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절박함이 대만에 준 선물, 반도체 강국 [EDITOR's LETTER]
빌 게이츠의 ‘악몽 메모’는 유명합니다. 그는 현역에 있을 때 마이크로소프트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위협 요소들을 끝없이 메모했습니다.

이 악몽 메모가 유출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주가가 급락하기도 했지요. 메모에는 ‘이런 악몽은 현실이다’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해프닝이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해는 1991년. 빌 게이츠가 포브스 표지를 장식한 전성기였습니다.

위기의식과 절박함은 성공한 경영자들의 공통점인가 봅니다. 요즘 가장 핫한 경영자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의 명언이 있습니다. “우리가 폐업하기까지 30일 남았습니다.” 파괴와 혁신을 멈추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침은 간명했습니다. “걷지 말고 뛰어라.”

2000년대 초 세계 1위 자동차 기업 도요타의 오쿠다 히로시 회장이 내건 슬로건은 ‘타도 도요타’였습니다. 그는 “내부에 안주하며 도전하려 않기 때문에 완전한 글로벌 기업이 되지 못한다. 적은 도요타 안에 있다”고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한경비즈니스>는 이번 주 반도체 시장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대만에 대해 다뤘습니다. 엔비디아, TSMC, AMD, SMCI 등 현재 시장을 움직이는 반도체 기업의 창업자나 CEO가 모두 대만인입니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한국인들도 잘났는데 왜 대만계만 뜰까. 이민도 보낼 만큼 보내고, 유학도 대만보다 더 많이 갔는데, 왜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둔 한국인 창업자는 드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한발 한발 찾아 들어가다 마주친 단어가 ‘절박함’이었습니다.

우선 대만은 나라 자체가 절박함 속에 있었습니다. 대만은 네덜란드와 일본 식민지를 거쳤습니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에는 2만 명이 죽는 내전에 가까운 학살이 있었고, 계엄령하에서 산 세월만도 38년. 땅덩어리는 경상도만 한데 이 섬을 언제든 집어삼키려는 늑대 같은 중국이 12km 북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는 미국 등 수많은 나라가 중국과 수교한다고 대만과 외교관계를 끊는 일까지 겪었습니다. 생존을 위한 절박함은 대만을 뒤덮었고, 이들은 전자산업과 반도체에서 살길을 찾았습니다. 끊임없이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 계획을 세웠고 실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TSMC, 폭스콘 등은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탄탄한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이 더해져 대만은 제조강국이 됐습니다.

개인들도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십 년 전 대만에서 미국으로 떠난 이민자, 유학을 간 청년들. 그들은 대만으로 돌아올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술이 있어도 받아줄 대기업이 없었고, 창업을 해도 제품을 팔 만한 시장도 대만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미국 본토에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달랐습니다. 유학생들은 교수가 되거나 성공해 ‘금의환향’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떠났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이들을 받아줄 직장도 생겨났습니다. 삼성, 현대, LG, 대우 등 대기업이었습니다. 5000만 명이란 수요도 한국에 있었습니다. 한국과 대만의 차이에 대해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 마음가짐이 달랐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외에도 엔지니어에 대한 인식 차이, 범중화권의 네트워크와 협업의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만과 대만인의 절박함이 그들의 오늘을 있게 만든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한동안 절박함이 별로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이야기입니다. 산업과 문화 민주주의 모두 선진국 수준에 다다르니 여유가 생겼던 것도 사실입니다. 2000년대 이후 이렇다 할 산업 정책도 없이 축적된 자산으로 먹고살았습니다.

단적인 예가 삼성전자에 대한 환상입니다. “삼성전자 주식은 언젠가는 오른다”며 막연한 믿음으로 삼성전자 주식을 샀습니다. “일본, 미국 기업도 제친 삼성전자가 대만 TSMC 정도는 언젠가 넘어서겠지”란 생각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잠시 위기의식이 밀려난 사이 절박함으로 똘똘 뭉친 대만과 대만계 창업자들은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 됐습니다.

위기의식은 절박함을 느끼게 하고, 절박함은 몰입과 해결을 위한 창의력을 가져옵니다. 스티브 잡스가 왜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외치고 다녔는지 이제야 이해할 듯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