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은 삼성전자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 미국 중국 등 해외 M&A를 적극적으로 했으나, 여전히 70%의 일감을 계열사에 의존하고 있다.
파파이스가 미국에서 첫 슈퍼볼 광고를 최근 내보냈는데요. 한국계 배우인 켄 정이 굉장히 코믹하게 파파이스 치킨윙을 먹는 것을 그렸습니다. 슈퍼볼은 미식축구리그(NFL) 결승전을 말하죠. 미국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날이라 광고 업계에선 유통업계의 블랙 프라이데이처럼 매출이 엄청나게 오르는 날이기도 합니다. 슈퍼볼 광고를 따내기 위해서 광고 대행사들이 엄청난 경쟁을 하죠. 파파이스 광고도 30초당 700만 달러, 94억원이나 했어요.근데 이 광고를 누가 만들었느냐. 그렇습니다. 한국 회사가 만들었습니다. 정확히는 제일기획의 미국 자회사인 맥키니가 맡은 광고였어요. 제일기획은 삼성그룹의 계열사죠. 삼성 광고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광고산업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그것도 슈퍼볼의 메인 광고를 따낼 만큼 경쟁력을 꽤나 인정받고 있었어요. 제일기획은 정말 세계적인 광고 대행사가 된 것일까요. 이번 주제는 '삼성만으론 배고픈' 제일기획입니다. ◆파격적인 광고로 각인돼제일기획은 1973년 세워졌어요.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커지면서 광고 물량이 늘어나자 ‘남에게 줄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해보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했습니다.
실은 한국 대기업들 상당수가 이런 식으로 광고 대행사를 세웠죠. 현대의 이노션이나 LG의 HSAD, 롯데의 대홍기획, 두산의 오리콤 등등이 그렇습니다.
삼성이 광고 일감을 몰아줬으니까 제일기획이 성장했다, 하는 것은 당연히 맞는 얘깁니다만 그렇다고 제일기획이 ‘날로’ 먹은 건 아닙니다. 계열사라고 하더라도 삼성은 경쟁력이 없으면 일을 잘 안 맡기거든요.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사업부가 다르면 다툴 정도입니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에 한동안 삼성전자 반도체가 아니라 퀄컴 칩이 들어갔었는데요. 자기들이 만든 반도체라도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면 쓰질 않았어요. 같은 논리로 제일기획 광고가 수준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삼성은 일감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제일기획은 과감한 시도를 많이 합니다. 밋밋한 광고를 삼성이 싫어했어요. 1990년대에 제일기획이 만든 광고를 보시면, 당시 기준으론 굉장히 파격적이었어요. 삼성물산의 패션 사업부에서 시작한 ‘카운트다운’이란 브랜드가 있었는데요, 이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제일기획은 직접 춤과 노래를 만들고 이걸 부를 가수까지 발굴합니다. 카운트다운 광고가 1992년 공개됐는데 엄청난 히트를 칩니다. 가수와 노래, 춤이 딱 맞아떨어졌거든요. 이 가수가 바로 김원준이었어요. 이 광고를 계기로 김원준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죠.
제일기획이 광고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에스엠이나 JYP 같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한 셈인데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할 정도 아닙니까. 제일기획은 이후로도 노래와 춤, 광고를 엮어서 스토리텔링을 하는 데 뛰어났어요. 1990년대 후반에 가수 유승준을 내세운 매직스테이션 컴퓨터 광고는 당시엔 생소했던 뮤직비디오 형태였고요. 손담비의 아몰레드 광고도 엄청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열거한 이러한 광고들을 보면 공통점이 또 하나 있는데요. 너무나 당연하게 삼성 계열사 광고란 것이죠. 아무리 광고를 잘 만들고, 매출을 잘 내도 제일기획은 부모 잘 둔 덕분에 먹고사는 금수저란 프레임에서 벗어나질 못했어요. 이게 얼마나 이슈가 됐냐 하면요. 박근혜 정부 때 경제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일감 몰아주기가 정치권에서 화두가 됐고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제일기획이 꼽히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삼성 계열사 중에 사명에 삼성이 안 들어간 회사가 드문데요. 제일기획에도 삼성이 안 들어가 있죠. 이건 다른 대기업 계열 광고 대행사도 비슷해요. 이노션, HSAD, 대홍기획도 회사 이름만 보면 어떤 그룹사에 속해 있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의식한 것도 일부 있을 것 같아요.
삼성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본 것 같습니다. 2016년에 제일기획을 매물로 내놨거든요. 내부 일감에 의존하는 사업을 계속하는 게 맞는지 그룹 차원에서 심각하게 본 것이었죠. 이런 사업이 지금 삼성에 거의 없거든요. 물론 매각은 성사되지 않아서 지금도 삼성의 계열사로 남은 것이지만요.
근데 매각이 또 쉽지도 않은 것이요, 삼성이 제일기획을 팔면 삼성 광고를 굳이 제일기획에 몰아줄 이유가 없잖아요. 사는 입장에선 삼성의 광고가 보장된 게 아니라면 굳이 비싸게 뭐하러 사겠습니까. 삼성도 돈이 급한 것도 아니라 헐값에 팔 이유는 없고요. 또 제일기획이 삼성 라이온즈 야구단 같은 그룹의 스포츠 구단 지분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이것도 파는 데 걸림돌이 됐다고 해요. ◆유통·금융 분야에서 성과 내야 제일기획이 이후에 외부 일감을 많이 따내려고 무진장 노력을 했는데, 지금도 내부 비중이 70%에 달해요. 이건 안정적으로 광고 매출을 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모기업의 사정이 어려워지면 제일기획도 어려워지는 단점도 있습니다.
작년이 딱 그랬죠. 모기업인 삼성전자가 반도체 가격이 뚝뚝 떨어져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보냈잖아요.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2022년에 43조원을 넘겼는데, 지난해에는 6조원 수준으로 85%나 줄었습니다. 삼성전자가 그래서 어떻게 했겠어요. 광고, 마케팅, 판촉 같은 곳에 돈 쓰는 것을 통제합니다. 이 영향에 제일기획의 작년 매출이 3년 만에 역성장합니다. 2020년에 코로나 터지고 역성장했을 땐 그럴 수 있다고 이해가 갔는데, 작년은 코로나 끝나고 광고 산업도 괜찮았는데 실적이 거꾸로 간 것이었어요. 과거엔 일감 몰아주기, 경제 민주화 같은 정치적인 이슈 탓에 문제가 됐다면요, 지금은 모기업에 의존하는 사업 모델이 리스크가 되고 있는 겁니다.
제일기획도 당연히 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해요. 그동안 쌓아온 경쟁력도 충분하다고 보고요. 그래서 돈 벌면 계속 해외에서 다른 회사를 샀어요. 앞서 파파이스의 슈퍼볼 광고를 따낸 맥키니도 2012년에 인수한 회사였고요. 맥키니 이외에도 영국의 아이리스와 파운디드, 중국의 펑타이, 루마니아의 센트레이드, 네덜란드의 픽서스 등등을 계속 사들였어요. 이런 회사들을 인수하면 자연스럽게 여기에 광고를 줬던 광고주들까지 같이 따라와서 삼성의 비중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고요. 또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효과까지 있어서 제일기획의 전략하고 잘 맞아떨어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길은 멉니다. 세계 최대 광고 대행사인 영국의 WPP PL이 2022년 기준 178억 달러, 약 23조원의 매출을 거뒀는데요. 제일기획이 4조원 조금 넘었으니까 차이가 큽니다. 아시아에선 일본의 덴쓰 매출이 10조원쯤 하고요. 일본의 또 다른 광고 대행사 하쿠호도는 9조원가량 하고요.
글로벌 광고 시장은 7660억 달러, 약 1000조원이나 하는 거대한 시장이고요. 미국이 30~40%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비중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광고를 가장 많이 하는 산업은 제일기획이 강점을 가진 IT 분야가 아니라 리테일, 바로 유통입니다. 2021년 기준으로 유통업계의 광고는 354억 달러, 47조원이나 했어요. 요즘 테무, 알리익스프레스, 쉬인 같은 중국의 온라인 쇼핑몰이 급성장하고 있는데요. 이런 중국 쇼핑몰이 광고에 어마어마한 돈을 퍼붓고 있죠. 작년에 테무가 페이스북 한 곳에만 집행한 광고액이 무려 12억 달러, 1조6000억원에 달했다고 하죠.
유통산업 다음으로 광고에 돈을 많이 쓴 분야는 금융 서비스, 그리고 자동차 같은 소비재, 통신 서비스 순이었어요. 그러니까 제일기획은 앞으로 파파이스 같은 해외 기업들, 그리고 유통사들, 금융사들 광고를 잡아와야 규모를 확 키울 수 있는 겁니다.
제일기획은 주식시장에서 재미없는 종목의 대명사로 통하는데요. 꾸준히 매출을 늘렸는데도 삼성에 목매는 회사란 인식이 강해서 주가 흐름이 밋밋했어요. 그래도 이익을 따박따박 내주고, 그 이익을 주주들에게 배당도 잘해줘서 ‘배당주’란 이미지는 강합니다.
그런데 앞으론 배당도 잘해줄 뿐 아니라 미국, 중국 같은 나라에서 새로운 광고주를 잘 발굴해서 성장주도 해주면 좋을 것 같죠. 올해는 4월에 총선이 있고 해외에선 7~8월에 파리 올림픽, 11월에 미국 대선이 있으니까 여건도 나쁘지 않습니다. 제일기획이 모기업인 삼성전자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광고 대행사로 되는 원년이 되면 좋겠네요.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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