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작품의 크레딧에선 익숙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올드보이’, ‘헤어질 결심’ 등을 만든 박찬욱 감독이다. 박 감독은 캐나다 출신 돈 맥켈러 감독과 공동 쇼러너를 맡아 제작·각본·연출 등 전 과정에 참여했다. 외신들도 호평을 보내고 있다. 타임지는 “대담하고 야심차다”라고 분석했으며 TV가이드는 “주제의 무게를 잘 담아낸 블랙 코미디”라고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OTT 쿠팡플레이에 독점 공개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인 감독이 해외 현지에서 만들었으며 국내외에서 널리 사랑받는 글로벌 작품. K콘텐츠의 위상이 높아진 지금, 왠지 익숙하면서도 또 한번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 작품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것에서 나아가 이젠 한국인 창작자, 한국 콘텐츠 기업과 제작사 등이 현지에서 콘텐츠를 잇달아 제작하고 있다. K콘텐츠의 성공으로 뛰어난 제작과 연출 역량을 인정받으면서 이들이 직접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 서서 진두지휘하는 핵심 주체가 된 것이다. 한류의 새로운 확장, 현지 제작 콘텐츠
현지 제작 콘텐츠엔 한국말 대신 영어, 한국 배우 대신 할리우드 배우 등이 나온다. 따라서 한국적 특성이 특별히 부각되진 않는다. 대신 K콘텐츠를 성공시킨 노하우가 집대성된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국내 작품에 비해 훨씬 커진 스케일에 걸맞게 보편적이고도 장대한 스토리를 펼쳐 보인다.
‘동조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이 2016년 퓰리처상을 받았던 동명 소설이다. 베트남 혼혈 청년인 대위(호아 수안데)가 1970년대에 미국으로 망명한 뒤 두 개의 문명과 이념 사이에서 혼란과 고뇌를 거듭하는 과정이 그려지며, 대서사시가 펼쳐진다.
이 작품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제작사와 배우들이 참여했다. ‘문라이트’부터 ‘미나리’, ‘성난 사람들’ 등 다양한 명작을 탄생시키며 열풍을 일으킨 할리우드 제작사 A24가 제작을 맡았다. 게다가 이 작품엔 ‘아이언맨’ 등으로 사랑을 받은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출연해 큰 화제가 됐다. 그는 이 작품에서 1인 4역을 맡아 각기 다른 미국 백인 남성을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동조자’뿐만 아니다. 박 감독은 앞서 2018년 BBC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로 시리즈 연출을 맡기도 했다. 또한 2003년 개봉한 영화 ‘올드보이’를 할리우드 제작사인 라이언스게이트 텔레비전과 손잡고 미국 드라마로 재탄생시킬 예정이다.
‘기생충’으로 오스카를 휩쓸었던 봉준호 감독 역시 내년 1월 ‘미키 17’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국 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가 투자·배급한 영화로 1억5000만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이 작품의 주연은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 맡았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 감독들의 행보라고 하더라도 놀라운 스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 감독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유명 제작사와 배우 등이 적극 동참하여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한 대작들을 연이어 선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K콘텐츠의 힘이 개별 콘텐츠 안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파급효과를 일으켜 창작자를 세계 시장의 중심에 데려다 놓는 데 일조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창작자들은 이전보다 더 담대하고 색다른 도전을 할 수 있게 됐다.
현지 제작은 특정 창작자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애플TV플러스에서 공개된 드라마 ‘운명을 읽는 기계’는 한국 제작사가 만든 최초의 미국 드라마이다. CJ ENM의 자회사인 스튜디오드래곤과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가 공동 제작했다. 이 작품은 한 작은 마을에 운명을 알려주는 기계가 등장하며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현상을 담았다. 기발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아 시즌1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전체 에피소드 공개가 완료되기 전부터 시즌2 제작이 확정됐다. 지난 4월 공개된 시즌2 역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김언수 작가의 장편 소설 ‘설계자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를 미국 유니버설스튜디오와 함께 제작한다.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얻은 K콘텐츠 ‘사랑의 불시착’, ‘빈센조’도 미드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현지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오랜 시간에 걸쳐 현지 시장 관계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신뢰도를 쌓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창작자, 기업, 제작사는 좁은 내수 시장 공략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한국 콘텐츠가 미국, 유럽 등에선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20여 년 전부터 글로벌 시장과 영화제 등의 문을 꾸준히 두드려 왔다. 분명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지만 언제 성과가 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네트워크를 쌓아가며 협업을 진행하고 다채로운 K콘텐츠로 실력을 입증해 왔다. 덕분에 오늘날 현지 제작 콘텐츠까지 만들 수 있게 됐고 한류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게 됐다. 무한히 확장했던 시각의 범위가 곧 시장의 영역이 된 것이다. 꿈의 크기만큼 시장도 커졌다 현지 제작 성과는 영상 시장뿐만 아니라 공연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디컴퍼니의 신춘수 대표가 지난 4월 미국 브로드웨이 시어터에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를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10회 차의 프리뷰 공연이 전석 매진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첫주 공연부터 주당 1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오디컴퍼니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드라큘라’, ‘스위니토드’ 등 인기 공연을 국내에서 선보였던 제작사다.
하지만 신 대표가 처음부터 해외 시장 개척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2009년 ‘드림 걸즈’부터 2014년 ‘홀러 이프 야 히어 미’, 2015년 ‘닥터 지바고’까지 잇달아 현지 제작사와 작품을 공동 제작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지만 흥행에 실패했다. 하지만 끈질긴 도전으로 이뤄낸 네 번째 브로드웨이 도전에서 마침내 빛을 발하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신 대표가 기획과 제작까지 모두 단독으로 이끈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국내 제작사가 브로드웨이에서 단독으로 공연의 기획과 제작을 이끈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CJ ENM 역시 오랜 시간 꾸준히 브로드웨이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뮤지컬 ‘킹키부츠’, ‘비틀쥬스’, ‘물랑루즈!’ 등을 브로드웨이 관계자들과 공동 제작했으며 국내에서도 해당 공연들을 선보이고 있다.
영화, 드라마뿐만 아니라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걸쳐 해외에서 현지 제작을 하고 성과를 내고 있는 상황. 국내 시장은 제작비 상승, 캐스팅 비용 논란 등으로 분위기가 좋지 못한 가운데 더 큰 시장인 해외에선 성과가 나타나면서 창작자와 기업 등이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꿈의 크기가 곧 인생의 크기”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도전은 어렵고 힘들기만 하다. 하지만 편안한 현실에만 안주하면 인생의 크기는 더 이상 커질 수 없다. 창작자와 기업 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품었던 꿈의 크기만큼 시장은 커지고 있다. 어쩌면 그 꿈의 크기는 현재 우리가 보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클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어떤 상황에서도 K콘텐츠가 가꿔나갈 영토, 그리고 미래는 더욱 크고 빛나지 않을까 기대된다.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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