO 자리는 가니시무로 다이조(가전)→오카무라 다다시(이프라)→니시다 아쓰토시(PC)→사사키 노리오(원자력)→다나카 히사오(PC)→쓰나가와 사토시(의료기기) 등으로 끊임없이 바뀌었다.

결국 도시바는 2016년 영업적자 9500억 엔(약 9조4000억원)을 기록했고, 채무초과액은 5400억 엔으로 확대돼 2017년 8월 도쿄증시 2부로 추락했다. 도쿄 증시 상장 68년 만이었다.

도시바의 떨어진 위상은 주가로 드러났다. 반도체 사업으로 전 세계를 휩쓴 1989년 도시바 주가는 1500엔대를 기록했지만 증시 2부 거래 첫날 260엔까지 떨어졌다.

결국 도시바는 2016년부터 사업을 매각하며 대대적인 사업구조 재편에 나섰다. 생활가전 사업이 가장 먼저 시장에 나왔다. 이 사업은 중국 최대 가전기업인 메이디에 넘어갔다. 이후 △의료기기 사업(캐논에 매각) △반도체 사업(베인캐피털) 등 핵심 사업까지 정리했다.

2022년에는 △발전설비 △교통시스템 △엘리베이터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전자제품 △메모리 반도체 등 기존 6개 사업에서 디바이스 부문만 떼어내 회사를 2개 부문으로 분할하려고 했지만 주주총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획은 무산됐다. 해결책을 찾지 못한 도시바는 올해 3월 일본계 투자펀드 일본산업파트너즈(JIP)에 매각됐다. 전체 주식 가운데 78.65%가 JIP에 넘어갔고, 매각가는 약 2조 엔(약 19조6000억원)이다.

JIP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상장폐지다. 기업가치를 제고한 뒤 재상장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지난 9월부터 주당 4620엔(약 4만1000원)에 공개매수를 진행해 왔으며, 매수 총액은 2조 엔에 이른다. JIP는 인수 당시 포함되지 않았던 나머지 주식을 공개매수 기간에 확보할 계획이다.

JIP는 상장폐지로 단기 수익에만 집중해온 해외 투자자를 없애 기업 가치를 제고하겠다는 계획이다. 이후 경쟁력이 회복됐다고 판단되는 시점에 재상장을 추진한다.

도시바는 12월 20일 도쿄 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된다. 74년간의 상장 역사가 마무리되는 셈이다. 도시바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20일 상장폐지됨에 따라 이후 주식 거래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