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1만 의료대군 양병책’을 강행한다. 2025년부터 5년간 매해 2000명씩 의대생을 추가 모집하는 방안이다. 의대생이 늘어나면 ‘내·외·산·소’(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이른바 4대 비인기 학과 기피현상은 해소될까? 지금처럼 성형외과, 피부과, 신경과로만 몰리면 어떻게 하나?
2023년 상반기 61개 대학병원 레지던트 모집결과를 보자. 필수의료 분야인 흉부외과는 모집정원의 50%에 미달했고 외과도 65.2%에 그쳤다. 재앙적 저출산으로 국가소멸이 거론되건만 소아청소년과는 20.1%, 산부인과는 74.8%밖에 충원하지 못했다.
의료인력이 늘면 지방 소도시나 산간벽지로도 퍼져 나갈까? 희생과 보람을 추구하는 ‘낭만닥터 김사부’의 분신들이 줄줄이 배출될까? 글쎄다. 의협 주장대로 전공의 수가 제한된 상태에서 수련의 수만 늘리면 소모적 경쟁만 가열되고 오히려 교육의 질은 저하될 수도 있다.
물론 의사 인력은 절대 부족 상태다. 2021년 기준 인구 1만 명당 임상 의사 수는 25.1명으로, OECD 평균 36명에 30% 정도 밑돈다. 30개 회원국 중 29위, 100여 개 조사 대상국 중 68위에 올랐다(표1 참조). 쏠림 공화국의 의료 난민들
위 수치는 나라 전체 평균이다. 더 큰 위기는 1000명당 3명의 의사를 보유한 서울과 그 절반인 1.6명에 목매는 지방 간 편차에 있다. 응급실 뺑뺑이로 횡사한 영혼들, 5분 진료를 위해 왕복 6시간을 소진하는 원정진료자들, 의사 부족 그 자체가 아니라 대도시 집중이 유발한 의료 난민들이다.
비수도권의 의료 사막화는 처참하다. 그곳 시민들은 ‘불가촉 의료천민’으로 전락했지만 지방이라고 다 같은 지방이 아니다. 내부 서열은 더 심하다. 단적으로 강원 지역 의사 70% 이상이 춘천, 원주, 강릉에 몰려 있다. 대학병원 소재지이기 때문이다.
인구 1000명당 의사는 0.4명으로 춘천의 6분의 1에 그친다. 연봉 4억원에 간신히 응급의학 의사를 구한 삼척시나 울진군은 천운이 따른 경우다. 증원을 해도 이런 불균형은 지속될 수 있고, 지방의료 붕괴는 막기 어렵다. 이대로 가면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에 ‘의료혜택 예외 조항’이 추가될지도 모른다.
문제가 쏠림이라면 답은 분산이다. 혈액이 머리와 심장에 다 몰려 있으니 혈관을 확장해 사지에 피를 보내야 한다. 추가 수혈 대신 혈액순환이 절실하단 소리다. 그런데 스텐트를 삽입하려니 큰 장애물이 있다. 대한민국 자체가 쏠림 공화국이라는 것. 쏠림은 생존의 법칙이요, 성공의 필살기라는 것.
수도권과 ‘기타 지역’이라는 두 개의 체감 행정구역만 존재한다. 후자에 속한 사람들은 차별과 함께 처벌도 받는다. 지방 입원환자들의 사망률이 더 높은 것도, 그들의 전원율이 2배에 달하는 것도 그 일부다.
쏠림은 단지 의료라는 장기에 붙은 용종이 아니라 온 나라에 퍼진 암세포와 같다. 교육, 교통, 문화예술, 주택, 그리고 재산증식까지 모두 수도권에 집적돼 있다. 의료시설과 인력이라고 기타 지역으로 분산될 리 만무하다.
관심과 가치가 획일화되어 있으니 선호 직군이나 희망 직장, 지원 대학이나 학과 선택의 편향은 당연한 결과다. 의대 진학을 위해 명문 SKY 합격증도, 유망하다는 자연계나 공대도 포기하고 ‘N수’를 택하는 현실. 그들이 비인기 필수의료 분야나 지방의료 향상에 투신할 것이라는 기대는 접어두자. 게임체인저 등판: 16개 국립대학 의대 설립
방법이 없지는 않다. 가치와 관심의 쏠림은 보상의 크기에 따라 형성되니까. 연봉 4억원이 시세라면 그보다 더 주면 된다. 깊은 두메산골이면 프리미엄 얹어 5억~6억원 주면 넉넉지 않을까. 이 정도 연봉을 1만 명에게 주면 1년에 ‘고작’ 5조~6조원이다. 사람이 살고 봐야지 그까짓 돈이 문제겠나.
김윤 서울대 의대 교수는 우리나라 의사들의 수입이 근로자 평균소득 대비 4.5~7배라고 말한다. 이 격차라면 OECD 가입국 평균의 2배 수준이다. 이렇게 몸값 높은 분들 모시려면 대접도 그에 준해야 할 터. 소도 팔고 건강보험 수가 올려서라도 그들 기준은 충족시켜야 한다.
이 방법이 내키지 않는다면 ‘게임체인저’ 등판이 마지막 묘수다. 16개 국립대학 의대 신규 설립이 바로 그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현재 전국에는 총 40개의 의과대학이 있다. 그중 29곳은 사립이고 11곳만 국립대학이다. 한편 종합대학의 지위를 지닌 국립대학은 대략 27곳인데(교육, 체육, 예술, 과학 특화 대학 제외) 이 중 11개 대학만 의대를 갖췄다.
다행히 의대가 없는 16개 국립대 모두 비수도권에 흩어져 있다. 만약 이들 대학에 의과대학을 신설한다면? 매년 평균 150명씩만 선발해도 총 2400명의 의과대 학생을 확보할 수 있다. 물론 천문학적 시설, 인력, 장비 투자가 부담된다. 긴 준비 기간도 거치겠지만 5년이면 가능하지 않겠나.
16개 국립의대는 기존 의과대학 병원과 차별적 특성과 임무가 주어진다.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본다.
△국비 장학금 제도: 신설 국립의대는 전액 장학금 제도로 운영돼야 한다. 개인 재정 상태와 무관해야 다양한 지역과 계층에서 의료인력이 배출된다. 학자금 대출과 빚이 전공과 향후 진로를 좌우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다.
△의료 취약지구 복무: 국비 장학생인 이들은 국민 세금이란 부채를 진다. 그 상환 방식은 국가 지정의료 소외·위기 지역의 근무다. 전문의 이상 자격을 갖춘 시점에 대략 5~6년의 복무 기간이 적당하다고 본다. 물론 적정 급여와 함께.
△필수의료 집중 및 특화: 이들 의과대학은 필수의료 영역 안에서 각기 특성화와 차별화되어야 한다. 이로써 전공 쏠림 현상을 제어하고 취약한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년과를 강화함과 동시에 일부 유럽 국가처럼 노인의학과와 의료정보 관리학을 추가할 수 있다.
1차의료 전문간호사 양성: 전문간호사 석사과정을 신설해 비의사 1차진료 주체로 세운다. 이로써 전문의는 중환자, 응급환자, 수술에 집중해 노동 하중을 줄이고 의료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캐나다가 모범 사례다.
△이동식 차량병원: 외진 마을을 방문하는 이동식 의료는 지방 군·면 단위에 익숙한 관행이다. 일본과 함께 중국은 현대식 장비와 인력을 갖춘 의료 버스와 트럭을 본격화해 성과를 내고 있다. 장거리 이동이 불가한 지방의 고령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만큼 국립의대들이 지자체와 연계해 이동 클리닉(mobile clinic)을 지역 의료의 핵심 인프라로 정착시킬 수 있다.
△원격진료 허브: 원격진료는 도서산간 지역이 많은 일본은 물론 도시국가 싱가포르에서도 성공적으로 운영된다. 3D와 VR의 범용화, 협동로봇 투입에 이어 스마트 기기조차 의료장비로 진화한 지금 클라우드 기반 정보 시스템에서 앞선 한국이 원격의료에 뒤처진 것은 불가사의에 가깝다. 기존 의료단체의 반발로부터 자유로운 16개 국립의대는 원격진료 네트워크와 AI.디지털 의료의 선봉이 될 수 있다. 의료는 신(新)국방이다
국토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국방. 국가의 1차 사명이다. 공공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찰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의료는? 기형적인 시장과 뒤처진 제도로 인해 시민들의 생존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면 이 또한 국가가 전면에 나설 문제 아닐까?
‘공공의료’라는 말,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의료 공급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다. 국민건강보험, 국립중앙의료원, 군인, 경찰, 보훈병원, 몇몇 재활센터와 어린이병원, 지방에 흩어진 보건소와 정신병원이 전부다. 도대체 공공의료는 어디 숨겨져 있는 건가?
현 시국의 의료를 개인의 건강문제로 보면 오산이다. 의료는 신(新)국방이다. 국방과 치안에 국가가 나선다고 시장질서 교란이라 비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의료공급 위기에 국가가 나선다고 반대할 시민 없다. 특정 이익단체가 아니라면 말이다.
확대가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 시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땜빵’인 것 국민들도 이해한다. 그러니 여기서 더 힘 빼지 말고 후사를 준비하자. 국가가 직접 의료공급에 나설 방안 말이다. 말로만 지켜지는 골든타임은 없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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