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19년 11월 22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19년 11월 22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2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그룹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 1심 선고가 2월 5일 나온다. 지난 9년여간 경영 족쇄였던 사법 리스크의 행방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검찰은 2023년 11월 17일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징역 5년과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 회장은 2020년 9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의 자본시장법 위반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됐다. 제일모직 자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외부감사법상 거짓 공시 및 분식회계 혐의도 받고 있다.

106회 재판에 95회 출석…1심까지 3년 2개월

지난 3년 2개월여간 106회의 재판, 검찰 수사기록 19만 페이지, 제출 증거 2만3000개, 증인신문 80명 등 방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 회장은 대통령 해외순방 일정 동행 등 주요 일정을 이유로 법원 허가를 받아 빠진 11차례를 제외하곤 95차례 법정에 출석했다. 많을 때는 일주일 두 차례 법원에 출석했으며 해외출장 등 글로벌 경영 행보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햇수로 9년째 이어진 사법리스크로 인해 정상적인 경영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와 별개로 이 회장은 박근혜 정부 당시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2017년 2월 구속기소 된 후 2018년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된 뒤 가석방될 때까지 총 565일간 구속돼 있기도 했다.

글로벌 빅테크의 최고경영자들이 모이는 ‘선밸리 콘퍼런스’에도 7년째 발길을 끊었다. 글로벌 기업의 인수합병(M&A)이나 파트너십 등 굵직한 비즈니스가 성사돼 ‘억만장자들의 사교클럽’으로 불리는 이 콘퍼런스는 이 회장이 “연간 출장 중 가장 신경을 많이 쓴다”고 밝힐 정도로 각별히 여기는 행사였지만 국정농단 사건에 따른 여파 등으로 2016년을 마지막으로 불참해왔다.

이제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 사건은 선고만을 남겨놓게 됐지만 이후 양측의 항소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대법원 판결까지 앞으로 3~4년이 더 걸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22년 10월 취임 이후 이 회장의 경영 화두는 줄곳 ‘인재’와 ‘기술’이었다. 2023년 2월 삼성전자 천안캠퍼스, 온양캠퍼스에서 열린 경영진 간담회에서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이 회장은 총수로서 느끼는 기술에 대한 위기의식과 절박함을 드러내고 있다. 취임사 대신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에서도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새로운 분야를 선도하지 못했고 기존 시장에서는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고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2023년 11월 부당합병·회계부정 사건 결심 공판에서도 이 회장은 10분간 이어진 최후진술에서 “지금 세계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이 광범위하게 재편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기술이 반도체 시장은 물론 전 세계 사업에 영향을 끼치는 등 상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술혁신이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런 일들은 사전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기 용인시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단지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기 용인시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R&D)단지 건설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전 세계가 AI 전쟁 중인데…M&A 적기 놓칠라


이 회장의 ‘뉴 삼성’은 사법리스크 속에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간 삼성의 성장을 이끌었던 스마트폰·메모리·시스템반도체 등 기존 주력 사업의 수익성이 주춤하며 미래 성장성이 불투명해졌다.

삼성전자는 2023년 미국 애플에 전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 1위 자리를 13년 만에 내준 데 이어 반도체 매출도 미국의 인텔에 1위 자리를 빼앗겼다. 삼성은 미래를 위한 과감하고 선제적인 투자와 신사업 발굴이 절실한 상황이다.

“기존 사업의 강화와 미래의 성장동력 발굴 차원에서 M&A 대상 회사들을 지속적으로 모아 검토하고 있다.” 한종희 삼성전자 DX부문장(부회장)이 올해 ‘CES 2024’에서 한 말이다. 한 부회장은 2022년부터 3년째 대형 M&A 가능성을 시사해왔다. 하지만 2017년 하만 인수 이후 삼성의 M&A 시계는 8년째 멈춰 있다.

한 부회장의 M&A 관련 발언은 올해도 공수표에 그치게 될까. 그간 삼성은 이재용 회장의 경영활동이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많게는 수조원이 투입되는 대형 M&A와 신사업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상황이 다르다. M&A의 기회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이미 AI 패권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첨단기술 기업을 인수할 실탄도 충분하다. 2023년 3분기 말 기준 삼성전자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단기금융상품·단기상각후원가금융자산·장기 정기예금 등 포함)은 약 93조원이다.

삼성은 초대형 M&A를 추진할 수 있을 정도의 여건을 갖추고 있지만 사법리스크를 의식해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경쟁사인 글로벌 빅테크들은 AI 스타트업 인수전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애플은 최근 아이폰을 비롯한 주요 제품에 생성형 AI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M&A와 인재 확보에 속도를 내면서 기술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애플은 차세대 아이폰에 AI 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2017년부터 21개 AI 관련 스타트업들을 인수하며 AI 역량을 끌어모으고 있다.

2023년 3월에는 동영상 압축 AI 알고리즘 기술을 개발하는 미국 스타트업 웨이브원을 인수했다. 애플은 생성형 AI의 핵심 기술인 ‘딥러닝’ 전문가들도 적극 영입하고 있다. 애플은 AI 관련 추가 M&A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이 세계 최초의 AI 스마트폰 ‘갤럭시 S24’를 먼저 출시했지만 애플은 조용한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1년 11월 미국 구글 본사에서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와 만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021년 11월 미국 구글 본사에서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와 만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법리스크 부담에 등기이사 복귀 시점도 미정

삼성도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래 기술 확보를 위해 AI, 디지털헬스, 핀테크, 로봇, 전장 관련 5개 분야에 대해 최근 3년간 260여 개 회사에 벤처 투자를 진행했다. 2023년 전략적 지분 투자를 단행한 레인보우로보틱스가 대표적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조직개편을 통해 부문 직속의 ‘신사업TF’와 각 사업부에 유관 조직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신사업 발굴 시너지를 강화하고 최고기술책임자(CTO) 직속의 ‘미래기술사무국’과 각 사업부 미래기술전담조직을 연계해 기존에 없었던 혁신적 신기술 개발을 가속화해 나갈 계획이다. 향후 10년 이상의 미래 먹거리 아이템을 발굴할 부회장급 조직인 ‘미래사업기획단’도 신설했다.

이 회장이 오는 3월 정기 주총에서 등기이사로 복귀할지도 관심이 쏠린다. 이 회장은 부회장이던 2016년 10월 임시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선임됐는데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으면서 2019년 10월 재선임 없이 임기가 만료돼 지금까지 미등기임원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

4대 그룹 총수 중 미등기 임원은 이 회장이 유일하다. 혐의를 벗는다면 3월 주총에서 사내이사로 선임될 가능성이 높으나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구속 또는 추가 재판 출석 등으로 사내이사 선임이 어려워질 전망이다.

이 회장은 미등기임원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등기임원은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정관을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도 지게 된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M&A 빅딜 추진 등 투자를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적극적인 경영을 하려면 등기임원으로 복귀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