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사업이 겹치지 않았던 한화와 HD현대는 ‘방산업계 신흥 라이벌’로 떠올랐다. 한화가 지난해 ‘조선 빅3’ 중 한 곳인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을 인수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한화 김동관 vs HD현대 정기선
8조 KDDX 수주전 ‘격돌’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총 사업비 7조8000억원 규모의 한국형 차기 구축함(KDDX) 사업 수주를 놓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양사는 최근 KDDX 기밀 유출 사건과 관련해 고소·고발전을 벌이며 또다시 충돌했다. KDDX 기밀 유출 사건은 한화그룹 3세 김동관 부회장과 HD현대 2세 정기선 부회장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HD현대중공업 직원 9명이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이 수주한 KDDX 개념설계도 등 군사 기밀 자료를 몰래 촬영해 회사 내부 서버를 통해 공유해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2023년 11월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방위사업청은 계약심의위원회를 열어 HD현대중공업의 제재 수위를 ‘행정지도’로 의결, 입찰 참가 자격 제한을 하지 않기로 했다. HD현대중공업은 최대 5년간 방사청의 사업에 입찰할 수 없는 ‘부정당업체’ 지정 위기에서 벗어나게 됐다. 하지만 보안 규정에 따라 방사청 사업 입찰 때 부과하는 보안 감점(-1.8점)은 2025년 11월까지 그대로 유지된다. HD현대중공업이 사업 입찰 참가 제한 제재를 피하자 한화오션은 다시 이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지난 3월 4일 군사기밀 유출 관련 HD현대중공업의 임원이 개입된 정황을 수사해 처벌해달라는 내용의 고발장을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제출했다.
이에 맞서 HD현대중공업 측은 5월 7일 한화오션을 허위 사실 적시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며 양사의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조선업 양강’이 다투는 이유는 미래 먹거리이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특수선과 MRO(유지·보수·정비) 사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다. HD현대중공업은 올해 특수선 사업부 수주 목표를 전년(1억3800만 달러)보다 7배 이상 높인 9억8800만 달러로 정하고 수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방사청이 발주한 울산급 배치3(Batch-Ⅲ) 5∼6번함과 장보고III 배치2(Batch-II) 3번함 건조사업 등 2건을 한화오션에 내주며 특수선 사업부 매출이 전년 대비 40% 줄었다.
2대째 절친→숙명의 라이벌로
울산급 배치3 5~6번함 입찰 때 한화오션은 91.8855점을 받았는데 91.7433점을 받은 HD현대중공업과 불과 0.1422점 차이였다. 감점 페널티(-1.8점)가 적용되는 2025년 11월까지는 수주전에서 불리한 만큼 올해 하반기 발주 예정인 KDDX 사업 수주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국내 특수선 수주 트랙 레코드를 쌓아야 글로벌 특수선 시장에서 수주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영국 군사정보 전문업체 제인스는 향후 10년간 전 세계 특수선 시장 규모가 약 1조 달러(132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 조선사들은 2430억 달러(337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글로벌 잠수함·수상함 시장을 노리고 있다.
한화오션도 특수선 사업에 9000억원을 투자해 현재 8834억원 수준의 매출을 2030년까지 2조9000억원, 2040년에는 7조3000억원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다. 방산 부품을 생산하는 한화시스템 등과 한화오션을 수직계열화해 시너지를 내겠다는 구상이다. 2019년 HD현대는 대우조선해양의 인수를 추진했으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 독점을 우려한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반대로 기업결합 계획이 불발됐다. 이후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품으면서 해양 패권을 둘러싼 김 부회장과 정 부회장의 경쟁이 본격화했다.
갈등의 이면에는 차기 총수 자리를 코앞에 둔 후계자들의 경쟁이 있다. 차기 총수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김동관 부회장과 정기선 부회장에게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의 실적은 경영 능력의 시험대다. 김 부회장은 지난해 한화오션 인수 후 체질 개선과 글로벌 수주를 주도하며 존재감을 각인했다.
정 부회장은 인공지능(AI), 수소, 로봇, 바이오 등 신사업을 이끌며 HD현대를 기술중심 기업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정 부회장은 올해 초 ‘CES 2024’에서 기조연설자로 무대에 오르는 등 대외 행보를 확대하고 있다.
1983년생인 김 부회장과 1982년생인 정 부회장은 한 살 차이 동년배로 서로의 결혼식까지 챙길 정도로 소문난 ‘절친’이다. 부친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도 한 살 차이의 장충초 동창이자 친구 사이로 대를 이어 친분을 쌓아왔다. SK 최윤정 vs 롯데 신유열
바이오로 ‘승계 스토리’ 밑그림
SK와 롯데도 새로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그간 SK와 롯데는 렌터카 사업을 제외하고 겹치는 사업이 없었다. 롯데는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장 겸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전무)이 경영 보폭을 확대하면서 미래 먹거리인 바이오 사업에서 SK와 맞닥뜨렸다.
SK의 바이오사업은 SK바이오팜을 중심으로 한 신약 개발과 SK팜테코를 기반으로 한 위탁개발생산(CDMO) 등 그룹의 바이오 밸류체인이 강점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의약품을 직접 개발하지 않고 위탁개발생산(CDMO)에만 집중하는 ‘퓨어 CDMO’를 지향하고 있다.
당장 직접적인 경쟁 상대는 아니지만 SK와 롯데 3세들이 바이오 신사업을 확장하면서 경쟁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바이오 사업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향후 승계 구도에서 입지도 단단히 구축할 수 있다.
SK그룹에서는 최태원 회장의 장녀 최윤정 SK바이오팜 사업개발본부장(부사장)이 지난해 말 임원으로 승진하며 경영 전면에 나섰다. 1989년생인 최 부사장은 지난해 35세로 그룹 내 최연소 임원 자리에 올랐다. 사업개발과 전략투자를 총괄하고 있다.
SK그룹이 반도체, 배터리와 함께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바이오 분야에서 차세대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최 부사장은 올해 1월 세계 최대 규모의 헬스케어 투자 행사인 ‘JP모간 헬스케어 콘퍼런스’에 이동훈 SK바이오팜 사장과 함께 참석해 글로벌 기업들과 비즈니스 미팅에 나서는 등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롯데그룹 후계자로 꼽히는 신유열 전무는 올해 승진과 함께 롯데지주 미래전략실장과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을 겸직하며 그룹 미래 먹거리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1월 ‘CES 2024’에서 메타버스 플랫폼 ‘칼리버스’, 전기차 충전기 ‘이브이시스(EVSIS)’ 등 전용 서비스와 솔루션을 둘러봤고 3월에는 롯데바이오로직스와 미국 시러큐스대의 산학협력 협약식에 직접 참석하며 경영 보폭을 확대하고 있다. 바이오 분야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다.
2022년 설립된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롯데그룹이 공을 들이고 있는 신성장 영역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신동빈 회장은 올해 초 바이오·메타버스·수소에너지·2차전지 등 4대 신성장 영역으로 사업 교체를 추진하고 부진한 기존 사업은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롯데바이오로직스가 바이오 분야 후발 주자인 데다 대표적인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산업인 만큼 신 전무는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분위기다. 신 전무가 지난 3월 롯데바이오로직스 사내이사로 합류한 뒤 첫 대외 행보로 시러큐스대와의 산학협력 협약식에 참석한 것은 바이오 사업 초석을 다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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