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영화 제작사 ‘마블 스튜디오’의 대표 콘텐츠는 단연 히어로물이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닥터 스트레인지 등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제패한 히어로 대다수가 마블에서 나왔다. 이 캐릭터들이 총집결한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만 해도 국내에서 139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 박스오피스 5위에 올랐다.

그런데 요즘 국내외에서 마블 히어로물을 보는 사람은 크게 줄었다. 오히려 기대를 안고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이 혹평을 하는 경우가 많다. 온갖 초능력이 나오고 볼거리가 다양하지만 딱히 공감하기 어렵고 ‘남의 이야기’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작품들 속에선 일상과는 거리가 먼 우주까지 다녀와야 하지 않은가. 여기에 ‘멀티 유니버스’라는 복잡한 세계관까지 더해져 이해조차 하기 어렵다.

최근 한국에선 새로운 히어로들이 이 공백을 가득 채우고 있다. ‘먼치킨물’이라는 장르로 불리는 한국형 히어로물이 탄생한 것이다. ‘먼치킨’은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캐릭터를 이른다. 먼치킨은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출발해 게임, 웹툰·웹소설 시장에서 주로 사용됐던 용어이다. 그런데 드라마와 영화 등 영상 시장으로도 확산되기 시작해 ‘먼치킨물’ 열풍에 이르렀다.

이 작품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마블의 히어로물과는 다르다. 아이언맨처럼 슈트를 입는 것도 아니고,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망토를 걸치는 것도 아니다. 굳이 우주로 날아가지도 않는다. 지난 2월 종영한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주인공이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자신을 버리고 바람난 남편과 그 상대인 자기 친구를 응징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먼치킨물 성공 사례로 꼽힌다. 역대 tvN 월화드라마 중 평균 시청률 1위, 티빙에서 서비스된 역대 tvN의 콘텐츠 가운데 유료가입기여자 수 1위, 아마존프라임비디오에서 글로벌 일간 TV쇼 순위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왜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하게 됐을까? 먼치킨물은 어떻게 히어로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걸까?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 / 사진=티빙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 / 사진=티빙
망토 없이도 나는 히어로가 된다오랫동안 한국 영상 시장에서 먼치킨물을 포함한 히어로물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장르였다. 대부분이 애니메이션이거나 ‘우뢰매’, ‘스파크맨’ 같은 청소년이 즐겨 볼 작품 정도였다. 그러다 2020년 전후로 급증하며 영상 시장의 핵심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결정적인 계기는 산업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마련됐다. 웹툰·웹소설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먼치킨물이 영상 시장까지 확산된 것이다. 기존 한국 드라마와 영화는 철저히 현실을 기반으로 했다. 이와 달리 웹툰·웹소설에선 어떤 공식도 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국내에서 이 시장이 커지며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가 열리고 펼쳐지게 됐다. 워낙 참신한 소재와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다 보니 영상 시장에서도 웹툰·웹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이 상상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웹툰·웹소설에서 주류가 된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코드를 적극 가져오게 됐는데, 이 대부분이 먼치킨물에 속했다.

그런데 이 같은 산업구조의 변화만으로 오늘날의 먼치킨물 열풍을 전부 설명하긴 어렵다. 그 안에 담긴 주요 캐릭터와 스토리가 변화하면서 차별화된 한국형 히어로물이 나오게 됐기 때문이다. 먼치킨물의 계보를 살펴보자. 2020년 전부턴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 ‘마녀’ 시리즈, 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 시리즈 등이 나오기 시작했고 2020년 이후엔 드라마 ‘모범택시’ 시리즈, ‘경이로운 소문’ 시리즈 등이 나왔다. 여기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초능력을 가진 인물 또는 ‘범죄도시’의 마석도 형사처럼 주먹과 힘 자체가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주를 이뤘다.

최근에 나온 먼치킨물 작품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최신작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의 서사, 개인적 감정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 ‘이재, 곧 죽습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평범한 캐릭터를 내세우며, 주인공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들에게 초능력이나 괴력은 없다. 대신 웹툰·웹소설의 ‘회·빙·환’ 설정을 그대로 적용했다. 주인공이 회귀, 환생을 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면서 남들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게 되는 것이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캐릭터에 웬만한 초능력 못지않게 큰 무기가 되어준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의 지원(박민영 분)은 2023년에 죽었지만 2013년에 다시 눈을 뜨고, 자신을 배신하게 될 남편을 자신이 아닌 친구와 결혼시킨다. 그리고 진정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성을 만난다. 돈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주가가 크게 뛸 종목에 투자해 돈도 번다.

이는 결국 ‘선택’의 코드와 연결된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두고두고 후회하게 되는 선택들이 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그 선택을 되돌려 긍정적인 결과를 갖게 해줌으로써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여기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자신은 제대로 된 선택을 하지 못했고 결국 낙오됐다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자조적인 사회 분위기도 담겨 있다.

나아가 기존 히어로물과 달리 깨달음과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것은 ‘나’를 돌보고 다독이는 것으로 귀결된다. 나를 소중히 대하고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보다 집중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이재, 곧 죽습니다’에선 암울한 현실에 쉽게 목숨을 끊었던 이재(서인국 분)가 환생을 반복하며 자신의 생명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에서 지원은 회귀하여 자신을 돌보고 보호하는 법을 깨우친다. 그는 능력은 없으면서 부원을 괴롭히고 실적만 가로채는 상사에게 더 이상 당하지만 않고 다양한 전략으로 반격한다. 또한 유도를 배워 자신을 위협하는 남편 민환(이이경 분), 민환과 바람났을 뿐 아니라 온갖 거짓말로 자신을 뒤에서 음해하고 있었던 친구 수민(송하윤 분)을 엎어치기로 제압한다. 이를 통해 시청자들은 배신과 술수가 난무한 세상에서 내가 나를 소중히 대하고 지키는 것만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이란 것을 되새기게 된다. ‘했어야 하는데’ + ‘해야 하는데’를 해소하는 통쾌함
드라마 살인자o난감 /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o난감 / 사진=넷플릭스
먼치킨물의 또 다른 유형은 ‘살인자O난감’, ‘비질란테’처럼 사회적 문제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안티히어로(자신의 이기심 또는 성격 때문에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악을 응징하는 결과를 낳음) 또는 다크히어로(정의감으로 행동하지만 폭력을 적극 사용하는 영웅) 장르의 형태를 띤다. ‘살인자O난감’에서 주인공 이탕(최우식 분)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후 자신이 죽인 사람들은 죄질이 나쁜 범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후에도 살인을 이어가게 된다. ‘비질란테’는 낮에는 법을 수호하는 모범 경찰대생이지만 밤이면 법망을 피한 범죄자들을 직접 응징하는 지용(남주혁 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코드는 ‘심판’이다. 법으로는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게 된 범죄자들을 보며 분노를 느끼고, 사회적으로 심판하고 처벌하고 싶은 대중의 심리를 적극 반영한 것이다.

“스토리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사건을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보니까.” 스토리 전문가 리사 크론은 저서 ‘스토리만이 살길’에서 이같이 말한다. 한국의 먼치킨물은 철저히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반으로 한다. 시청자가 평소에 느꼈을 ‘했어야 하는데’라는 개인의 선택과 후회, ‘해야 하는데’라는 사회적 분노와 당위성이 주인공의 생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청자는 주인공의 눈으로 나의 삶과 우리 사회를 다시 곱씹어 보게 된다. 나아가 내 인생도 구원하고, 범죄자도 처단하는 멋진 먼치킨이 되어보는 짜릿하고 통쾌한 상상을 하게 된다.

이와 달리 개인, 사회보다 저 먼 우주와 새로운 세계로 뻗어간 마블의 히어로, 그 히어로의 머릿속과 대중의 머릿속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사람들은 한국의 먼치킨물에 보다 몰입하고 열광하게 되지 않을까. 굳이 슈트를 입거나 망토를 휘날리지 않아도 나 자신을 강력한 히어로로 만들어주니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