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그래픽=송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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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고(고물가·고금리·고환율) 현상 심화에 중동발 악재까지 겹치며 대내외 불확실성이 지속되자 기업들이 초긴장 모드에 돌입했다.

SK그룹이 올해 들어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주재하는 ‘토요 사장단 회의’를 20년 만에 부활시킨 데 이어 삼성에서도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주 6일 근무제 등 위기경영 태세를 갖추는 모습이다.

주요 기업 임원들은 해외 출장 자제를 넘어 주말 출근과 연봉 일부 반납으로 근무 기강 다잡기에 앞장서고 있다. 임원이 앞장서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다.

“임원 주말 출근, 경제위기 피부로 느껴”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삼성SDI, 삼성SDS, 삼성디스플레이 등 주요 계열사는 주말 이틀 중 하루는 출근하는 임원 주 6일제에 돌입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DS부문에 한해 임직원의 비위 사실을 제보하거나 자진신고 할 수 있는 근태부정신고센터도 신설한 바 있다.

반도체 업황 악화로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이 최악의 적자를 겪으면서 DS부문 임직원들 근무 기강 확립에 나선 것이다. 임원 주 6일 근무제는 그룹 차원에서 내린 공식 지침은 아니지만 이를 무시할 수 있는 계열사는 없었다는 게 삼성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위원장은 삼성 임원들의 주 6일 근무 결정에 대해 “국가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피부로 느낀다”고 말했다.
그래픽=송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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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삼성은 주력 사업이 모두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지난해 반도체 업황 악화로 반도체(DS)부문에서만 15조원에 달하는 영업적자를 냈고 25년 만에 인텔에 반도체 글로벌 1위 자리도 내줘 ‘반도체 강자’ 위상도 예전만 못하다.

경계현 사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DS부문 임원들은 지난해 실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올해 연봉을 동결하기로 했다. 13년간 지켜온 스마트폰 글로벌 1위 자리도 애플에 빼앗겼다. 삼성전자는 임금 교섭을 매듭짓지 못하면서 노사 간 진통을 겪고 있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초호황기를 누리고 있지만 삼성전자 주가만 제자리걸음을 하며 상승장에서 소외됐다. 지난 3월 삼성전자의 주가를 끌어올린 건 신기술도 HBM3E 공급 계약 확정 소식도 아닌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한마디였다는 건 뼈아픈 대목이다. 젠슨 황이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테스트하고 있는 중인데 기대가 크다”며 “삼성은 매우 비범한 기업”이라고 치켜세웠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 사진=연합뉴스
골프 금지령에 이코노미석 타기도

지난해 사상 첫 적자를 낸 이마트는 창립 31년 만에 첫 전사 희망퇴직을 시행한 데 이어 최근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회사 비용으로 치는 골프를 금지하는 등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섰다. 신세계그룹은 4월부터 핵심성과지표(KPI)를 토대로 임원진에 대한 수시 인사도 단행할 예정이다.

롯데지주는 ‘근무 기본 가이드라인 준수’라는 전언통신문을 통해 전 임직원의 주중 골프 금지와 주말을 포함한 해외 출장 자제령이 내려졌다.

한화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주)한화 모멘텀부문은 지난 3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배터리 세미나&이그지빗 2024’ 행사에 최종 불참을 결정했다. 지난해만 해도 전시회 참가 업체 중 최대규모 부스를 운영했으나 올해 초 내부적으로 비상경영을 선포하면서 판매·관리비(판관비)를 기존 계획 대비 30% 감축한 영향이다.

국내 배터리사 중 지난해 유일하게 적자를 낸 SK온은 출장 시 이코노미석 타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SK텔레콤은 임원에게 법인카드를 이용하는 골프 금지령을 내렸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취지다.

재계 관계자는 “재계 1위 삼성이 임원 주 6일 근무제를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가 위기 상황이라는 방증이고 삼성의 경영 기조 변화에 다른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대부분 기업이 드러내진 않아도 이미 내부적으로 비용 절감 등 비상경영에 돌입한 상태라고 본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서린동  SK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중구 서린동 SK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임원부터 솔선수범…줄줄이 ‘연봉 반납’

실적이 부진한 기업들은 임원 연봉 반납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전기차 시장 침체에 올해 1분기 수천억원대 영업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는 SK온은 이석희 사장이 연간 흑자를 낼 때까지 연봉의 20%를 자진 반납하기로 했다. 이 사장은 임원들에게 오전 7시 출근을 권장했다.

포스코그룹은 장인화 회장 체제 출범에 맞춰 임원 급여를 최대 20%까지 반납하고 임직원에 대한 주식 보상 제도(스톡그랜트) 폐지를 검토하기로 했다. 포스코그룹은 최정우 전 회장 시절인 2021년 12월 책임 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임직원에게 무상 지급하는 ‘스톡그랜트’ 제도를 도입했는데 포항제철소가 침수 피해를 입고 경영이 악화된 상황에서 지난해 4월 최 전 회장 등 경영진이 100억원 규모의 스톡그랜트를 받으며 논란이 일었다.

삼성, SK, LG그룹은 주력 계열사들의 이사 보수 한도를 줄줄이 삭감했다. 삼성전자는 이사 보수 총액 한도를 지난해 480억원에서 올해 430억원으로 줄였다. 일반보수 한도는 330억원으로 전년과 같지만 장기성과 보수한도는 15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감액했다.

SK그룹에서는 SK(주)가 220억원에서 180억원으로, SK텔레콤·SK스퀘어가 이사 보수 한도를 각각 12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감액했다. LG그룹에서는 지주사 (주)LG가 이사 보수 한도를 180억원에서 170억원으로, LG전자는 90억원에서 80억원으로, LG화학은 80억원에서 70억원으로 각각 감액했다.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사진=한국경제신문
새는 돈 막자…돈 안 되는 투자 ‘올스톱’

고금리, 경기침체 영향으로 곳간이 줄어들자 기업들의 투자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최근 주요 기업은 스타트업 투자를 축소하고 있다. 그동안 청사진만 보여줘도 투자가 들어왔지만 지금은 투자 기준이 한층 까다로워졌다는 반응이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기존 사업과 시너지 효과가 확실한 스타트업들과 기술검증(PoC)이나 연구개발(R&D)로 협업한 뒤 단독 투자보다는 조인트벤처(JV) 형태로 공동 투자조합을 꾸리는 추세”라고 말했다.

코로나 시기 글로벌 저금리로 막대한 유동성이 공급되며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던 스타트업 투자 시장은 고금리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며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의 국내 벤처투자·펀드 결성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벤처투자액은 10조9133억원으로 전년(12조4706억원)보다 12% 감소했다. 미국 스타트업 업계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피치북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스타트업 투자액은 1706억 달러(약 228조원)로 전년 대비 29.5% 감소했다.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양재동 현대차그룹 사옥. 사진=한국경제신문
현대차는 해외투자 정리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미국 모빌리티 서비스 업체 미고와 AI 스타트업 퍼셉티브오토마타에 투자했던 돈을 모두 회수했다. 현대차는 2018년 미고에 22억7000만원을 투자해 지분 8.33%를, 퍼셉티브오토마타에 16억6900만원을 투자해 지분 2.56%를 확보한 바 있다.

현대차가 2019년 약 1031억원, 기아가 258억원가량을 각각 투자했던 영국 상용 전기차 스타트업 어라이벌은 기업가치 하락으로 1000억원가량의 평가손실을 반영하며 투자금 전액 손실을 기록했다.

비주력 사업 정리에도 고삐를 죄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첨단소재사업본부 내 IT필름(편광판·편광판 소재) 사업을 1조1000억원에 중국 기업에 매각하고 후속작업으로 첨단소재사업본부 소속 생산기술직들을 대상으로 특별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LG화학의 나프타분해시설(NCC) 2공장 지분 매각설도 꾸준히 돌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기초소재 사업을 중심으로 해외법인을 대폭 정리한 데 이어 말레이시아 자회사 롯데케미칼타이탄(LC) 등을 매각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