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밀히 말해 3종(컴포트, 크라운 컴포트, 크라운 세단)인데 일반인의 눈에는 잘 식별되지 않는 닮은꼴 3형제다. 앞의 두 종은 2018년 단종될 때까지 1997년 연식을 계속 유지해 왔고, 현재까지도 일본 택시의 64% 이상을 차지할 만큼 지배적 모델로 군림한다.
고풍스러운 건지 단순 구식인 건지 애매한 외양의 컴포트는 택시 전용모델이다. 1995년 이래 대략 40만 대(홍콩,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로 수출된 물량 제외)가 판매되어 30년간 일본 택시계를 독주했다. 닛산의 크루와 세드릭 Y31도 있지만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편이 더 쉽다.
도요타는 1936년 모델 AA를 출시하면서 일본 택시 업계에 뛰어들었고, 1953년 토요펫 슈퍼 RH 모델 출시로 입지를 굳혔다. 뛰어난 승차감과 안전설계로 높이 평가받기도 했지만 정부가 차량 연식과 종류를 엄격히 규제한 것도 이롭게 작용했다. 택시 내수를 발판으로 도요타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도요타의 크라운 컴포트 1997년식 (더 드라이브)
교토의 검정색 아이오닉 택시
현대차·기아는 어느덧 세계 3위의 자동차 생산 판매 기업이다. 유럽, 북미, 아시아, 중동 어디를 가도 이들 차량을 마주치는 것은 더이상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기억을 더듬어 보시라.
일본은 명실상부한 자동차 왕국이다. 세계 1위 도요타를 비롯해 혼다와 닛산이 10위권 안에 있으며 스즈키, 미쓰비시, 마쓰다, 이스즈, 스바루, 다이하쓰 등 쟁쟁한 브랜드들이 줄을 잇는다. 몇몇 독일, 영국, 이탈리아계 럭셔리 모델을 제하면 스웨덴의 볼보(현재 중국 기업 소유)도, 프랑스의 르노도, 미국의 GM과 포드도 찾아보기 힘들다.
택시 경우도 마찬가지. BMW와 벤츠 같은 고급 세단도 일본 택시로 사용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한국에서도 외제차량 택시는 희귀하며 개방적인 미국 역시 제한적이었다(과거형).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뉴욕은 옐로캡으로 불리는 포드의 크라운 빅토리아 일색이었고, 런던도 블랙캡(또는 해크니 캐리지)으로 통하는 TX1 단일종이 지배했으니.
이처럼 자동차 생산국들이 자국 차량만을 고집하는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첫째 특정 모델로 제한하는 정부 정책 및 규제(런던의 블랙캡), 둘째 지정 차량 구입 시 제공되는 각종 지원금과 혜택, 셋째 수리와 유지비용, 특히 부품교환의 편의성, 넷째 국내 이용객들의 문화·심리적 친근감이 그것이다.
일본 내 등록된 택시 차량은 2021년 기준 약 22만 대. 그중 98% 이상이 일본 ‘국산’ 차종이다. 극소량의 닛산을 제하면 절대 다수가 도요타 차량이다. 1% 정도에 지나지 않은 외국 차량 중에는 BMW의 iX와 i7, 테슬라의 모델3와 Y가 포함된다. 그리고 현대의 아이오닉5와 코나도 있다.
지난 1~2년 사이 교토를 방문한 분들이라면 길거리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검정색 현대 아이오닉5 택시. 세련된 디자인, 육중하면서도 날렵한 주행 ‘자태’가 여느 택시보다 돋보인다. ‘국산’ 공화국, 외제 불모지, 난공불락의 자동차 왕국으로 알려진 일본에 등장한 현대 아이오닉, 그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토 MK사의 현대 아이오닉5 (마이도나 뉴스)
일본의 약한 고리, 전기차
1997년 교토의정서 채택 이래 일본은 각종 국제기후대책회의에서 목소리를 키워왔다. 하지만 정작 전기차 보급에 있어서는 한참 뒤처졌다. 2021년 기준 일본 전체 택시 21만 대 중 전기차 비중은 고작 0.1%에 불과하다. 뾰족한 정책 돌파구도 없고 일반인들의 관심 역시 저조하다.
궁리 끝에 정부가 찾은 대안은 택시업계를 조이는 것이었다. 택시는 개인 차량보다 하루 평균 7배 많은 주행을 기록하니 압박 명분도 충분했다. 차량 구매 비용의 60% 이상을 보조금으로 지원했지만 미미한 성과로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강력한 견인자가 등장했다. 택시 앱 GO였다.
GO는 작년 12월 100여 개 파트너 운송회사와 함께 2030년까지 전기차 수를 전체의 20%에 달하는 4만2000대로 늘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문제는 일본 국내 기업의 전기차 생산이 매우 한정적이라는 데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도요타는 프리우스로 대표되는 하이브리드에만 집중해 왔다. 현재 출시된 전기차라고는 스바루와 함께 개발한 bZ4X가 유일하다.
닛산의 리프와 사쿠라, 미쓰비시의 eK X-EV, 혼다의 e 등이 있지만 이들은 모두 경차에 속한다. 그나마 스바루 솔테라와 렉서스 UK 300e가 SUV인데 디자인과 주행성능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실정이다. 외국산 EV의 일본 택시업계 진출은 이렇게 시작됐다.
선두주자는 교토 기반 택시업체 MK. 닛산 전기차 리프를 이미 경험한 MK는 후속으로 총 50대의 아이오닉5를 선택했다. 일회 충전 최대 주행 618km, 넓고 편한 뒷좌석, SUV면서도 고급 세단의 분위기를 지녀 교토 관광객에 적합하다는 판단이었다.
총 738대 차량을 보유한 MK는 2022년에 전기차 비율 12%를 달성했고 2025년에 30%, 2030년까지는 100%로 전환할 계획이다. 아이오닉 외에도 10대의 BMW i7와 5대의 iX를 보유한 아오키 노부아키 MK 회장은 “전기차 가격은 기존 차량보다 40% 높지만 연료비는 5분의 1 수준”이라며 “5년 운행 후 총 비용은 기존 차량 대비 20~30% 낮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일본 법인장에 따르면 2022년 7월부터 112대의 아이오닉5와 30대의코나를 MK 측에 판매했다 한다. 그 외에도 GO와 제휴한 후쿠오카 기반 운송회사에 4대, 장거리 가동 검증 및 극한기후 검증용으로 제일교통이 구매한 7대의 아이오닉이 삿포로와 오키나와에 배차되었다고 한다. 도쿄 올림픽 마중물 JPN 택시
탄소저감 외에도 일본의 택시 차종 변화를 유발한 또 다른 촉매가 있었다. 바로 2020 도쿄 올림픽-패럴림픽이다. 세계적 축제에 몰려오는 외국 관광객을 의식해 일본 정부는 30년간 지속된 도요타 컴포트 독주를 종식하고 차량 ‘다양성’ 시대를 열었다.
당국이 내세운 새 택시는 JPN(일본명 히노마루)으로 2017년 도쿄 모터쇼에서 정식 데뷔했다. 운송 회사, 장애인 단체 대표 등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 논의를 거쳐 탄생된 최초의 차량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택시’라는 기치에 걸맞게 바닥을 낮춰 노약자 승하차를 고려했고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공간도 충분히 확보했다.
JPN은 높은 천장, 자동 개폐 장착, LPG 하이브리드 시스템으로 탄소배출량을 대폭 줄였다. 컴포트에 비해 연료 소비량이 절반에 불과하고 충돌 방지 센서 장착으로 사고가 10% 감소해 운수 사업자 및 택시기사들의 호응도 뜨겁다.
아쉽게도 이 역시 전량 도요타 생산이다. 또 외양과 기능 면에서 런던의 블랙캡을 빼닮아 일본의 독창적 디자인이 상실된 점도 아쉽다. 판매 가격은 350만 엔으로 컴포트보다 30% 이상 비싸지만 보편적 택시 지원금과 지자체의 친환경 차량 보조금으로 단가가 내려간다.
2022년 2월 말 기준 전국에 2만8000대가 운행 중이었는데 관광객이 폭주한 작년 한 해 30% 이상 증가세를 보였다. 올림픽 폐막과 함께 보조금도 사라져 운수업자들의 재정 부담이 늘어났지만 증가세는 여전하다. 2022년 이미 620대의 택시 중 절반을 JPN으로 교체한 히노마루코츠는 2023년 9월 전체 2/3를 JPN으로 채웠다. JPN 택시 (일본교통)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했나. 연인 사이는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음식과 언어만큼은 정반대다. 해외 거주나 긴 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겪어봤으리라. 칼칼한 국물과 기름기 없는 반찬들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현지어의 어눌함 대신 자유자재 표현력을 주는 모국어의 안락함.
시청각도 마찬가지다. 낯선 것을 찾아 떠나온 여행이더라도 친숙한 것들을 조우할 때 훅 밀려오는 반가움. 베트남 길모퉁이에서 마주친 신한은행, 말레이시아에서 본 화사한 CU 편의점, 파리 중심부에서 발견한 파리바게뜨, 맨해튼의 붐비는 본촌치킨, 방콕 쇼핑몰에서 들려오는 K팝 음악.
도요타 왕국 일본에서 현대 아이오닉5를 마주친 반가움도 꽤 오래 지속된다. 우리의 것이 세계 곳곳에서 알려지고 존중받는다는 느낌, 훈훈하다. 자부심과 인정욕이 섞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굳이 ‘국뽕’이라 매도하지는 말자. 역사의 대합실에서 오래 기다린 나라의 시민들에게 이 정도의 긍지는 과잉이 아니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