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승계의 시간, 분쟁의 시간]
임종윤 한미약품 전 사장(왼쪽)과 임종훈 한미약품 전 사장이 3월 28일 오전 경기 화성시 라비돌 호텔에서 열린 한미사이언스 ‘제51기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임종윤 한미약품 전 사장(왼쪽)과 임종훈 한미약품 전 사장이 3월 28일 오전 경기 화성시 라비돌 호텔에서 열린 한미사이언스 ‘제51기 정기 주주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한국경제신문
“기쁠 줄 알았지만 기쁘지 않고 마음이 아프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싶지 않다.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OCI와 부득이하게 표를 다투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부끄러움이 앞선다.”

한미약품-OCI그룹 통합을 반대하며 3개월간 어머니, 여동생과 공방을 벌인 끝에 지난 3월 주총에서 승리한 임종윤 전 한미사이언스 사장이 밝힌 소회다. 한미그룹 모녀와 형제간 경영권 분쟁은 한 편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다. 예측하기 어려울 만큼 지분 경쟁이 팽팽하게 이어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임종윤·종훈 형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최근 주요 기업 주총이 마무리되면서 재계를 덮친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의 승자와 패자가 나왔지만 갈등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는다. 패자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다시 불씨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계에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오너일가 간 재산·상속 관련 다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성과 한화는 일찌감치 승계 관련 분쟁을 겪었다. 1969년 삼성에서는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 이창희가 아버지를 몰아내려고 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한화는 1990년대 김승연, 김호연 형제간 상속 분쟁을 겪었다. 그 결과 한화와 빙그레가 분리됐다.

2000년에 벌어진 현대그룹 왕자의 난은 한국 대기업에서 2세로 승계되는 과정이 험난할 것임을 예고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이 승자였다. 이어 2005년 두산에서 형제의 난이 벌어져 양측은 수년간 진흙탕 싸움을 이어갔다. 이후 롯데·한진·효성·한국앤컴퍼니·금호·LG 등도 재산권이나 경영권 분쟁을 피하지 못했다.
3월 28일 한미사이언스 ‘제51기 정기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모습. 사진=한국경제신문
3월 28일 한미사이언스 ‘제51기 정기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모습. 사진=한국경제신문
이 가운데는 경영권 분쟁이 대물림되는 경우도 있었다. 금호가의 경영권 갈등 역사는 뿌리가 깊다. 금호석유화학 박철완 전 상무가 일으킨 ‘세 번째 조카의 난’이 최근 박찬구 회장의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박 전 상무가 내년 주총에서도 주주제안에 나설 수 있어 분쟁의 불씨가 되살아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금호석유화학그룹과 박 전 상무와의 갈등은 2019년 주총에서 박 전 상무가 박찬구 회장의 재선임에 반대하면서 촉발됐다. 박 전 상무는 당시 처우와 급여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상무의 경영권 분쟁 시도는 박찬구 회장의 장남이자 3세 경영인인 박준경 사장으로의 승계 작업을 본격화한 계기가 됐다. 2020년 박 사장이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한 반면 박 전 상무는 승진하지 못했다. 이후 박 전 상무가 박 회장과의 지분 공동 보유와 특수관계 해소를 선언한 뒤 경영권 분쟁이 이어졌다.

금호그룹은 박인천 창업자의 셋째 아들인 박삼구 전 회장과 넷째 아들인 박찬구 회장의 갈등으로 2010년 금호아시아나그룹과 금호석유화학그룹으로 갈라졌다. 둘로 쪼개진 이후에도 양측이 소송과 고발을 이어가는 등 수년간 갈등이 지속됐다.

최근 터져나온 고려아연과 영풍의 갈등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집안은 혈연 관계는 아니지만 1949년 장병희(영풍)·최기호(고려아연) 창업자가 동업자 정신으로 영풍그룹을 설립한 뒤 75년간 동업 관계를 유지해왔다. 양측이 2세대에서 3세대로 넘어오며 갈등이 시작됐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체제가 시작된 이후 양측의 지분 확보 경쟁이 본격화됐다. 올해 주총을 둘러싸고 고려아연과 최대주주 영풍이 사상 첫 표 대결을 벌였으나 결과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하지만 주총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분쟁의 시작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주총 이후 고려아연은 완전 독립을 위해 사옥을 영풍빌딩에서 종로로 이전하고, 그동안 영풍과 함께 썼던 기업이미지(CI) 변경도 추진하고 있다.


[돋보기]
그래픽=박명규 기자
그래픽=박명규 기자
재계 경영권 분쟁 사례

한미그룹
송영숙 한미그룹 회장과 장녀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 모녀가 상속세 부담에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 통합을 추진했으나 장·차남인 임종윤·임종훈 한미약품 사장이 반대하며 오너간 경영권 분쟁이 발발
결과: 한미사이언스 주총 표 대결에서 통합 반대파인 장·차남이 승리

고려아연
75년 동업자 관계였던 장형진 영풍 고문 측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 고려아연 지분 확보 경쟁에 이어 주총에서 배당안과 정관 변경안을 놓고 사상 첫 표 대결을 벌임
결과: 표 대결이 무승부로 끝났지만 고려아연이 영풍과의 모든 협업 중단을 추진하며 ‘홀로서기’를 가속화

한국앤컴퍼니그룹
조양래 명예회장이 차남 조현범 회장에게 자신이 보유한 그룹 지분 전량을 양도하면서 경영권을 승계하자 조현식·조희경·조희원 삼남매가 조 명예회장에 대한 성년후견 심판을 청구. 2023년에는 삼남매가 사모펀드 MBK와 손잡고 경영권 확보를 위한 공개매수를 진행함
결과: 조 명예회장과 조 회장이 방어에 나서면서 삼남매의 실패로 끝남

금호석유화학그룹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과 조카인 박철완 전 상무가 2021년부터 자사주를 화두로 경영권 분쟁 중
결과: 올해 박 전 상무가 행동주의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과 함께 세 번째 ‘조카의 난’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박 회장 측이 완승

효성그룹
조석래 명예회장의 차남 조현문 전 부사장이 2014년 형 조현준 회장과 주요 임원진을 횡령·배임으로 고발하며 ‘형제의 난’을 촉발
결과: 조 전 부사장이 승계 구도에서 밀려나며 조현준·조현상 형제의 3세 경영 체제 안착

롯데그룹
2015년부터 벌어진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 경영권 분쟁
결과: 신 전 부회장이 매년 일본 롯데홀딩스 주총에서 자신의 이사직 복귀안과 신 회장의 해임안을 제출해 표 대결을 벌였으나 모두 패배함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타계 이후 경영권을 물려받은 조원태 회장에 대항해 누나 조승연(개명 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사모펀드 KCGI, 반도건설과 3자 주주 연합을 결성하며 경영권 장악 시도
결과: 산업은행이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위해 한진칼 지분을 확보하면서 조 회장이 경영권 방어에 성공, 경영권 분쟁 종료


[돋보기] 구찌·아디다스도 피하지 못한 가족 분쟁

한국보다 오랜 가족경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많은 해외에서는 더 극단적인 사례도 많다. 1921년 피렌체의 작은 가죽제품 공방에서 시작돼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는 창업자 구치오 구치의 사망 이후 손자 세대에서 벌어진 경영권 갈등으로 청부 살인까지 일어났다.

1995년 구찌의 3대 회장인 마우리치오 구치를 청부 살해한 사람은 전 부인 파트리치아 레지아니다. 둘은 파트리치아의 집착과 허영심으로 가정불화를 겪게 되며 1991년 이혼했다.

구찌의 경영권을 승계한 마우리치오가 1993년 투자그룹에 경영권을 매각한 뒤 1억7000만 달러(약 1866억원)를 챙기고도 자신에게 인색하게 굴자 증오가 심해져 결국 청부 살인을 의뢰했던 것이다. 가족 갈등과 경영 실패로 구찌는 3대 만에 투자그룹으로 넘어가게 됐다.

1924년 탄생해 올해 100주년이 된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도 가족기업이었다. 독일인 형제 아돌프 다슬러, 루돌프 다슬러가 세운 운동화공장 ‘다슬러 형제 신발공장’에서 시작됐다.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의 동생 아돌프는 신발 제조를 맡았고 언변이 뛰어난 형 루돌프는 마케팅을 담당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 4관왕에 올랐던 제시 오언스가 다슬러 러닝화를 신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인지도가 상승했고, 세계 각국의 육상 선수들이 다슬러 운동화를 신길 원하면서 1936년부터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게 된다.

나치의 스포츠 장려 정책에 힘입어 공장은 날로 발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업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경영권을 둘러싼 형제의 갈등이 깊어졌다. 1948년 형제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했고 형 루돌프가 ‘푸마’를 설립했고 동생 아돌프는 1949년 ‘아디다스’를 만들었다. 결국 ‘형제의 난’이 세계적인 두 스포츠용품 회사를 탄생시킨 셈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