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사이에서는 “늦은 시간 건물 앞을 지나가면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또는 “메가박스 가려고 엘레베이터를 타면 중간 층에 멈출까봐 무섭다”는 공통된 감상이 있었다. 건물의 활용처는 결국 물음표로 남긴 채 작년 학교를 졸업했는데 최근 다시 찾은 이곳은 마침내 주인을 만나 새 단장에 한창이었다. 점심식사가 한창인 지난 5월 14일 낮 12시쯤 이곳을 찾았다. 삼라 마이더스그룹(이하 SM그룹)의 로고가 민자역사 건물 꼭대기 오른쪽에 크게 붙었고 외벽 도색 작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남색 점퍼를 입은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민자역사 안으로 들어가자 지하매장으로 향하는 계단에 항상 쳐 있던 출입금지 테이프가 걷어졌다.
1층 엘레베이터 앞에 ‘새 단장을 위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현수막도 사라지고 깨끗하게 도배된 벽이 눈에 띄었다. 꼭대기 영화관 손님만 타던 엘리베이터는 직원들로 가득 찼고 층마다 멈춰서며 완전한 사무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대한해운 관계자에 따르면 “올해 4월 사무실 이전으로 수백 명의 직원들이 신촌민자역사 건물에 들어오게 됐다”며 “근처 밥집과 카페 등을 매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상업시설 ‘박스퀘어’는 횡단보도를 하나 두고 민자역사와 마주보고 있는데 대로변 쪽 1층의 커피숍과 생과일주스 가게 앞에도 줄을 선 직원들이 보였다. 근처에서 식사 후 혹은 신촌 거리로 넘어가는 길에 들르기 좋은 저렴한 테이크아웃 전문점인데 줄을 서본 경험은 처음이다. 사장님은 민자역사 건물을 가리키며 “요 앞에 회사 직원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더라”며 “요즘 들어 직장인 손님들이 점심에 많이 온다”고 했다.
건물 근처를 둘러보니 커피를 들고 산책하거나 점심 식사할 곳을 찾는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길 건너 한식집과 분식집에도 직원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화여대 정문 기준으로는 10~15분가량 떨어져 있고 길을 건너야 해서 학생들이 찾지 않는 곳이라 새로운 수요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김치찌개를 파는 식당 주인은 “평일 점심에는 5~10분가량 대기가 생긴다”며 “5~6명씩 직장인들이 여럿 팀 온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52번가 길 골목으로 들어가봤다. 정문과 가까워 학생들이 자주 찾는 식당과 카페가 많은 데다 민자역사에서는 길을 건널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일식당과 양식집을 비롯한 몇몇 식당 문 앞에 대기 리스트가 붙어 있었고 손님들로 거리가 이전보다 북적였다.
이대 상권 침체와 함께 ‘유령건물’로 전락한 신촌민자역사 현재 신촌민자역사 2~4층을 채운 것은 SM그룹의 해운사업 분야 계열사들이다. 대한해운, 대한상선, 케이엘씨에스엠, 한국선박금융 등이 지난 4월 이곳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SM그룹이 이곳의 새 사업자로 선정된 2019년 6월로부터 5년 만에 계열사 사무공간을 이전하는 방안으로 건물을 활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SM그룹은 신촌민자역사 지분 100%를 200억원에 인수해 5~6층 영화관 메가박스는 유지하고 1~4층에 식음료 매장과 쇼핑몰을 입점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무산됐고 이후 서대문구와 함께 이 건물을 임대주택과 주민편의시설을 갖춘 ‘역세권 청년주택’으로 바꾸겠다는 방안을 발표했으나 흐지부지됐다.
신촌민자역사는 2006년 준공 당시부터 이대 앞 상권 침체와 함께 난관에 봉착했다. 1~4층엔 동대문 패션의 대중화를 이끈 종합쇼핑몰 밀리오레가 들어섰는데 2009년까지 입점률이 20%에 그쳤고 2012년 폐점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대 상권은 대한민국 여성 패션·미용 트렌드를 선도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대로변에 스포츠 브랜드나 유명 패션 브랜드 매장이 즐비했다. 40년 넘게 패션·유통사업을 이어가는 이랜드그룹 또한 이대 앞 작은 보세 옷가게 ‘잉글런드’에서 출발했다. 10~20대 젊은이들이 주 방문객이니 스타벅스 등 대형 프랜차이즈들은 소비자의 선호도와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 1호점, 안테나숍을 이곳에 열기도 했다.
그러나 동대문패션타운이 인기를 끌고 인터넷쇼핑 시장이 커지면서 ‘패션 메카’로서 명맥이 끊겨 이대 상권은 개성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수요에 맞춰 대형 화장품 로드숍 등으로 대체되면서 다시 테마가 있는 상권으로 발전할 기회를 놓치고 흔한 학교 앞 거리가 됐다는 평가다.
신촌민자역사 옆 주차장에 하루에도 40~50대씩 대형 관광버스가 관광객을 이대 앞으로 실어나르던 때에는 정문 바로 앞 핵심 상권을 비롯해 이대역 3번 출구에서 정문으로 걸어오는 길 한 곳 걸러 한 곳이 중저가 화장품 로드숍이었다. 중국어로 적힌 광고를 붙여놓거나 호객 행위를 하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이마저도 옛말이 됐고 화장품 로드숍도 온라인으로 대체돼 지금은 중저가 커피 프랜차이즈로 간신히 대체되거나 공실로 남아 있다.
골목마다 가득했던 미용실과 보세 의류 매장, 액세서리 매장, 식당이 모여 있던 이화여대 5길, 7길도 몇 년째 비어 있는 곳이 많다. 한국부동산원의 상업용 부동산 임대동향 통계지도에 따르면 작년 4분기 신촌·이대의 공실률은 18.3%로 소규모 상가 5곳 중 1곳은 비었다. 이는 서울 평균 공실률인 5.8%의 3배 달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이번 민자역사의 새 사용처가 반갑다. 건국대 건축전문대학원의 ‘신촌민자역사의 활성화를 통한 도심재생 계획’ 연구는 이 곳을 연세대와 이대 앞 대학가의 중심지이자 연결지로 다시 주변 상권을 살릴 핵심 건물로 봤다.
2017년 아모레퍼시픽 본사가 서울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앞에 들어서면서 바로 옆 용산우체국부터 뒷골목을 따라 이어진 길이 ‘용리단길’로 급부상한 선례도 있다. 동네 슈퍼나 노포, 노후 주택들이 혼재된 공간이었지만 7년 새 세련되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식당, 카페, 베이커리, 빈티지숍 등이 들어섰다. 서울시 상권분석시스템에 따르면 이곳 유동인구는 30대 여성이 26.9%, 20대 여성이 22%다.
민자역사 활성화 연구는 “이대 앞 상권 정체기의 원인 중 하나인 외부 유입객 감소를 해결해야 경제적으로 지역이 소비의 기회를 얻고 잃어버린 대학가로서의 정체성 또한 되찾을 수 있다”고 했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골목 식당과 엔데믹을 기점으로 하나 둘씩 등장하는 카페 등에 조금씩 발걸음이 늘어가고 있다. SM그룹 계열사 입주가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면 이곳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일무이한 개성의 거리’라는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임나영 인턴기자 ny92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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