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지난 8일 정용진 회장 승진 단행…이명희, 총괄회장 자리로
이명희 총괄회장, 1979년 신세계백화점 입사 후 국내 유통산업 트렌드 주도
이마트·스타벅스·프리미엄아울렛 등 새로운 업태로 시장 선도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 (그래픽=송영 디자이너)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 (그래픽=송영 디자이너)
신세계그룹이 전환점에 서 있다. ‘이명희의 신세계’가 ‘정용진의 신세계’로 변화하는 시기다. 1998년 회장에 오른 지 26년 만에 이 회장은 ‘총괄회장’ 직을 맡기로 했다. 영향력은 여전하겠지만 새로운 신세계로의 전환점은 분명하다.

이 총괄회장은 ‘늦깎이 경영인’이며 언론에도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뤄낸 성과는 눈부시다. 신세계는 조선호텔, 신세계백화점 본점과 영등포점, 옛 동방프라자 지하 점포만 가지고 계열분리했다. 호텔과 점포 몇 개를 기반으로 신세계를 재계 11위의 유통 명가로 일궜다. 국내 유통의 모든 새로움은 이 총괄회장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가 최초의 여성 경영인이자 지금의 신세계를 만든 그는 국내 유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됐다.삼성家 최초의 여성 경영인 이명희그는 1943년 이병철 회장의 3남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37세까지 가정주부로 살아온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의 ‘경영 데뷔’는 늦었다. 오빠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만 해도 25세에 동양방송과 삼성물산에서 경영 수업을 시작했다. 이전까지 이 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막내딸로, 정재은 신세계 명예회장의 아내로,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 사장의 엄마로 살았다.

아버지인 이병철 선대회장이 ‘여자도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며 경영 참여를 설득한 끝에 이 총괄회장은 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본부 이사로 입사했다.
(그래픽=송영 디자이너)
(그래픽=송영 디자이너)
이 총괄회장은 2005년 신세계 사보에서 아버지와의 일화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제안으로 37세에 현모양처의 꿈을 접고 신세계 경영에 뛰어들었다”며 “출근 당시 아버지가 ‘서류에 사인하지 말아라, 어린이 말이라도 경청해라,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하지 말라, 사람을 나무 기르듯 기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다. 그런 영향일까. 경영에 참여한 이후 주변에서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1991년 삼성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선언할 때까지만 해도 신세계백화점은 총 2개 지점(본점, 영등포점)과 조선호텔이 전부였다. 1997년 공정거래법상 삼성그룹과 완전히 계열분리됐다. 부회장이었던 그는 1998년 남편 정재은 당시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넘겨받았다. 신세계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총괄회장은 1999년 사명을 ‘신세계백화점’에서 ‘신세계’로 변경했다. 백화점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통 사업을 펼치겠다는 신호였다. 창사 40주년을 맞는 2003년까지 매출을 3배 이상 늘려 12조5000억원을 돌파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당시 이 총괄회장은 4개 규모로 운영된 백화점을 10개 점포로 늘리고, 할인점은 63개로 확대해 전국 규모의 사업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사라진다’는 이 총괄회장의 가장 중요한 경영철학이기도 하다.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 이 총괄회장은 회사를 성장시킬 전문경영인을 물색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검증한 사람에게 일을 맡겼다. 구학서 전 신세계그룹 회장과 허인철 전 이마트 사장(현재 오리온 부회장) 등이 그들이다. 구 전 회장은 1972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해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중 이 총괄회장의 눈에 띄어 1996년 신세계백화점 경영지원실로 옮겼고, 2014년 퇴임까지 총 18년간 신세계에서 근무했다. 이 가운데 10년은 최고경영자(CEO)로 있었다. 1986년 삼성그룹으로 입사한 허인철 전 사장은 1997년 신세계로 옮긴 뒤 2014년 퇴임까지 17년간 신세계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이 총괄회장을 도와 신세계그룹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주인공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의 기업들이 부동산을 매각할 때 신세계는 전국 요지의 땅을 사들였다. 이는 이후 이마트가 독보적 대형마트로 성장하고, 신세계가 롯데그룹과 유통 황제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 총괄회장은 전략이 확정되고 나면 부동산 매입 등 굵직한 결정은 모두 구 전 회장과 허 전 사장에게 일임했다. 그는 사후보고만 받았다. 구 전 회장의 선택을 100% 신뢰했고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허 전 사장도 2006년 월마트코리아 인수 관련한 실무를 성공적으로 처리하면서 이 총괄회장의 신임을 얻었고, 2012년 이마트 대표이사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외에도 아울렛 부지 매입, 신세계·이마트 인적분할 등을 주도하며 이마트를 키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허인철 전 사장은 구학서 전 회장과 달리 기가 센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오너들에게 할 말을 다 하는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명희 총괄회장은 이런 허 사장을 곁에 두고 쓸 만큼 포용력도 넓었다”고 전했다.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이병철 회장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총괄회장의 성과는 숫자로 증명된다. 1997년 삼성그룹에서 법적으로 계열분리할 당시 신세계의 매출은 1조7500억원 수준이었으나 현재 신세계그룹(이마트+백화점)의 매출 규모는 35조8300억원에 달한다.

재계 순위도 크게 뛰었다. 1997년 33위에서 2000년 29위, 2005년 16위, 2015년 13위까지 올라섰다. 현재 신세계의 재계 순위는 11위(2023년)를 유지하고 있다. 협동조합인 농협을 제외하면 10위에 해당한다.
(그래픽=송영 디자이너)
(그래픽=송영 디자이너)
리틀 이병철, 철의 여인…유통명가 된 신세계이 총괄회장이 신세계에 첫 입사한 이후 45년이 지났다. 그간 신세계는 다양한 ‘최초’의 시도를 해왔다. 이 총괄회장이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유통의 역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2010년대까지 국내 유통산업의 새로운 업태는 모두 신세계에서 나왔다.

이마트의 시작도 그랬다. 이 총괄회장은 상무 시절 미국 체류 중 프라이스클럽과 월마트 등 창고형 점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993년 국내 최초의 대형마트인 이마트를 오픈했다. 1993년 이마트 첫 점포인 창동점은 오픈하자마자 2만7000여 명의 손님이 몰리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총괄회장은 1997년 IMF 외환위기도 기회로 이용했다. 당시 경제 상황이 악화하면서 국민들의 소비심리가 비관적으로 바뀌고, 이로 인해 주요 사업인 백화점의 수익성도 악화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대로 승부하던 이마트의 매출은 늘었다.

선택과 집중도 그의 장기다. 1993년 미국 코스트코와 기술제휴 형태로 운영해온 회원제 할인매장 ‘프라이스클럽’은 1998년 다시 코스트코에 매각했고, 2000년에는 한미은행에 카드사업 부문을 팔아버렸다.

이때 마련한 자금으로 도산한 업체들이 내놓은 주요 부지를 공격적으로 매입하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이마트 지점 확대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발 앞선 이마트의 국내 마트산업 선점으로 2000년대 초반 세계 최대 유통기업인 월마트의 한국 진출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토종 유통기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월마트코리아는 2006년 국내 점포 16개 모두를 이마트에 넘기며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대형마트 업태가 성숙기에 접어들어 저성장 국면을 보이고 있지만 이마트는 현재 점포수 155개(트레이더스 포함), 별도기준 매출 약 16조5500억원(2023년 기준)을 기록하며 부동의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이 총괄회장은 미국 유학 생활 동안 스타벅스를 경험한 정용진 회장과 함께 스타벅스를 국내에 들여오기도 했다. 한국 프리미엄 아울렛 역사를 연 것도 이 총괄회장이다. 2007년 사이먼그룹과 손잡고 국내 최초의 프리미엄 아울렛인 여주프리미엄아울렛을 열었다.

2007년엔 국내 현존하는 백화점 중 가장 오래된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을 77년 만에 명품관으로 새단장했고, 2009년엔 당시 세계 최대 규모 백화점 부산 센텀시티점을 열었다. 2016년에는 딸인 정유경 총괄사장과 함께 국내 최고의 백화점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을 증축해 강남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만들었다.

철의 여인이라 불렸지만 이 총괄회장은 주변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삼성가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부도난 새한그룹의 일가를 챙긴 것도 이 총괄회장이었다. 또 아버지와 함께 있는 사진을 많이 찍었던 기자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음식점을 열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