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하이브의 자회사 어도어의 경영권 찬탈 의혹과 그에 맞서는 어도어 민희진 대표의 내홍입니다. 사실상의 ‘집안싸움’이죠.
사건 당사자나 관련 아이돌 그룹의 팬, 회사의 주주가 아니라면 딱히 무관해야 할 일인데 어째선지 모두의 관심이 불붙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아고라’의 장이 열렸습니다. 국민연금 이슈도 집어삼킬 만큼 파괴력이 상당합니다.
진중권, 변희재 등 유명 논객들뿐 아니라 직장인의 커피타임에도, 초등학생들이 자리한 길거리 분식집에서도 하이브의 집안싸움이 연일 화제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Q. 하이브와 민희진이 누군데?복잡한 사건에는 중심 인물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은 크게 두 명의 경영자와 한 개의 걸그룹입니다. 기업과 개인일 수도, 기업과 기업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는 하이브. 국내 최대의 연예기획사입니다. K팝의 성공신화를 쓴 보이그룹 ‘BTS(방탄소년단)’가 소속돼 있습니다. 기업 규모는 어마어마 합니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9조2676억원(4월 19일 기준). 이는 통신사 KT(8조8979억원)를 앞선 규모로 아모레퍼시픽(9조9145억원)에 맞먹습니다. 창업자 방시혁 이사회 의장을 주축으로 넥슨코리아를 이끈 박지원 대표가 CEO로 있습니다.
이에 맞선 인물이 민희진 어도어 대표입니다. 걸그룹 ‘뉴진스’의 엄마로 알려진 프로듀서이자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 엑소 등 에스엠의 대표 소속 가수들을 브랜딩한 크리에이터입니다.
제복입은 소녀시대, 교복 입은 엑소가 떠올랐다면 정확합니다. 유명세를 떨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습니다. 민 대표는 2017년 30대 후반의 나이로 에스엠 등기이사까지 올랐으나 2019년 하이브(그때의 사명은 ‘빅히트엔터테인먼트’)로 둥지를 옮깁니다.
하이브와 어도어의 관계는 모-자간입니다. 하이브는 지난 2021년 3월 빅히트에서 사명을 변경하면서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 쏘스뮤직 등을 인수해 ‘멀티 레이블’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레이블은 우리가 잘 아는 라벨인데, 음악계에서는 별도의 독립된 음악 회사로 쓰입니다.
현재 하이브의 레이블은 총 11개. 빅히트 뮤직(이하 대표 소속가수 BTS), 빌리프랩(아일릿), 쏘스뮤직(르세라핌),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세븐틴), 코즈엔터테인먼트(지코), 어도어(뉴진스) 등입니다.
하이브 측은 시장의 탄탄한 레이블을 삼키거나(M&A) 신설하는 방식으로 덩치를 키웠습니다. 그렇게 모인 지식재산권(IP·엔터사에서는 소속 아티스트를 뜻합니다)으로 시총 9조원대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증권가가 추산한 기업가치는 12조원대에 달합니다.
이중 어도어가 하이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BTS의 군입대로 핵심 자원이 빠진 상황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알짜 레이블입니다. 2021년 11월 신설, 민희진 대표가 이끌어왔습니다.
이듬해 그의 손끝에서 신예 걸그룹 뉴진스가 탄생했습니다. 소속가수는 뉴진스 하나이지만 ‘대박’을 치며 2023년 어도어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103억원, 335억원으로 성장합니다. 2년만의 초고속 성장이죠. 하이브 연결 실적에서 각각 5%, 11% 비중을 차지합니다. Q. 도대체 무슨 사건이야? 사건의 발단은 지난 4월 22일 월요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이브는 민 대표가 경영권 찬탈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정황을 확보했다며 자체 감사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계열사를 감사하고 있다고 공개해버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때아닌 경영권 찬탈 의혹은 민 대표와 어도어 이사진의 사적 대화록이 하나둘 공개되면서 무게를 더했습니다.
하이브 측이 민 대표를 비롯한 어도어 경영진에게 보낸 감사 질의서에 따르면 어도어 경영권 탈취 모의 내용, 사업상 비밀 유출, 인사청탁 등 이들이 저지른 비위에 사실관계를 묻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이브 측은 어도어 경영진이 경영권 탈취 목적으로 취득한 핵심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의혹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부적절한 외부 컨설팅을 받은 정황도 포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민 대표는 이날 저녁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도어 경영권을 탈취하려 한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하이브와의 갈등은 ‘자회사 간 표절 논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이브 산하 다른 레이블의 ‘뉴진스 표절’에 대해 어도어 측이 문제를 제기하자, 하이브가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건은 여느 기업의 크고 작은 ‘내부 갈등’으로 비쳐졌습니다. ‘대감집 싸움’에 관련 아이돌 그룹의 팬과 회사 주주, 경영권 분쟁을 조명하는 증권가와 언론사, 호사가들의 얘깃거리로 소비되었죠. 여론은 경영권 찬탈 정황이 있는 민 대표에게 불리한 듯 보였습니다. 뉴진스의 팬들조차 하이브 사옥에 ‘시위 트럭’을 보내 ‘뉴진스의 엄마’ 민 대표의 해임을 요구할 정도였죠.
사건 발발 나흘째인 4월 25일, 상황은 반전됐습니다. 하이브는 어도어 경영진 간 대화록에 ‘어도어를 빈 껍데기로 만들어서 데리고 나간다’라고 적힌 것을 근거로 뉴진스 계약 해지 등을 논의한 게 확인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민 대표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서울용산경찰서에 고발했습니다. 민심은 완전히 하이브 편인 듯했습니다.
이때, 어도어가 언론사에 메일 한 통을 보냅니다. “오늘(4월 25일) 오후 3시 어도어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직접 이번 상황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전달드릴 예정입니다.”
민 대표의 기자회견이 시작하기 15분 전 하이브 측에서 느닷없이 공식 보도자료를 뿌렸습니다. 민 대표가 무속인과 나눈 장문의 대화록을 포렌식을 통해 확보했다고 주장하면서 인사·채용 등 주요한 회사 경영사항을 무속인에게 코치받아 이행해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국내 최대 엔터사의 내홍, 핫한 걸그룹 뉴진스가 걸린 만큼 관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민 대표의 기자회견은 유튜브 생중계로 진행됐고 방송사마다 수만여 명의 시청자가 참여했습니다. 장장 2시간 20분에 걸쳐 민 대표의 관련 의혹에 대한 해명이 진행됐습니다. 민 대표는 “경영권을 탈취하려는 시도도 계획도 한 적이 없다”며 “실적을 잘 내고 있는 계열사 사장인 나를 찍어내려는 하이브가 배임”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양측 갈등의 골은 그가 어도어를 만들기도 전인 2021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민 대표가 기획한 아이돌로 ‘최초의 걸그룹’을 내주겠다는 처음의 약속과 달리 다른 레이블에서 최초의 걸그룹이 나온 게 화근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해당 레이블은 방시혁 의장이 프로듀싱한 곳으로, 민 대표는 방 의장이 몇 개의 레이블 프로듀싱에 관여하며 다른 레이블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말했습니다.
이후에도 양측 간 냉전이 지속되다가 지난 3월 민 대표가 타 레이블 산하 신인 걸그룹의 ‘뉴진스 베끼기’ 의혹을 임원진에게 공식적으로 제기하자 하이브가 경영권 탈취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민 대표는 “허울 좋게 겉으로만 멀티 레이블이라고 하면서 뉴진스의 개성을 따라하고 우리만의 제작 시스템을 ‘기성화’ 하는 일이 오히려 주주 이익을 해하는 일”이라고 울분을 터뜨렸습니다. 이어 “실현 가능성 없는 카톡, 개인의 낙서가 감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유출됐다”며 하이브에 맞서 대응할 것을 공식화했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날 선 언어, 형식을 깬 파괴적 기자회견은 상상 이상의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하이브 측은 “사실이 아닌 내용이 너무나 많다. 반박할 수 있으나 답변할 가치가 없다”는 짧은 입장문을 냈습니다.
하지만 2시간 20분의 회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회견의 주요 내용은 사건의 일지와 그의 해명이었지만 사람들은 정제되지 않은 발언에서 자신이 경험한 사회문제나 은폐된 비리 요소들을 발견하고 공감했습니다.
여론은 어느새 민 대표의 손을 들어준 듯했습니다. 유튜브 등 SNS상에는 패러디가 넘쳐나고 민 대표의 발언을 갈무리한 영상들이 수백만 회의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그가 입은 옷, 모자가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뒤집힌 여론에 하이브도 나섰습니다. 다음 날 민 대표의 주장 12개 사안에 대해 반박하며 경영권 탈취 의혹, 뉴진스 카피 의혹 등에 답했습니다. 그리고 민 대표 측에 4월 30일자로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습니다.
민 대표 측은 ‘준비시간 부족’의 이유로 이를 거절하면서 양측의 공방은 법정 분쟁으로 번지게 됐습니다. 하이브는 현재 임시주총 소집 허가 신청을 법원에 접수한 상태입니다. 민 대표의 해임안이 주요 안건으로 확인됩니다. 어도어는 5월 10일까지 이사회를 열고 5월 말까지 주총을 열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남은 한 달간 양측의 공방은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 다른 폭로전이 없다면 이제 공은 거대 법무법인인 김앤장(하이브)과 세종(어도어)의 대리전 양상으로 넘어갈 전망입니다. Q. 진짜 싸운 이유가 뭐야?사건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민 대표의 말대로 ‘흑색선전(마타도어)’과 하이브의 말대로 ‘특유의 굴절된 해석’이 난무합니다.
해당 사건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형식에 집중하면 본질이 가려질 수 있다는 점을 짚습니다.
‘내부고발’, ‘노예계약’, ‘배신’, ‘꼼수’ 등 자극적 단어들이 난무하지만 해당 사건의 본질은 ‘자존심’ 그리고 ‘돈’과 관련된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양측의 입장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먼저 민 대표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상상(경영권 찬탈 의혹이 제기된 대화)을 했냐면 제가 하이브랑 이상한 계약을 었어요. 주주 간 계약이라고… 이 주주 간 계약이 저한테 어떤 올무가 있냐면요(중략) 팔지 못하게 꽁꽁 묶어둔 5%… 그게 저한테 노예계약처럼 걸려 있어요. 그게 행사가 안 돼서 나는 하이브에 영원히 묶여 있어야 되는 거예요.”
하이브는 반박합니다. “하이브는 연봉 외에도 막대한 주식보상을 제공했습니다. 그런데도 민 대표는 회사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액수를 다시 제시하며 대화를 파국으로 이끌었습니다. 민 대표는 ‘돈에는 관심없다’고 했지만 논의를 촉발한 핵심 쟁점은 보상의 규모였습니다.”
엔터테인먼트와 법조계에 따르면 하이브와 민 대표는 지난 4월까지 대리인을 통해 주주 간 재계약 협상을 진행해온 것으로 파악됩니다. 민 대표가 주장한 ‘노예계약’이 바로 주주 간 계약(주주권을 소유한 주주 사이에 체결한 매매계약)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도어의 지분 가치 산정을 두고 양측의 대립이 팽팽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이브는 작년 말부터 민 대표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주주 간 계약을 수정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는 입장이며, 민 대표 측은 ‘엔터사에서 전례 없는’ 뉴진스 성공에 따른 정당한 보상 요구라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시 양측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하이브는 어도어 설립 당시인 2021년 민 대표에게 총발행주식의 10%에 해당하는 스톡옵션과 13배 배수가 적용된 풋백옵션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총발행주식의 5%만큼의 현금 특별상여도 약속했습니다. 지분율로는 총 15%입니다.
그러다 어도어 신인 걸그룹 뉴진스가 크게 성공하자 민 대표 측은 이를 근거로 성과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양측은 주주 간 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2023년 3월 뉴진스의 신곡이 빌보드 핫100에 오르는 등 초대박을 터뜨린 직후였습니다.
어도어의 지분 80%를 가진 대주주 하이브는 민 대표(지분율 18%)를 비롯한 경영진(지분율 2%)들과 작년 3월쯤 어도어 주주 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해당 계약서엔 민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수차례 불만을 터뜨린 ‘경업금지 조항(퇴사 후 특정 기간 동안 경쟁업종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을 비롯해 민 대표가 보유한 어도어 지분율 18% 중 13.5%는 향후 하이브에 팔 수 있는 권리(풋옵션) 등이 담겨 있습니다. 풋옵션은 올해 말부터 행사가 가능합니다. 민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가만 있어도 1000억 번다”고 표현한 게 이 대목입니다.
민 대표가 측근들과 나눈 카카오톡 대화에도 2025년 1월 2일에 풋옵션을 행사해 투자금을 회수(엑시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민 대표 측은 농담 또는 사담이라고 주장합니다.)
나머지 4.5%가 문제입니다. 계약에 따르면 하이브의 동의 없이는 하이브 혹은 외부에 매각할 수 없도록 규정했습니다. 민 대표 측은 풋옵션이 설정되지 않은 지분 4.5%가 하이브의 동의 없이는 처분할 수 없는 만큼 최악의 경우에는 4.5%를 빌미로 경업을 무기한 막을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듯 보였습니다. 실제 민 대표는 ‘올무’, ‘노예계약’, ‘평생 묶여’로 이를 표현했습니다.
하이브 측은 이미 지난해 12월 민 대표 측에 ‘해석이 모호하다면 모호한 조항을 해소하여 문제가 되지 않도록 수정한다’는 답변을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하이브는 “민 대표는 올해 11월부터 주식을 매각할 수 있으며 주식을 매각한다면 당사와 근속계약이 만료되는 2026년 11월부터는 경업금지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민 대표 측의 핵심 쟁점은 ‘보상의 규모’란 점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양측의 풀리지 않는 실마리는 ‘보상의 규모’였을까요. 하이브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액수를 다시 제시하며 대화를 파국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합니다. 민 대표 측은 “연봉, 인센티브, 주식보상을 언급하며 논점을 흐리는 것은 하이브에서 민 대표가 금전적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짓 프레임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반박합니다.
‘신뢰의 문제’란 지적도 합니다. 경업금지의 대상사업과 기간이 합리적이어야 하는데, 현재 주주간계약은 그렇지 않고, 하이브 측이 흑색 선전을 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면에는 방시혁과 민희진이라는 기획자 간 자존심 대결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민 대표는 ‘뉴진스에 집중해야 할 상황에서 방 의장이 직접 아일릿이라는 걸그룹을 만들고, 뉴진스의 콘셉트 등을 베껴 내놓고 밀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 듯합니다. 민 대표가 주장한 내홍의 첫 시작, ‘최초의 걸그룹’ 문제도 유사합니다.
방 의장 측은 재데뷔 멤버들을 주축으로 최초의 걸그룹을 꾸립니다. 민 대표 측 주장에 따르면, 민 대표와 방 의장 간 음악 스타일 등이 맞지 않았으며 민 대표의 걸그룹 기획서를 방 의장이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방 의장이 하이브의 걸그룹 제작을 민 대표에게 맡겨 놓고도 굳이 뉴진스와 경쟁해야 할 걸그룹을 직접 프로듀싱했어야 하냐는 지적이 나올 만한 대목입니다.
양측의 신뢰는 무너졌고 이는 결국 돈 문제로 이어지고 양측은 진흙탕 싸움에 나섰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Q. K팝의 성장통인가?여기까지 읽은 비즈니스 독자라면 흔한 ‘주주 간 싸움’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하이브의 집안싸움은 몇 가지의 관전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는 ‘K팝 산업’입니다. 1세대 H.O.T.에서 4세대 뉴진스까지 확장하며 아이돌 산업은 천문학적 숫자가 오고 가는 ‘쩐’의 사업으로 변모했습니다. 문제는 엔터 기업의 수익력과 미래 가치가 인적자원에 기초하기 때문에 산업보다는 ‘사람’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에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이번 사태는 K팝 산업이 성장하는 변곡점에서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소규모의 가내수공업 같던 K팝 산업이 대규모의 제조업처럼 시스템화되면서 ‘업의 본질’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어난 ‘성장통’이란 지적입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돈이 되는(lucrative) K팝 산업을 강타한 최신 분쟁”이라고 설명했죠.
민 대표는 전자에 가까운 듯합니다. 양측 간 내홍을 ‘촌극’으로 표현한 게 대표적입니다. 그는 기자회견 내내 박지원 대표를 ‘친한 지원이’로 표현했습니다. “박지원이 자기만 믿고 계약하래.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사인했다니까. 그랬다가 지금 이 꼴이 된 거예요.” 그는 ‘하이브의 배신’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민 대표의 발언은 사실 체격은 어른이 됐지만 머리는 청소년 수준인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뉴진스와의 유대감을 강조한 것도 어쩌면 산업보다 사람에 초점을 맞춘 민 대표의 인식을 보여줍니다.
반면 방시혁 의장에게 뉴진스는 하나의 인적 IP이자 상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임업계의 용어로 말하자면 게임의 세계관, 캐릭터, 이미지, 배경음악, 영상 등 게임을 구성하는 일체의 저작물, 상품입니다.
그는 게임산업의 독특한 성공구조인 멀티레이블 체제를 엔터업계에 적용했습니다. 멀티레이블로 IP를 확대하고 규모의 경제를 이룬 게 지금의 하이브입니다. 방 의장의 꿈은 엔터테인먼트기업에서 더 나아간 종합 엔터테인먼트 라이프스타일 플랫폼 기업이라고 말합니다. Q. 왜 이렇게 화제를 모았어? 둘째로 주목해야 할 건 민 대표의 기자회견 그후입니다.
공식적으로는 그에게 제기된 경영권 찬탈 의혹을 반박하는 자리였으나 또 다른 측면에서는 한국 사회에 암암리에 존재하는 프레임을 전면에 드러내는 시간이었습니다.
회견의 주요 내용은 사건의 일지와 그의 해명이었지만 사람들은 정제되지 않은 2시간 20분짜리 발언에서 자신이 경험한 사회문제나 은폐된 비리 요소를 발견하고 함께 공분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민 대표는 웃으며 퇴장했지만 대중은 ‘아고라’에 남겨졌습니다. 토론의 장이 열린 건 그가 몸담은 엔터 산업만이 아니었습니다.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서 전방위적 논쟁이 시작됐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자본가와 창업가 등 계층 간 논쟁부터 세대 간, 남녀 간의 해묵은 논쟁까지 그의 사이다 발언은 ‘파괴적’인 후폭풍을 일으켰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식자층 논객들까지 남녀노소가 ‘민희진판 아고라’에 뛰어들었습니다.
프레임은 첫 등장부터 깨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생활의 기본공식으로 자리한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맞는 의복 착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캡모자에 헝클어진 머리,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벙벙한 바지를 입고 등장한 민 대표는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프레임을 벗겨내는 게 저의 첫 번째 숙제”라고 말했습니다.
회견 초반만 해도 TPO에 냉담한 시선이 쏟아졌지만 종료 후에는 “TPO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라며 일부 반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간 공식석상에서의 대부분을 ‘캡모자’를 쓰고 등장한 양현석 YG 대표의 모습 등이 비교 대상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민 대표가 의도했든 아니든 성차별 문제도 무대에 올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여성을 언급한 건 딱 두 번입니다. 투자자들의 이상한 작업(성적 제안으로 여겨집니다)에 “여자가 사회생활하는 게 이렇게 더럽구나” 그리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입니다.
하지만 기자회견 후 그가 주장한 문제들은 여성 직장인들의 무언가를 툭 건드렸습니다. “아니 이 아저씨들이, 미안하지만 ‘개저씨’들이…나 하나 죽이겠다고 어?”, “내가 실적이 떨어지기를 해. 너네처럼 기사를 두고 차를 끄냐, 술을 마시냐, 골프를 치냐.”
민 대표는 ‘일중독자’로 유명합니다. 그 역시 “법인카드를 뒤져도 야근식대밖에 안 나온다. 배민(배달의민족)”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이브의 유일한 여성 임원입니다.
한국 기업에서는 여성 관리자의 수가 유난히 적습니다. 한국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평균 3.0%로 파악됩니다. 한경비즈니스는 매년 100대 CEO와 파워금융인 30을 선정하는데 여성 CEO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원인으로는 임신·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 관리자를 기피하는 성차별적 조직문화(유리천장)가 꼽힙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은밀하고 잘 드러나지 않는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바로 ‘정보 격차’입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일한 아키야마 유카리 컨설턴트가 쓴 ‘회사가 붙잡는 여자들의 11가지 비밀’에 따르면 중간 관리자급이 되어갈 쯤부터 남성은 학연, 지연, 동호회 등 회사 내 여러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고 술과 담배 혹은 골프 등을 매개로 친목하면서 사내외 정보를 공유합니다. 이 과정에서 직장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사내 정치’ 등 직장 생활의 노하우를 전수받습니다. 반면 여성은 그런 통로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민 대표의 기자회견 댓글에는 자신을 여성 직장인으로 소개하며 그를 응원하는 글을 적잖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힘내세요. 일하는 여성으로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아이돌 문화의 최대 소비자는 여성인데 CEO는 남성들의 리그로 이루어져 있네요”, “직급이 낮을 땐 몰랐는데 오르고 보니 보이더라고요. 그게 유리천장이었습니다”….
물론 여성 직장인만 민 대표에 공감한 게 아닙니다. ‘직장인’이란 공통분모는 남성과 여성을 모두 하나로 묶기에 충분했습니다.
‘정신병’, ‘우울증’, ‘내부고발’, ‘보이콧’, ‘마타도어’, ‘팽’…. ‘을’의 위치에 놓인 직장인이라면 한번쯤 고민해봤을 문제들이 민 대표의 발언에서 여과없이 튀어 나왔습니다.
특히 우울증은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여겨집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를 보면 2022년 국내 우울증 환자는 1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조사 이래 처음입니다. 최근 5년간 연평균 7.4%씩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민 대표가 이를 시원한 한 방으로 날려버립니다. “(하이브) 들어올거면 그냥 나한테 ‘맞다이(일대일)’로 들어와!”
대기업에 던지는 ‘직장인’ 민 대표의 한 마디는 할말을 하지 못하고 묵혀두었다가 화병이 난 직장인들의 마음을 달래주었습니다.
누리꾼들은 민 대표의 ‘맞다이’ 발언에 환호했습니다. 유튜브는 ‘맞다이’ 패러디가 한창이고, 이미 유행어처럼 번지는 모양새입니다. 그에 대한 응원과 공감을 보여주는 게 숫자입니다. 기자회견 조회수는 각사별로 수백만 건을 넘겼습니다. 그가 입은 모자와 티셔츠는 절찬리에 판매 중이고 일부는 품절됐습니다. ‘민희진룩’, ‘민희진모자’로 소개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심지어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카톡에서 그가 쓴 이모티콘까지 인기 급상승 1위에 올랐습니다.
기자회견 이후 그의 모자를 따라 구매한 A 씨는 “그를 응원하는 것도 있지만 민 대표처럼 살고 싶다는 상징성을 담아 모자를 구매했다”고 말했습니다.
일명 ‘개저씨’를 쫓는 부적으로 쓴다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동일한 모자를 뜨개질로 만들어 키링으로 판매하는 B 씨는 상품 소개서에 ‘X저씨와 XXXX를 미연에 방지하는 부적 키링’이라고 달았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의 목소리를 보낸 건 아닙니다. 일각에선 민 대표가 억대연봉의 CEO이자 1000억원대 보상을 받는 인물이란 점을 상기시킵니다. 그를 같은 직장인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는 논지입니다.
직장인이 아닌 창업자로 민 대표를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국내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권도균 프라이머 대표는 자신의 SNS에 “직장인으로 본다면 ‘배은망덕하고 통제하기 힘들고 욕심 많은 사람’으로 비난하겠지만 창업자로 본다면 ‘야심 크고, 어쩌면 방 의장보다 잠재성이 있는 재능 있는 사람’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라며 “창업자는 언젠가는 독립해서 반드시 자기 사업을 하게 되어 있다”고 썼습니다. 창업자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주장도 펼칩니다.
민 대표를 무엇으로 정의하든 그의 기자회견이 한국 사회에 상당한 파괴력을 미친 것은 분명합니다. 일각에선 “그의 기자회견 전후로 세상이 바뀔 것”이란 평가까지 나올 정도니까요. 기자회견 역사상 전례없는 퍼포먼스였던 것은 어느 누구도 반론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남은 건 양측의 치열한 공방전 그리고 5월 24일 뉴진스의 컴백입니다. 양측 모두 “뉴진스(아티스트)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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