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왼쪽)과 장형진 영풍 고문. 사진=고려아연·영풍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왼쪽)과 장형진 영풍 고문. 사진=고려아연·영풍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 공동 창업 이후 3대가 한솥밥을 먹으며 75년간 동업 관계를 유지해온 장씨와 최씨 일가의 ‘한 지붕 두 집안’ 체제가 막을 내릴 조짐이다.

장씨와 최씨 일가가 그동안 고려아연 경영권을 놓고 지분 확보 경쟁을 벌여온 가운데 2월 21일 최대주주인 영풍이 고려아연이 주총 의안으로 올린 배당 및 정관 일부 변경 안건에 대해 주주권익 침해가 우려된다며 반대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표대결을 벌일 예정이다.

75년 동업 관계 막 내리나

영풍그룹은 황해도 출신의 동향인 고 장병희·고 최기호 두 창업자가 1949년 공동 창업한 영풍기업사가 모태다. 두 창업자가 ‘수출을 통한 한국 경제 재건’을 목표로 회사를 설립했고 초기 주요 사업은 농수산물과 철광석을 수출하는 무역업이 중심이었다.

영풍그룹은 1970년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직접 아연을 생산하기 위해 1970년 영풍 석포제련소를 설립하며 비철금속 제련사업에 뛰어들었다. 1974년에는 자매사인 고려아연을 설립해 온산제련소를 완공하며 국내 아연시장 공급을 주도했다. 영풍그룹은 고려아연과 영풍을 중심으로 국내 아연 제련 시장을 양분했다.

장씨와 최씨 집안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동업하면서 번갈아 그룹회장을 맡으며 그룹을 운영해왔다. 비철금속 제련 세계 1위 기업인 고려아연은 지배구조상 재계 28위 영풍그룹의 주요 계열사지만 최씨 가문이 고려아연을, 장씨 가문이 영풍을 각각 경영하는 독립경영체제다.

경영은 나눠 맡고 있으나 지분은 상호 보유하는 관계다. 고려아연의 최대주주는 지분 25.28%를 보유한 영풍이다. 양측이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지분율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그간 경영권 다툼없이 장씨 일가는 전자계열, 최씨 일가는 고려아연 등 비전자계열을 주로 맡으며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동업 관계에서 잡음이 없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 기업사에서 성공적인 동업 관계는 LG그룹 사례가 있다. LG그룹은 창업 1세대인 구인회 창업자와 허만정 씨에게서 시작해 2세대인 구자경 명예회장과 허준구 LG건설 명예회장, 3세대인 구본무 LG 선대회장과 허창수 GS건설 회장에 이르기까지 57년 동안 3대가 동업관계를 이뤄왔다. 2005년 GS그룹이 법적으로 계열분리되면서 구씨와 허씨 두 집안의 동업 관계는 '아름다운 이별'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구씨와 허씨 집안의 동업 관계는 경영학계에서 연구 대상으로 꼽힌다. 분리 과정에서 동업 관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산 다툼 등 잡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집안은 중요 사항을 같은 자리에서 보고 받는 등 동업자로서 서로를 깍듯하게 예우했다.

철저한 유교적 가풍 아래 합리적 원칙에 바탕을 둔 '인화'를 강조하면서 큰 불협화음 없이 대를 이어가며 성공적인 경영을 일궜다. 구본무 선대회장과 허창수 회장의 경우 계열 분리 전까지 수시로 주요 현안을 논의했고, 구 선대회장이 GS그룹 출범식에 직접 참석해 축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LG그룹에서 3대에 걸친 동업 관계가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두 집안의 재산 배분 비율인 '65(구씨)대 35(허씨)'의 원칙에서 찾을 수 있다. 창업 당시의 지분 비율로, 이 지분율을 철저하게 유지했기 때문에 두 집안의 많은 자손이 대를 이어 경영에 참여하면서도 분란이 없었다는 분석이다.

영풍그룹의 경우 지분율은 장씨 측이 더 높지만 현금 창출 능력은 최씨 측이 맡은 고려아연이 압도적이다. 고려아연은 영풍그룹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영업이익의 80% 이상을 내는 알짜 계열사다. 이 때문에 시장에선 고려아연의 계열분리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매출 9조7045억원, 영업이익 6591억원을 올렸다.

강력했던 두 집안의 동맹관계는 영풍그룹이 2세에서 3세로의 승계 작업과 2017~2019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재벌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따라 순환출자 고리 해소에 나서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일련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 이후 지주사 격인 영풍에 대한 장씨 일가의 지배력이 커진 반면 최씨 일가의 영향력은 더 약화됐다. 지난해에는 고려아연이 그룹 지주사 역할을 하는 영풍과 한날 정기 주총을 열던 관행을 깨고 주총 일정을 따로 잡아 재계에선 고려아연이 거리 두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장씨와 최씨 일가는 3세 경영인 최윤범 회장 취임 이후 고려아연이 신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이견이 커진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친환경 비즈니스 중심의 '트로이카 드라이브' 전략을 신성장동력으로 육성하고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2차전지 소재와 신재생에너지 및 자원순환 사업 등 신사업으로 보폭을 넓혀 2033년 매출액 25조3000억원을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신사업에 향후 10년간 12조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최 회장이 2022년부터 공격적으로 고려아연 지분을 늘리면서 장 고문 측도 지분 희석에 대응해 지분을 공격적으로 매입하며 대주주 간 지분 확보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최 회장이 지난해 현대차, 한화의 외국법인 등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면서 지분율을 높이면서 최근 양측의 지분율이 역전됐다. 지난해 말 기준 최씨 측이 약 33%, 장씨 측이 32% 수준의 지분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양측의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아 약 8%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다.
영풍 사옥. 사진=영풍
영풍 사옥. 사진=영풍
주총 표 대결 앞두고 장외 신경전 가열

3월 19일 열리는 고려아연의 주주총회를 앞두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과 장형진 영풍 고문 측은 소액주주 의결권 위임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양측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주주 사이에서 영풍 측이 케이디엠메가홀딩스 등을 통해 주주들에게 권유업무 대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명함과 안내문이 마치 고려아연에서 보낸 것으로 오인할 소지가 크다는 지적이 나왔다.

케이디엠메가홀딩스가 제작한 명함에는 고려아연의 사명이 크게 써 있고 영풍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작게 들어가 있어 주총에서 고려아연 편을 들고자 했던 주주가 영풍에 표를 주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풍은 의결권 대리 권유 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명함 양식이라며 주주들을 방문할 때 충분한 설명을 하기 때문에 문제없다는 입장이다. 고려아연은 영풍 측의 자본시장법과 형법상 업무방해죄 등 법 위반 소지가 있는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배당률 더 높여야 vs 과도한 요구

현재 장 고문 측과 최 회장 측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각각 32%, 33% 들고 있다. 불과 1%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소액주주들의 표심이 어디로 향할지가 관전 포인트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 반박에 반박을 거듭하는 주총 관련 입장문을 잇달아 내면서 양측의 장외 신경전은 가열되고 있다.

양측 갈등의 배경은 크게 배당금 축소와 정관 변경 두 가지다. 앞서 고려아연은 주당 배당금 5000원과 함께 신주발행을 외국합작법인만을 대상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의 정관 삭제를 정기주총 안건으로 상정했다.

주총 특별결의사항인 정관 일부 변경안은 영풍의 반대로 부결 가능성이 높다. 특별결의는 출석한 주식수의 3분의 2 이상, 발행주식 총수의 3분의 1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반면 보통결의(출석 주식 과반, 발행주식 총수 4분의 1 이상) 안건인 재무제표의 승인 안건은 양측의 지분 싸움으로 결판이 날 것으로 전망된다. 고려아연 지분 약 26%를 차지하는 소액주주들의 역할이 중요해져 주총 이전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 작업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이유다.

가장 큰 쟁점은 배당금 축소다. 고려아연은 2월 19일 공시를 통해 주당 5000원의 결산 배당을 결정했다. 중간배당 1만원을 합하면 1만5000원으로, 전년(2만원)과 비교하면 5000원 줄어든다.

이에 영풍은 2월 21일 입장문을 내고 “고려아연은 보통주 5000원의 현금배당을 제안했으나 영풍은 전년과 같은 수준의 이익배당이 이뤄질 수 있도록 보통주 1주당 1만원을 배당하는 내용의 수정동의 안건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의결권을 영풍 측에 위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이익잉여금이 약 7조3000억원으로 여력이 충분한 상태에서 배당금을 줄인다면 주주들의 실망이 크고 회사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돼 주가가 더욱 하락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전경. 사진=고려아연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전경. 사진=고려아연
고려아연이 신뢰 깨뜨려 vs 영풍이 경영 간섭…정면충돌

고려아연은 2월 23일 보도자료를 통해 “과도한 요구”라며 즉각 반박에 나섰다. 고려아연은 “2023년 기말배당 5000원에 더해 중간배당 1만원과 1000억원의 자사주 소각을 포함한 주주환원율은 76.3%로 지난해(50.9%)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며 “(배당 안건이) 주주권익을 침해한다는 영풍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 “환원액만 보더라도 2022년 3979억원에서 2023년 4027억원으로 증가했다”고 덧붙였다.

고려아연은 “영풍의 주장대로 배당금을 높이면 주주환원율이 96%에 육박하는데, 기업이 모든 이익금을 투자나 기업환경 개선에 할애하지 않고 주주환원에 쓰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와 주주권익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풍의 주장은 주주권익이 아니라 배당금이 축소되면 기업 경영에 어려움을 겪을 영풍 경영진을 위한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영풍은 이에 대해 “2023년도 배당성향(1주당 1만5000원)은 56.76%로 2022년(1주당 2만원) 49.77%, 2021년(1주당 2만원) 43.58%에 비해 증가한 것은 맞다”면서도 “그러나 시가배당률로 따지면 2021년 3.75%, 2022년 3.54%, 2023년 3.00%로 감소 추세”라고 말했다.

또한 영풍은 고려아연의 배당성향이 높아진 까닭은 최근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 수익성이 나빠진 데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자사주 맞교환 등으로 배당금을 지급해야 할 주식 수가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배당성향의 분모가 되는 당기순이익이 무려 3분의 1가량 폭락하면서 마치 배당성향이 높아진 것처럼 착시 효과를 일으킨 것”이라는 게 영풍의 입장이다.

영풍은 정관 변경의 경우 고려아연이 ‘표준정관’에 따른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표준정관은 표면적 이유일 뿐이고 실제로는 기존 정관의 신주인수권 관련 제한 규정을 삭제해 사실상 무제한적 범위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허용하려는 의도라고 주장한다.

특히 영풍은 양측이 동업 관계로 정관 작성 당시 양사의 경영진이 합의하에 만든 정관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개정하려 하는 것은 비즈니스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가치인 약속과 신뢰를 깨뜨리는 행위라고 밝혔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의도대로 정관이 변경되고 아무런 제한 없이 제3자 배정 방식의 유상증자가 이뤄질 경우 기존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 가치가 보다 희석돼 전체 주주의 이익을 해치면서 현 경영진의 ‘경영권 방어·유지’라는 지극히 사적인 편익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위험성이 대단히 높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은 “70여 년간 최씨와 장씨 두 가문의 동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고려아연은 최씨 일가가, 영풍은 장씨 일가가 각자 독립경영 체제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라며 “이번 사태의 본질은 주주권익 보호가 아니라 영풍 경영진이 ‘독립경영 체제’라는 동업자 간 불문율을 깨뜨리고 경영에 간섭하는 등 신의를 져버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국내 행동주의 펀드 KCGI자산운용은 고려아연의 3월 주주총회 때 자체적으로 마련한 의결권 행사 기준에 근거해 영풍 측 안건에 손을 들어주겠다고 밝혔다. 반대로 소액주주연대 플랫폼 액트 운영사 컨두잇의 이상목 대표는 고려아연의 현재 주주환원률이 선진국 수준에 부합한다며, 분석 리포트를 통해 고려아연을 지지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지배구조상 올해 주총 결과에 따라 고려아연의 계열 분리 여부가 당장 결정될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이미 두 집안의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만큼 영풍과 고려아연이 LG와 GS처럼 깔끔한 계열분리로 ‘아름다운 이별’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