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계약을 위해 만난 자리에서 최 이사는 대뜸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요즘 경기가 어렵습니다. 올해는 구매 물량을 15% 줄이고 단가도 10% 낮춰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당황한 윤 사장은 “원자재 가격도 많이 올랐습니다. 단가 인하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최 이사는 발끈하면서 “저희가 워낙 오래 거래해 온 사이라서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사실 K사 원목 품질이 예전만 못합니다. 게다가 툭하면 납기도 어기시고요. 저희는 이런 점들을 오랫동안 참아왔습니다. 만약 거부하신다면 저희는 다른 업체를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장님 제발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했다.
윤 사장은 어이가 없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라는 최 이사의 말은 자신이 비합리적이라는 것 아닌가.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원목 품질만큼은 ‘최고’라고 자부하는 윤 사장이다. 작년에 납기를 맞추지 못한 것은 홍수 등 자연재해가 있었을 때 이틀 정도 늦은 것뿐이다. 가격 낮추려고 별 걸 다 트집을 잡고 인신공격까지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거래처를 놓칠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윤 사장.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맞대응하면 협상을 망칠 수 있다이런 상황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업 간 거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례다. 상대방은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거나 사람을 비하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상대는 대체로 세 가지 부류다. 첫째, 협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다. 업무 경험이 적거나 내 것만 주장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협상의 파이가 커진다는 것을 모르고 단순히 시장에서 물건 사듯이 협상하는 사람이다.
둘째, 밀어붙이면 상대가 양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살아오면서 늘 이런 식으로 협상을 해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자신의 주장만 강조한다. 제시한 조건을 상대가 수락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셋째, 본인에게 결정권이 없는 사람이다. 최종 의사결정권자가 따로 있어서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없다. 그러니 자기 주장만 무리하게 늘어 놓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도대체 협상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발자국 물러서 생각해보자.
일방적인 통보 같지만 사실 상대는 지금 협상하고 있다.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요구를 좀 강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문제는 감정이다. 듣고 있자니 자존심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제안을 그대로 수용하자니 상대 요구에 굴복하는 것 같다. 이럴 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윌리엄 유리와 로저 피셔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예스를 이끌어내는 협상법(Getting to Yes)’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는 맞대응하면 안 된다. 상대의 무리한 요구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맞대응하면 협상을 망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상호호혜’의 심리가 있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신호를 보내면 자신도 그를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 자신도 적대적으로 행동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런 감정과 행동의 패턴을 ‘미러링 현상’이라고 한다.
미러링 현상은 자신도 모르게 행동 중에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선순환이든 악순환이든 한 번 시작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긴장감 높던 대화가 분노에 찬 언쟁으로 번지기도 한다. 감정의 분출은 또 다른 감정 폭발로 이어진다. 자제하지 않으면 결국 격렬한 싸움으로 번진다. 둘 중 아무도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둘째는 상대방 입장이 되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 프레임이 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어디서 보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하겠지만 상대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대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특정 행동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이유를 알아야 대화가 풀린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보는 그대로’ 상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 입장에 서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인간관계에서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역지사지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대놓고 물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설명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 밝히기 어려운 회사 사정이나 개인적인 복잡한 심경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대화의 모드를 상대방의 감정 온도에 맞춰라.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관없다. 왜 그런 상태에 처하게 됐는지 알아보고 공감해줘라.
상대 요구를 수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그대로 공유하라는 것이다. 주의할 점은 당신의 태도다. 겸손한 태도와 진정성 있는 호기심이 필요하다. 상대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서둘지 말고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이 좋다.
셋째는 이슈와 인간관계를 분리하는 것이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상대도 결국은 사람이다. 감정이 있고 자신만의 가치관이 있으며 당신과는 다른 배경과 견해를 갖고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 상대의 특정 행동도 당초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다른 해석은 오해를 낳고 오해는 편견으로 이어진다.
편견은 협상 이슈와 인간관계를 얽히고설키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당사자와 이슈를 하나로 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집안이 엉망이군’이나 ‘통장이 바닥났어’와 같은 말들은 단지 이슈를 지적하기 위해 한 말인데 상대방은 그것을 인신공격으로 여긴다.
사실에 대해 한 말을 자신의 의도와 태도를 지적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상황에 대한 분노가 자칫 사람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윌리엄 유리 교수는 “인간관계와 실질적인 거래는 분리시켜라”라고 조언한다. 이것은 거래를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무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합의 여부와 관계없이 좋은 인간관계를 수립하라는 뜻이다.
흔히 비즈니스 협상에서 인간관계는 잠시 접어 둬야 한다고 한다. 경제적 이익이 우선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그 논리에는 찬성할 수 없다. 좋은 인간관계가 좋은 결과를 얻도록 도와준다.
예를 들어 보겠다. 글로벌 가구회사 이케아의 사례다. 이 회사는 자유롭고 히피적인 문화로 유명하다. 사세 확장을 위해 금융기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상대는 권위적이고 보수적 문화로 알려진 독일의 드레스드너은행(Dresdner Bank)이었다.
협상 전 외부에서는 두 회사의 조직문화가 너무 달라 제휴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봤다. 양측이 원하는 조건이나 기간, 범위 등에 대한 생각 차이도 컸다. 하지만 놀랍게도 두 회사의 제휴는 성공적으로 타결됐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협상 당일 이케아의 협상단은 평소 즐겨 입던 찢어진 청바지와 힙합 바지 대신 깔끔한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반면 드레스드너은행의 협상단은 어울리지도 않는 찢어진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서로의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고 협상장의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이 협상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양측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조건으로 마무리됐다. 이 협상이 잘될 수밖에 없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짐작하겠는가.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는 것이 충분히 표현됐고 그런 호감이 협상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협상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하는 거다. 아무리 첨예한 협상이라도 인간관계부터 풀어나가면 답이 보인다.
이태석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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